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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행

    임신행 프로필

  • 국적 대한민국
  • 출생 1940년
  • 학력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학사
  • 경력 2003년 창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 데뷔 1962년 자유문학 단편소설 등단
  • 수상 1969년 대한교육연합회 문교부장관상

2015.01.14.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임신행
1940년 일본 오사카 스이타시(吹田市)에서 어머니 장소임(張少任)과 아버지 임재근(任載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살던 빨간 양철 지붕 이층집 뒤로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있었고 앞마당에는 벚나무 숲이 500여 평이었다. 지금도 아버지가 어린 나를 목말 태워 마당의 벚나무 사이를 산책하며 버찌 따 주던 일이 또렷이 기억난다. 벚나무 동산을 끼고 앞으로 가면 큰 공장과 긴 층계가 나타났고, 집 옆에 있던 산은 삼나무로 우거졌다. 그 산에서 우리 가족은 비행기 폭격을 피해 숨었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해방됐다. 일본으로 시집갔던 어머니는 억누르고 있던 자아를 찾았다. 어머니는 예전부터 앓던 지독한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귀국을 서둘렀다. 어머니의 자아는 향수병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어머니는 장남인 나와 두 살 아래인 남동생 준언(俊彦)을 데리고 귀국선으로 대한해협을 건넜다.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나서면 일본인 남편이 따라올 것으로 아름다운 착각을 했지만 아버지와는 영영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귀국선에서 먹었던 주먹밥과 우메보시의 맛을 지금도 기억한다.
어머니는 두 아들과 친정인 경북 김천시 교동으로 갔다. 이때부터 나는 본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외가에 더부살이를 하며 암울한 유년을 보냈다. 일본에서 자란 탓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고 동네 또래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아이들은 쪽발이, 대가리 장군, 호박 장군이라며 때렸다. 심지어는 돌을 던져 머리가 터지고 온몸이 멍든 날도 많았다. 그때 생긴 머리 흉터는 아직도 남아 있다. 길가 차전초로 어렵게 어렵게 유년을 보내다 6·25의 참혹한 전황을 겪었다.
1949년 초등학교 3학년 때 일본에 계시던 아버지가 밀항 거간꾼을 보내 우리 형제를 일본으로 데려오게 했다. 어렸을 때지만 ‘어머니냐, 아버지냐’를 두고 사흘을 생각한 끝에 밀항 거간꾼을 따라 아버지 곁에 가기로 결심했다. 훗날 일본서 성공해 어머니를 꼭 찾아올 것을 동생과 굳게 맹세했을 뿐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약속했다. 동생과 밀항을 위해 아버지가 일본서 사서 보낸 일본 초등학생이 입는 교복과 가방, 신 등을 보자기에 싸안고 김천 교동에서 부산 다대포로 이동했다. 이틀 밤낮을 다대포 몰운대 솔숲에 숨어 밀항선을 기다렸다. 사흘째 되던 날, 자정을 넘긴 시간에 밀항선이 와서 탔다.
두 자식의 현실의 손과 미래의 인연을 놓지 못해 어머니는 대성통곡했다. 어둠을 울리는 통곡 소리에 놀란 밀항선 선장은 암벽에서 따개비를 따 건네듯 어두운 바닷가에 형제만 내려 주고 달아났다. 어머니의 울음으로 밀항은 실패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의 흰 손수건에 벌겋게 묻은 피눈물을 처음으로 봤다. 아픔과 슬픔이 깊으면 눈에서 피눈물이 흐른다는 것을 어린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그 후 나는 다대포와 몰운대로 발걸음 하지 않았다.
김천으로 다시 온 우리 형제는 곤고한 나날을 보냈다. 소년 시절 이산(離散)의 아픔으로 혹독하게 시달렸다.
1951년 땔감을 구하고 허드렛일을 하느라 초등학교는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금릉초등학교를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피란민으로 들끓는 부산 국제시장으로 가 간판집 견습공이 되었다. 그 후 실 공장 견습공을 하다가 결핵 증세 때문에 다시 김천으로 돌아왔다. 김천중학교에 편입했지만 학업 성적이 미달되었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농업을 가르치던 김이득 선생님의 은혜로 겨우겨우 졸업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서 노력한 끝에 부산 사범학교, 부산 공업고등학교 기계과에 응시했지만 두 학교에서 모두 물먹고 말았다. 그 무렵 일본에 계시던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풍문으로 접했다.
