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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3.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안미란
나는 잠실에서 태어났다. 서울 강남의 잠실이 아니라, 누에 치는 방[蠶室]에서 이 세상과 마주했다. 1969년, 그때까지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던 깊은 산골 마을이었다.
경북 김천이 고향인 부모님께서는 내가 세 살 되던 해에 서울로 향하셨다. 대대적인 이촌향도 대열에 합류하신 것이다. 그때 세 살이었던 나는, 온 가족이 서울로 갔지만 홀로 외가에 남겨졌다. 언니는 어리지만 엄마의 일을 도울 수 있었고, 남동생은 너무 어렸으며 여동생은 아직 세상 빛을 보기 전이었다. 외할머니는 당신의 딸이 낯선 서울에서 고생할 것이 너무나 안쓰러워 입 하나를 덜게끔 나를 떼어 놓게 하셨다. 호호할머니가 되신 외할머니는 지금도 나에게 ‘네가 참 순했다.’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순했다는 것은 어쩌면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나에게 그냥저냥 갖다 붙이는 칭찬 같은 것이다.
동네 신작로는 끝 간 데 없는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저 길 끝에 서울이 있고 서울 어딘가에 나의 가족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다. 배나무, 사과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 들이 꽃을 틔울 때면 가슴에서 알 수 없는 흥분과 동경이 솟아나 어린 나를 사로잡았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오셨다. 아버지는 두고두고 입을 수 있는 커다란 반바지를 장에서 사 오셨다. 이모가 허리에 고무줄을 넣어 줬지만 마른 다리에 바짓단이 휙휙 감겼다. 먼 친척의 장례가 있어 아버지와 나는 장의차를 얻어 타고 한밤중에 서울로 왔다. 조그만 공업사 직공이었던 아버지는 운 좋게 버스비를 아낄 수 있었다.
“아빠, 전깃불이 왜 빨개요?”
내가 서울에 와서 처음 물어본 말이다. 네온사인을 본 게 처음이니까.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아주 길고도 자세하게 네온사인의 원리를 설명해 주셨다. 그때는 몰랐다. 아버지가 그렇게 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술을 드시지 않으면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는 분이셨다. 그러나 술을 들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가리봉동, 독산동, 시흥동…. 서울이지만 변두리였다. 벌거숭이 산비탈에 밭도 있고 논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었다. 집 앞 개천은 시궁창이었다. 질척한 오물 사이에서 나와 동생은 쇳조각을 찾았다. 그때 엿장수는 돈 대신 쇠붙이도 받아 주었다. 그때 밤늦도록 골목을 쏘다니며 했던 혹성 탈출 놀이, 술래잡기, 치기 장난은 아직도 행복한 추억이다.
초등학교는 그야말로 과밀 학급이어서 3학년 17반, 총원 120명을 훌쩍 넘기도 했다. 말수도 적고 운동신경도 둔했던 나는 교실에서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반장 선거를 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아이들 의견과 상관없이 담임이 무조건 임명했는데, 민주주의 교육의 일환으로 직접 선거를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때 여자 부회장인가 뭔가가 말석으로 되었는데, 일주일 뒤 애국 조회 때 임명장을 받지 못했다. 대신 부잣집 아이가 구령대로 호명되었다. 투표 결과와 상관없이 신설 학교에 많은 후원을 해 줄 학부모의 아이가 임원이 되어야 했던 걸까. 담임선생님은 방과 후에 나를 따로 불러 책 한 권을 주셨다. 가난 때문에 상처를 받을 것을 염려해서인지,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는지 알 길은 없지만 ‘너라면 읽을 수 있을 거야.’라는 격려와 함께 두툼한 책 한 권을 빌려 주셨다. 그 책은 미하엘 엔데의 ≪기관차 대여행≫이었는데, 아동 판이 아니라 성인 문고였다. 이제껏 읽어 보지 못한 신세계가 책 속에 있었고 나도 이런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학생 시절, 학업 성적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우리 가족은 여러 집이 세를 든 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본래 다세대 목적으로 지은 집이 아니어서 마루를 공용으로 쓰고 안방과 작은방에 각각 다른 가족이 살았다. 옆방 아주머니는 그 집 아이들을 위해 그림책 전집이며, 위인전을 사들였다. 또 다른 옆집에는 붉은색 계몽사 세계문학전집 50권이 있었다. 중간에 읽다 보면 낱장이 뜯어져 없거나 아예 인쇄가 통째로 안 된 책도 있었지만, 그 책들은 소중한 보물이었다. 책 주인인 그 집 아이들보다 나와 언니가 더 많이 읽었다고 기억난다. 톰 소여와 뤼팽, 홈스, 하이디, 그리고 빨강머리 앤. 내성적인 나에게 가장 좋은 친구였다.
