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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앤 포터

    캐서린 앤 포터 프로필

2021.03.24.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1890년 미국 텍사스주 인디언크리크에서 ‘칼리 러셀’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캐서린 앤 포터는 일찍이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소네트를 섭렵하고 여성 참정권을 옹호하는 에세이를 쓸 만큼 영민한 소녀였으나, 지극히 보수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남부 사회에서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열여섯 살에 남부 출신의 남성 존 헨리 쿤츠와 결혼하지만, 8년여에 걸쳐 그로부터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당한다. 남편 모르게 시와 소설을 쓰며 작가를 꿈꾸던 포터는 남편의 폭력으로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아이까지 유산한 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이혼을 감행하고, 과거와의 결별을 선언하듯 자신을 길러 준 조모의 이름을 따 ‘캐서린 앤’으로 개명한다. 이후 남부를 떠나 저널리스트와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1922년 《센추리 매거진》에 단편 「마리아 콘셉시온」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멕시코, 프랑스, 스페인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유도라 웰티, 어니스트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 디에고 리베라 등 당대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예술가들과 교유하며 「웨더롤 할머니가 버림받다」 「밧줄」 「꽃피는 유다 나무」 「창백한 말, 창백한 기수」 등 굵직한 단편을 연이어 발표해 문단에서 확고부동한 명성을 쌓았다. 1962년 발표한 유일한 장편 『바보들의 배Ship of Fools』가 그해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포터의 진가가 가장 빛을 발한 것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반으로 쓴 단편들이었다. 무명의 시기를 거쳐 문단의 스타이자 권위자로 인정받기까지 다섯 번의 결혼에 실패하고 이국땅을 전전하며 질병에 시달리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포터는 남부에서 보낸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유년 시절과 불행한 결혼 생활로부터 벗어나고자 평생 애썼으나,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경험과 기억은 자신의 시대와 인간 사회를 깊이 들여다보고 당대의 현실을 세밀하게 포착해 낼 수 있는 중대한 토양을 제공했다. 또한 자신의 삶과 작품에 있어 더 넓은 곳으로 끊임없이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포터는 1980년 90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채 서른 편이 안 되는 소설을 남겼지만, “동시대 미국 문단에서 거의 유일하게 순수성과 정확성을 갖춘 언어로 글을 쓰는 일류 예술가”(에드먼드 윌슨)라는 찬사를 받았고, 『캐서린 앤 포터 소설집』(1965)으로 1966년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세상이 부여한 한계를 깨고 ‘여류 작가’라는 호칭마저 거부한 채 자신의 삶과 시대를 소설이라는 형태로 치열하게 기록했던 포터는 하나의 여성에서 하나의 작가로서의 삶을 견지하며 평생을 독립적인 직업인으로 살다가 말년에 동부 메릴랜드주에 정착해 남편도 자식도 없는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6년 후인 1986년 미국 공영방송 PBS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미국의 거장들American Masters>은 <캐서린 앤 포터: 기억의 눈Katherine Anne Porter: Eye of Memory>을 제작해 포터의 삶과 예술 세계를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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