1957년 어머니가 있는 부산으로 형제가 다시 갔다. 부산 국제시장 1공구 A동에 진을 치고 봄·여름·가을에는 감·사과·복숭아·자두·과자를 새벽 거리 장에서 팔고 겨울에는 숯을 손바닥 크기로 쪼개 화로에 넣어 붉은 불씨 한 덩이를 놓고 불을 피워 주는 숯 장사를 했다. 야경꾼 노릇도 하고, 싸전에 들어오는 쌀가마니를 옮겨 주고 품삯을 받기도 하고, 시장의 온갖 짐을 나르는 짐꾼 노릇도 했다. 그 돈으로 헌책을 사다가 읽고 세 식구 입에 풀칠을 했다. 돈이 몇 푼 모이면 부산 시립 도서관 용두산 밑에 계시던 어머니께 드리고 클래식 다방과 책을 대여해 주는 대본소를 전전하며 문학 책을 제법 많이 읽었다.
1960년 동생 준언의 도움으로 부산 동아고등학교 야간부 2학년에 편입했다. 부산 ≪국제신문≫, ≪민주신문≫의 학생 문단에 투고한 글이 게재되기도 했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드나들며 사서 읽은 문학작품으로 지독한 문학 병을 시름시름 앓았다. 그 후에도 ≪국제신문≫, ≪부산일보≫, ≪민주신문≫에 작품을 투고해 발표했다.
시인 김종해(≪문학세계≫ 사장), 시인 오규원(필명 나무현), 시인 김종철(≪문학수첩≫ 사장)의 이름을 익히고 뒤에 만나 교우를 가졌다. 도서관에서 유익서(소설가)를 만났고, 그곳에서 문청 오규원, 김종해, 김원호를 자주 만났다. 김종해 시인과는 이때부터 매우 가깝게 지냈다. ≪학원≫에도 작품을 투고해 학원파에 들어갔다.
1961년 국학대학이 주최하고 김동리 선생이 심사한 전국 고등학교 문예 작품 현상 모집에 소설 <그늘 속의 얼굴>과 <용바위골>을 응모했고, 소설 부문에 <용바위골>이 당선했다.
196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위해 몸부림쳤으나 진학이 좌절되었다. 영도 다리에서 바다로 풍덩 빠졌다. 결국 바닷물만 실컷 먹었다. 육군3사관학교에 응시했으나 결핵 양성 반응으로 불합격했고 전투경찰에 응시해서 3위로 합격했다. 성적이 우수하다며 경상남도 경찰청 인사 담당자가 두어 차례 찾아와 경찰이 될 것을 권유했지만 막연한 두려움에 도망 다녔다. 그해 ≪자유문학≫지에 단편소설 <진개장(塵芥場)>을 응모했고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등단했다.
같은 해, 전국 고등학교 문예 작품 현상 모집에 당선되었다. <용바위골> 덕분에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 특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민속학자 임동권 학장이 부산 문인들 중 한 분에게 추천서를 받아 오는 것이 특기 장학생으로 입학할 요건이라며 추천서 받기를 권고했다. 향파 이주홍 선생에게 찾아가 청을 드렸으나 거절당했다. 훗날 이 일로 이주홍 선생에게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권오운 시인과 미아리 고개에서 같이 자취하며 6개월간 학교를 다녔다. 개울 너머를 오고 가며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지훈 교수의 강의를 몰래 들었다. 그 후 부산에 있는 가족 곁으로 돌아왔다.
1963년 군에 입대했다. 1964년에는 양평 주둔 제28사단 수색중대에서 근무하다 소설가 한승원의 눈에 들어 사단 사령부 작전상황실 근무로 차출됐다. 한승원의 조수로 군 복무 하며 함께 책을 읽고 소설을 습작했다. 그리고 한승원을 주축으로 ≪BNNT(여명)≫라는 진중(陣中) 동인지를 만들었다.
