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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결생

2022.08.30.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나혜석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시흥군수와 용인군수를 지낸 개화기의 관료 나기정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13년 진명여자 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하고, 오빠 나기석의 권유로 한국 여성 최초로 도쿄시립 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하였다.
1914년 19세 때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며 문학계에 등장하였다.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약혼자였던 애인 최승구마저 결핵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말았다. 191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진명여학교에서 잠깐 교편생활을 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에 여성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조직하는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5개월 정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인 1920년 25세에 적극적으로 청혼하던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도 그림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1921년 만삭의 몸으로 국내 최초로 경성에서 유화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첫째 딸이 탄생하면서 남편이 중국의 만주(滿洲)로 부임하게 되어 이주하게 되었으나, 1922년에서 1926년까지 계속해서 조선미술 전람회에 그림을 출품하였다. 1923년에는 모성 신화를 부정하는 논설 「모(母) 된 감상기」를 발표하고, 1927년 만주에서 돌아와 부산의 시집에서 지내다가 유럽과 미국 시찰을 하러 가게 된 남편을 따라 여행길에 올라 ‘조선 최초로 구미(歐美) 여행에 오른 여성’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1929년 1년 8개월의 구미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 수원에서 ‘구미 사생화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930년 35세에 넷째 아이를 낳았지만 파리 시절 최린과의 연애에 관한 소문이 돌면서 남편과의 관계가 악화하면서 이혼하였다.
1931년 나혜석의 그림 「정원」이 조선미술 전람회와 일본의 제국미술 전람회에 연이어 입상하는 초유의 기록을 세운다. 입상을 계기로 나혜석은 재기한다. 금강산에 머무르며 30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머물던 집에 불이 나 작품 대부분을 잃고 만다.
1934년 「이혼 고백서」를 발표하여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혼 후 힘들어하던 나혜석을 나 몰라라 하며 떠난 최린에게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1937년 42세에 충남 예산의 수석사 밑 수덕여관에 기거하다 1944년 수덕사를 떠나 전국의 사찰들을 순례하며 전국을 떠돌아다니게 된다. 작품 활동을 계속하려 하였으나 파킨슨병과 관절염, 중풍, 우울증은 계속 악화하였고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안양 양로원을 거쳐 인왕산 근처 청운 양로원에 기거하다 퇴소하고 1945년 안양의 경성기독보육원의 농장으로 옮겨졌다.
1948년 12월 10일, 53세의 나혜석은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보육원을 뛰쳐나와 길거리를 헤매다 배고픔과 추위에 쓰러져 병사한 것으로, 죽기 직전 여러 질병으로 대화가 어려웠기에 행려병자, 무연고자로 처리되고 말았다.

백결생
익명의 남성

<모된 감상기/관념의 남루를 벗은 비애/백결생에게 답함>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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