동국대학교 철학과에 적을 뒀던 대학 시절은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입학하자마자 선배들은 민중가요를 불렀고 투쟁 구호를 외치며 술잔을 건넸다. 철학과의 신입생들은 일찌감치 선봉에 서거나, 군대로 후다닥 내빼거나, 의문 없이 대열에 합류하는 길을 택했다. 문학 창작 동아리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민중 시를 읽고 시를 써서 대자보처럼 벽에 붙였다. 나는 여기저기 기웃대다 문학과는 점점 멀어졌고, 졸업 후 아무 준비 없이 사회에 내동댕이쳐진 꼴이 되었다.
어렵사리 구한 첫 직장은 방문 학습지 회사였는데 말이 교사이지, 영업이 주된 업무였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산동네를 종일 쏘다니면 다리가 퉁퉁 붓기 일쑤였지만, 늦은 밤 나를 달래 주는 것은 책이었다. 그러다 내가 담당한 학부모의 소개로 독서 지도사라는 일을 알게 되었고 전직을 희망하며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반년의 수강 기간 동안 동화책을 읽다 보니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꿈이 꿈틀거렸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꿈, 초등학생 때 내 가슴에 뿌려졌던 조그만 씨앗이 그때서야 눈을 틔우려고 몸부림친 것이다. 동화 작가. 다른 글도 아니었고 동화를 쓰고 싶어 했다.
독서 지도 과정 후속으로 개설된 창작 교실의 문을 두드렸다. 이때 신현득 선생님께서 동시 5편을 써 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는데, 이왕 썼으면 무조건 투고까지 하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했다. 그중 4편이 김종상 선생님의 심사로 덜컥 당선되는 바람에 동화가 아닌 동시로 등단했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찾아온 행운은 재앙이었다. 시를 쓰고 싶어 나름 시 공부를 하긴 했지만 동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쩐지 쉽고 우스워 보였다. 그러니 그 오만함과 뜻밖의 행운은 꾸준한 창작으로 이어질 수가 없었다. 오히려 두렵고, 어렵고, 버거웠다. 이제껏 쓴 동시가 50여 편뿐이고 아직까지 책으로 엮지 못한 것은 과분한 행운을 만나서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다.
어린이도서연구회 회원으로 있을 때에는 창작 분과 활동을 했다. 격주로 모여 작품을 합평하는 모임이었는데, 그런 식의 공부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배운 게 참 많았다. 특히 위기철 선생님의 짧지만 핵심을 찌르는 가르침을 받은 것이 큰 복이었다. 그때 구성원들은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어린이의 삶과 문학을 묶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다.