1965년 대학에 진학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월남전에 지원하여 맹호부대로 파병됐다. ≪국제신문≫에 장편동화 ≪성게와 가자미≫를 연재했다. 최계락 선생이 아동문학을 할 것을 권유했다. 최계락 선생은 매달 나의 어머니를 오시라 하여 점심을 대접해 주고 원고료를 손에 쥐여 줬다.
1966년 파월 맹호부대 정훈대 근무를 하면서 동화 작품을 발표했다. ≪소년한국일보≫에 <꾸몽 고개의 무지개>를 발표하고, ≪대구매일신문≫ 등에도 동화를 발표했다. 1966년 9월에 귀국하고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 ≪베트남 아이들≫을 최계락 선생의 소개로 ‘교학사’서 출간했다.
1967년 베트남 전쟁 파병 급여 1백만 원이 우체국에 적금되어 있다는 어머니의 말을 믿었으나 이 돈은 동생이 탕진했다.
1968년 ≪한국일보≫에 <달마산 아이들>이 당선했으나 표절로 당선이 취소됐다. 이는 필자의 무식으로 인한 것이었다. 오영수 선생이 ≪현대문학≫에 발표한 단편 <요람기>에서 네 줄을 인용했는데, 원고 맨 끝이나 원고 낱장 아래 빈자리에 인용했다는 출처를 밝히지 않고 ‘*’만 표시했던 것이다. 이후 ≪한국일보≫는 1면에 7행 정도의 박스 기사로 필자에 대한 위로 글을 게재했다.
모든 잘못은 자기 스스로에게서 비롯된다. 확실한 것은 인용 문장에 ‘*’ 표만 했다. 얼마 있다가 그 원고를 찾아 사실을 말하려고 했을 때 ≪한국일보≫ 사옥은 화재를 입었다. 원고는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안타깝다. 내 처지가 참 안타깝다.
당시 문화공보부가 주최한 5월 신인 예술상에 동화 <강강술래>가 당선했다. <강강술래> 원고는 외우(畏友) 안정효가 깨끗하게 정서를 해 줬다. 11월에 안정효의 권유로 초등학교 교사 임용 서열 고시에 응시했고 하동군에서 6위로 합격했다. 정해진 교육을 이수하고, 하동군 양보면 우복초등학교에 강사로 첫발을 내디뎠다.
1969년 대한교육연합회가 간행하는 ≪새교실≫지에서 현상 공모한 동화 모집에서 ‘정정’이라는 필명으로 보낸 동화 <민들레>가 당선해 문교부장관상을 받았다. 그 상금은 진주교대에서 열린 3개월간의 준교사 자격 연수 경비로 사용했다.
19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화 <하얀 물결>이 당선했다. 12월 28일 향파 이주홍 선생의 도움으로 ≪베트남 아이들≫ 외 네 권의 동화집 출판 기념회를 부산 광복동에서 열었다. 더불어 이 출판 기념회에서 인접 횡천초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전풍영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주례는 향파 이주홍 선생이 해 주셨다. 이후로 이주홍 선생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71년 장남 지헌이 태어났다.
1972년 구연동화집 ≪분홍 조가비≫(공저)를 금강출판사서 출간했다. 창작 구연동화에 관심을 가지고 각종 학예 행사를 열었고 구연동화 심사 규준 표를 최초로 창안하며 창작 구연동화를 보급하는 데 노력했다.
같은 해 차남 지우가 태어났다. ≪소년중앙≫에 동시 <봄 여름 가을 겨울>(필명 ‘전하나’)이 가작으로 입선했다. 이때 동화 부문 최우수는 정채봉의 <무지개>였다.
1973년 창녕군 남지초등학교로 전출했다. 시인 김옥영, 소설가 윤정규와 교우했다.
1974년 소설가 김정한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되어 남해 지방의 방언집과 많은 자료를 받았고 소설을 창작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1975년 1월에 향파 이주홍, <선구자>의 작곡가 석호 조두남, 시인 동기 이경순 선생과 함께 해인사 등지를 떠돌며 자연의 섭리를 보고 배웠다. 그리고 방학 기간 동안 삶의 진지함과 대인관계를 이주홍 선생을 통하여 경험으로 배웠다.
