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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유 王仁裕

    왕인유 프로필

2023.09.26.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옥당한화(玉堂閑話)》의 찬자 왕인유(王仁裕, 880∼956)는 오대(五代)의 문인으로, 자는 덕련(德輦)이고 천수[天水, 지금의 간쑤성(甘肅省) 톈수이시(天水市)]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글을 알지 못했고 사냥을 일삼다가 스물다섯 살에야 비로소 공부를 시작해, 문장으로 진롱[秦隴, 지금의 산시성(陝西省)·간쑤성 지역] 지역에 이름이 알려졌다. 당나라 말에 진주절도판관(秦州節度判官)이 되었으며, 진주가 전촉(前蜀)에 편입되자 중서사인(中書舍人)과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그 후로 후당(後唐)에서는 진주절도판관·도관낭중(都官郞中)·한림학사를 지냈고, 후진(後晉)에서는 사봉좌사낭중(司封左司郞中)·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으며, 후한(後漢)에서는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호부상서(戶部尙書)·병부상서(兵部尙書)·태자소보(太子少保)를 지냈다. 후주(後周) 세종(世宗) 현덕(顯德) 3년(956)에 77세로 생을 마쳤고, 태자소사(太子少師)에 추증되었다. 왕인유는 시문(詩文)에 능했고 음률에 밝았으며, 화응(和凝)과 함께 오대 때 문장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필기 저작으로 《옥당한화》 외에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와 《당말견문록(唐末見聞錄)》 등을 찬했으며, 시문집으로 《서강집(西江集)》 100권을 찬했지만 망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그의 전(傳)은 《신오대사(新五代史)》 권57 〈잡전(雜傳)〉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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