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호는 은암(隱菴), 아호는 산강(山江)이며, 정호(正好), 조생(曺生), 도시춘(都是春) 등의 필명을 썼다. 1893년 황해도 곡산군 청계면 송리 출신으로 1923년 <동아일보> 곡산분국에서 기자 활동을 하였다. 1904년 입교하여 봉훈, 도사를 역임하였다. 여러 개의 필명으로 <천도교회월보>와 <개벽> 지에 다양한 글을 썼다.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21년 천도교소년회가 설립되고 1923년 <어린이> 잡지가 창간될 때는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던 방정환을 도와서 서간 등으로 소통하며, 국내에서 이정호 등이 <어린이> 잡지를 발행하는 업무를 실질적으로 지도하였다. 한편 교단 차원으로는 곡산군교구 종법사, 경성부종리원 종리사, 경성부 대신사백년기념회원을 역임하였다. 1925년 교회가 신파와 구파로 분열되자 구파에 속하여 청년동맹중앙 집행위원과 상무위원, 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및 서기, 경성청년동맹 감찰위원, 청년동맹경기연맹 대표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지도관 촉탁과 청우당 중앙집행위원 및 상민부 위원, 경성당부위원을 역임하였으나 1932년 2차 분열 이후에는 청우당경성부 상무위원 및 유소년부 수석위원, 청년당경성부 감찰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문필활동을 계속하다가 1942년 5월 23일 평양에서 급성폐렴으로 환원하였다. 그의 부인 지흥당(知興堂) 최시영(崔時英)과 딸 조혜숙(曺惠淑)은 천도교여성회에서 오랫동안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죽음을 찾아서> 저자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