그해 3월 마산시 봉덕초등학교로 전입하면서 도시 생활을 시작했다. 석호 조두남, 향파 이주홍 선생을 자주 뵀다. 마산 문인협회에서 부지부장이라는 이름의 심부름꾼으로 성실히 일했다. 20년 장기 대여금을 얻고 열아홉 평짜리 성냥갑 집을 장만했다.
1977년 딸 지민이 태어났다.
1979년 ‘갈숲’ 동인(향파 이주홍, 운성, 구상, 청남 오제봉, 박순녀, 송원희, 박노석, 우인, 송지영)에 참여했다. 7월 29일 태풍으로 영남 지방에 홍수가 났다. 홍수로 교실 아래층 열 개 교실에 물이 들어왔고, 우연히 학교에 들렀던 나는 학교 재산과 학적부를 혼자 옮기고 수해를 입은 학구민들을 학교 2층으로 대피시켰다. 이후 교육부 장관 표창과 내무부 장관 표창이 내려왔으나 학교에 오지도 않은 타 교사들이 받았다. 이 사건으로 교육계의 부패를 실감했다.
1980년 동화집 ≪꽃불 속에 울리는 방울 소리≫를 ‘문학세계사’서 출간했다. 이때 아동문학 평론가 사계 이재철 박사의 해설을 출판사서 게재하여 그를 만나 인사드렸다.
1981년 1월 1일자 ≪한국일보≫에 컬러판 ‘새해 아침에 함께 복을 여는 페이지’ 특집으로 한국 최초 새해 컬러 동화 ≪까치네 집≫(우현 송영방 화백 그림)이 게재됐다.
마산 양덕초등학교서 근무하면서 숨어서 마산 문인협회의 일을 했다. 전남 아동문학회, 부산 아동문학회, 경남 아동문학회 친선 배구 대회를 주선하고 아동문학을 위해 토론했다.
1987년 3월 순환 근무제로 인해 남해군 이동초등학교로 전근 갔다. 이때 스스로의 삶을 유배지로 자인하고 절망과 좌절을 느끼고 심한 자폐증 증세를 보였다. 깊은 우울함에 빠진 것이다. 소설가 문신수 선생과 교육자이자 향토 사학자인 김우영 선생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새벗≫에 장편 해양 동화 ≪안개 섬 동굴≫을 연재하고 성인 시 창작에 몰두했다.
1986년 도서 벽지 북창선초등학교로 전입했다. 북창선초등학교 어린이들과 선상문학의 밤과 바닷가 시화전을 열어 섬 어린이와 학부형들에게 시심과 삶의 현장에서 묻어나는 소금기 묻은 끈끈하고 진한 정을 나누었다.
1987년 향파 이주홍의 타계로 깊은 상처를 받고 술로 섬 생활을 했다.
1988년 동화 창작보다 시작에 몰두하며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1989년 3월, 4년이라는 긴 섬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가족과 함께 살았다. 완월초등학교서 근무하며 젊고 재능 있는 김석산 교사와 교우하고 시화전 등 많은 학예 행사를 개최했다.
1995년 월성초등학교로 전근 갔다. ‘등꽃나무 아래서의 시와 음악’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들과 반 학예회를 열었다.
2000년 창녕 명덕초등학교로 전근했다. ‘장미꽃 울타리에 시와 음악’이라는 생명 시화 및 시 낭독회를 열었다.
2001년 마산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2002년 삶의 기둥이셨던 어머니를 잃었다.
2003년 36년 동안의 초등 교사 및 창신대학교 문예창작과 강의 생활을 정리했다.
2010년 한국 아동문학인 100인 서가전에 참여했다.

약력과 작품 및 수상 연보

1961년 <용바위골>로 국학대학 주최 전국 고등학교 문예작품 현상모집 소설부문에 당선(김동리 심사).
1962년 단편소설 <진개장>으로 ≪자유문학≫지를 통해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등단.
1965년 ≪국제신문≫에 장편동화 ≪성게와 가자미≫ 연재.
1966년 ≪소년한국일보≫에 단편동화 <꾸몽 고개의 무지개>, ≪대구매일신문≫ 등에 동화 발표. ≪베트남 아이들≫(교학사) 출간.
1967년 ≪강강술래≫(교학사), ≪꿈꾸는 강아지≫(교학사) 등 다수의 동화집 출간.
1968년 동화집 ≪베트남에서 가져온 이야기≫(교학사), ≪메콩 강 이야기≫(보영출판사), ≪숑 강의 아이들≫(보영출판사), ≪야자나무 숲 이야기≫(보영출판사), ≪꾸몽 고개의 무지개≫(보영출판사), ≪탄이라는 아이≫(보영출판사), ≪반과 물소≫(보영출판사) 출간. ≪아동문학사상≫ 5호에 동화 <마르꼬의 크리스마스> 발표.
1969년 동화집 ≪꽃배≫(교학사) 출간. 단편동화 <민들레>(필명 ‘정정’)가 ≪새교실≫지(대한교육연합회 간행)의 동화 모집에 당선하여 문교부장관상 수상.
1970년 단편동화 <하얀 물결>로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
1971년 구연동화집 ≪분홍 조가비≫(금강출판사, 공저) 출간.
1972년 동화집 ≪들꽃 숲의 이야기≫(교학사) 출간. 동시 <봄 여름 가을 겨울>(필명 ‘전하나’)이 ≪소년중앙≫에 가작으로 입선. 하재홍과 만년교를 설립하고 문예지 ≪만년교≫ 창간. 이후 만년교는 창녕문학 창녕문인협회가 됨.
1974년 ≪들꽃숲의 이야기≫로 부산·경남 예술인에게 주는 눌원문화상 본상, ≪강강술래≫로 경상남도가 주는 도문화상 문학부문 수상.
1976년 ≪꽃무지개≫(문성출판사) 출간. 경남아동문학회 창립.
1977년 동화집 ≪방울 귀신≫(문성출판사) 출간. 1982년까지 마산문협 부지부장 지냄.
1979년 구연동화집 ≪아기들의 숲≫(새로출판사), 동화집 ≪아기 도깨비가 사는 집≫(서문당), ≪아기 도깨비와 아이들≫(새로출판사) 출간. 동화 <겨울 망개>로 ≪소년한국일보≫ 제정 세종아동문학상 수상. ≪소년조선일보≫에 장편산악동화 ≪지리산 아이≫ 연재.
1980년 동화집 ≪꽃불 속에 울리는 방울 소리≫(문학세계사), ≪바다로 나가는 아이≫(갑인출판사) 출간.
1981년 동화집 ≪방울이와 도깨비≫(견지사), 동화집 ≪잎새에 이는 아기 바람≫(아동문학사), ≪하노이에서 온 아이≫(교학사) 출간. ≪한국일보≫에 ‘새해 아침에 함께 복을 여는 페이지’ 특집으로 컬러 동화 <까치네 집>(우현 송영방 화백 그림)이 1월 1일에 게재. 동화집 ≪꽃불 속에 울리는 방울 소리≫로 제2회 한국어린이도서상 저작 부문상 수상.
1982년 동화집 ≪안개 섬 아이들≫(삼성당), 동화집 ≪까치네 집≫(문학세계사) 출간. ≪어린이 문예≫에 장편동화 ≪꽃사슴≫ 연재. 동화집 ≪까치네 집≫으로 대한민국문학상 아동문학부문 우수상 수상.
1983년 장편동화 ≪아이들의 동굴≫(백미사), ≪상록수≫(문학세계사) 출간. 동화집 ≪방울이와 도깨비≫로 이주홍 아동문학상, 장편동화 ≪골목마다 뜨는 별≫로 계몽사 어린이문학상 가작 수상.
1984년 장편해양동화 ≪해저 동굴≫(문학세계사), ≪동토의 왕국≫(문학세계사), 장편동화 ≪꽃섬 아이들≫(문학세계사), ≪한 별씩, 한 꿈씩≫(금성출판사), ≪부엉이 집≫(금성출판사, 공저) 출간.
1985년 동화 ≪하얀 풀꽃≫(금성출판사), ≪갈매기 섬 아이들≫(가톨릭출판사) 출간. ≪새벗≫에 장편해양동화 ≪안개 섬 동굴≫ 연재.
1986년 ≪동백꽃 수놓기≫(문학세계사), ≪나이테로 자란 아이≫(거암), ≪아기 도깨비가 사는 집≫(서문당), ≪아기 호랑이≫(삼성당) 출간.
1987년 장편동화 ≪서울 아이들≫(동보출판사), ≪말숙이의 모험≫(역학), ≪섬에서 온 말숙이≫(영학), 해양모험동화집 및 명랑동화집 10여 권, ≪난지도 하늘에 뜬 무지개≫(문공사), 장편해양동화 ≪도깨비 섬의 동굴≫(문공사), 동화집 ≪마법의 집≫(문학세계사), 시집 ≪섬 엉겅퀴 비에 젖으며≫(거암) 출간.
1988년 5월 4일 KBS <11시에 만납시다> 출연.
1989년 명상동화 ≪아기 도깨비의 파란 수첩≫(거암), ≪까치 섬의 아기 꽃게≫(문학세계사), 장편소년소설 ≪빨간 나비들≫(아동문예), ≪통일 달리기≫(꿈동산) 출간. 모범공무원상 수상.
1990년 해양소년소설 ≪해 뜨는 섬≫(윤성), ≪이상한 섬 다람쥐≫(윤성), ≪물빛 갈매기 한 마리가≫(윤성), ≪모과꽃 바람이≫(삼익출판사), 시집 ≪진실로 사랑하는 연인의 가슴에만 자귀나무꽃은 핀답니다≫(윤성) 출간.
1991년 ≪도깨비의 웃음소리≫(윤성), ≪청동 도깨비≫(윤성), ≪귀신을 잡은 아이≫(윤성), ≪도깨비 수색대≫(윤성), ≪도깨비야, 도깨비야! 뭐하니?≫(윤성), ≪떡갈나무 숲 속의 아기 도깨비≫(윤성), ≪서울에 온 달걀귀신≫(윤성), ≪서울에 온 도깨비≫(윤성), ≪아기 도깨비 또또마니≫(윤성), ≪아기 도깨비의 비밀 수첩≫(윤성), ≪이사 온 도깨비≫(윤진문화사), ≪도깨비 섬의 유령≫(문공사) 출간.
1992년 동화집 ≪초록 머리 물떼새≫(중원사), ≪진실한 사랑은 영원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해 두는 것입니다≫(천지서관), ≪황룡사 방가지똥≫(민음사) 출간. ≪황룡사 방가지똥≫으로 제1회 황금도깨비상 대상 수상.
1993년 ≪은빛 갈매기≫(계몽사), ≪풀색 꽃무지≫(동지) 출간. ≪초록 머리 물떼새≫로 제3회 방정환아동문학상과 제4회 경남문학상 수상.
1994년 환경동화 ≪갈대숲 속 작은 집의 비밀≫(비룡소), ≪꼬마 물떼새≫(동아출판사), 시집 ≪버리기와 버림받기≫(문학수첩) 출간.
1995년 ≪못 말리는 강아지 도깨비≫(문학창조사) 출간.
1996년 ≪공룡아, 공룡아! 뭘 하니?≫(아동문예), 시집 ≪케니 G를 위하여≫(민음사) 출간.
1997년 ≪별을 타고 온 아이≫(신아출판사), ≪바람이 된 도깨비≫(여명출판사) 출간.
1998년 ≪흰 고래를 잡으러≫(아동문예), ≪햄스터, 햄스터!≫(삼성당), ≪햄스터와 아기 게≫(눈열린교육) 출간. 어린이문화예술상 대상 수상.
1999년 ≪산을 끌고 온 아이≫(경남아동문학회), ≪황소개구리와 가시연꽃≫(하나두나) 출간. 장편환경동화 ≪우포늪에는 황금 도깨비가 산다≫를 계간 ≪동시와 동화나라≫에 연재. 영남아동문학상 수상.
2000년 ≪아동문예≫에 장편 ≪아기 코뿔소≫ 연재. 민족동화문학상 수상. 창신대학교 문예창작과, 창원대학교 평생교육과 아동문학 강의.
2001년 ≪열쇠 꾸러미≫(선경미디어) 출간.
2002년 ≪경남도민일보≫에 장편동화 ≪붉은 꼬마 원숭이 으싸≫를 연재.
2003년 ≪아기 코뿔소≫(세계문예), ≪붉은 꼬마 원숭이 으싸≫(세계문예), 장편생태동화 ≪노랑 할미새는 그 비밀을 알고 있을까≫(세계문예), ≪의리를 지킨 선비≫(대연출판), 시집 ≪푸른 수첩 갈피 속에는≫(아동문예), 시집 ≪하얀 아기 굴뚝새≫(아동문예), 시집 ≪우포늪에는 별똥별이≫(아동문예) 출간. 마산시문화상 문학부문 수상.
2004년 ≪경남도민일보≫에 자연생태 연작시 <우포늪에서 보내는 편지> 연재. ≪우포늪에서 보내는 편지≫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받음.
2005년 ≪경남문학연구≫ 제3호에 운성 구상 선생의 작품 세계 <시인의 초상>, <“오빠 생각”의 최순애 작품론> 발표. ≪창조문예≫에 ≪오래된 미래≫ 12회 연재. <노랑 할미새는 그 비밀을 알고 있을까?>로 제5회 최계락문학상 수상.
2006년 ≪경남도민일보≫에 자연에세이 ≪우포늪 통신≫ 연재.
2007년 ≪열린아동문학≫에 <내 이름은 방실금> 발표.
2008년 장편동화 ≪풀산딸나무 그 꽃≫(아동문예), 자연생태동화 ≪우포늪 아기 도깨비≫(해성), 자연에세이집 ≪이제 우리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우포늪 통신≫ 개작, 창조문예사) 출간. 김달진 문학관 주관 ‘시야 놀자’ 동시 <클릭> 외 열네 편 낭송 및 강연.
2009년 창작동화집 ≪언제나 꽃 피는 과수원≫(아이들판) 출간.
2010년 한국아동문학인 100인 서가전 참여. ≪마산문협 50년사≫ 아동문학 부문 집필, <조유로 작품론> 발표. 제20회 시민불교문화상 수상.
2011년 ≪아동문예≫에 장편동화 ≪우짜건노 그쟈≫ 연재. ≪시애≫ 제5호에 <이야기로 듣는 영남문학사>(이주홍 선생) 집필. 제1회 세계아동문학축제 문학 강연. 현재까지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한국아동문학회 자문위원 지냄.
2012년 월간 ≪창조문예≫에 자연생태 사진동화 ≪우포늪 그 아이≫ 14회 연재. ≪열린 아동문학≫ 53호에 <내 작품의 고향 지리산 아이>, <꽃불 속에 울리는 방울 소리> 발표. ≪굴참나무 숲에는≫(아동문예) 출간. 김달진 문학관 주최 제6회 구연동화 심사.

해설 - 박종순
1964년 경남 의령군의 작은 들마을에서 태어나 자연 속에서 유년을 살았다. 흙을 만지며 소꿉놀이도 하고, 꼴을 베고 소를 먹이며 일하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넓은 자연의 품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되고 있다고 믿는다.
아이 엄마가 된 후 아동문학 동네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원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여 <이원수 문학의 리얼리즘 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2011년에 창비에서 출간한 연구논문집 ≪이원수와 한국아동문학≫에 글을 실었다. 2003년에 아동문학평론으로 등단을 하였으나, 아직 공부는 턱없이 모자라 학회 활동과 평론 쓰기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진주교육대학교에서 5년 여간 아동문학과 어린이 글쓰기 지도에 대한 강의를 하였으며, 지금은 창원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가르치고 배우며 문학, 글쓰기에 대한 깊이를 가지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지역에서 독서문화 활성화를 위한 활동을 다양하게 하고 있다.

<임신행 동화선집>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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