결혼 후 1년 만에 IMF라는 한파가 닥쳤다. 태어난 지 겨우 한 달 된 아기를 안고, 본가 옆인 김해로 내려왔다. 김해에 살던 때는 심각한 산후 우울증과 향수병에 시달려야 했다. 거기다 이대로 작가 인생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닥쳤다. ≪어린이동산≫에 중편 동화 <바다로 간 게>가 당선되었지만, 어디에서도 청탁은 오지 않았고 글 한 줄을 쓰지 않더라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중, 절치부심 끝에 쓴 ≪씨앗을 지키는 사람들≫이 2000년 제5회 창비 좋은어린이책 공모에 당선되어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심사를 보셨던 권정생 선생님은 왜 현재 일을 미래처럼 써서 시급한 사안을 무감각하게 만들었냐고, 앞으로 정신 차리고 글을 쓰라고 꾸짖으셨다. 그러나 이 책 덕분에 글을 계속 써도 되겠다는, 문학에 대한 희망을 더 키워 보자는 위로와 격려를 스스로에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 새댁이었던 내가 부산 생활에 적응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부산과 김해에도 문학 단체가 있고 동화 읽는 어른 모임이 있었지만 육아와 가사, 시댁의 대소사 때문에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다. 게다가 마음을 터놓고 글 이야기를 할 문우들은 서울에 있었다. ≪어린이문예≫의 배익천 선생님께서 원고 청탁을 해 주시지 않았다면, 나의 작가 인생은 더 이상 이어지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작품다운 작품을 쓰지 못하자 애가 타고, 마치 벽에 머리를 부딪치는 기분마저 들었다. 공부를 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나이 마흔에 부산대 대학원에 들어갔다. 문학을 제대로 알지 못해 작품을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초조감 때문이었다. 체력적으로 힘든 과정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은 시간이었다. 보고서에 스터디에 게다가 딸아이 셋의 뒷바라지까지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작품 창작의 양만큼은 가장 왕성했다.
등단한 지 16년이 되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수여한 아르코창작기금을 보너스처럼 받고 보니, 새삼 뒤를 돌아보게 된다. 초기에 섣부른 주제 의식만 앞세워 날것 같았던 글들, 인간 정서에 침잠해 어른을 위한 글인지 동화인지 경계가 불분명한 글, 머리로만 요리조리 굴려 써서 감흥이 없는 글들…. 부끄럽지만 내 자식이고 내가 걸어온 길이다. 그때그때 바로 앞의 길에 한 발 한 발 떼어 놓은 것뿐이다. 그게 앞으로 나아가는 거니까. 앞으로도 그저 한 발자국 또 내딛는 기분으로 써 나아갈 것이다.
약력과 작품 및 수상 연보
1969년 6월 2일 경상북도 금릉군 어모면에서 안중열·구무연의 차녀로 출생.
1976년 초등학교 입학 직전 가족이 있는 서울로 옮김. 3월 서울 문성초등학교 입학.
1978년 서울 독산초등학교로 전학.
1982년 강서여자중학교(현 가산중학교) 입학.
1987년 동일여자고등학교 입학.
1988년 동국대학교 철학과 입학.
1992∼1995년 어린이도서연구회 활동.
1996년 ‘동쪽나라’ 동시 부문에 <주차금지> 외 4편 당선. ‘농민신문사’ 주최 농민문학상에 중편 동화 <바다로 간 게> 당선.
1998년 눈높이아동문학상 동시 부문에 <웅덩이> 외 당선. ≪너 먼저 울지 마≫(사계절출판사) 출간.
2001년 ‘창작과비평사’ 좋은어린이책 창작 부문에 장편동화 ≪씨앗을 지키는 사람들≫ 대상 수상. ≪씨앗을 지키는 사람들≫(창작과비평사), ≪철가방을 든 독갭이≫(채우리), ≪하도록말도록≫(소년한길) 출간.
2002년 ≪이상한 알약≫(<귀신이 사는 집>, 창작과비평사) 공저 출간.
2003년 ≪늦둥이≫(예림당) 출간. 단편 <실로암 나무>(창비어린이 겨울호), 단편 <달에서 온 편지>(어린이문예 7∼8월호) 발표.
2004년 ≪나 안 할래≫(아이세움), ≪블루시아의 가위바위보≫(<마, 마미, 엄마>, 창작과비평사) 공저 출간.
2005년 ≪너만의 냄새≫(사계절) 출간. 광진구 원북원시티 사업에 ≪씨앗을 지키는 사람들≫ 선정.
2006년 순천시 원북원시티 사업에 ≪씨앗을 지키는 사람들≫ 선정. 6월 단편 <꽃씨 풀씨> 발표. 7월 단편 <추억을 팝니다>(소년조선일보) 발표.
2007년 서평 <다름이의 남다른 여행>(창비어린이 가을호) 실음. 4월 단편 <선녀와 나무꾼>(월간 소년) 발표.
2008년 심사 평 <당선소감문을 쓰세요>(어린이와 문학) 실음. ≪내가 지켜줄게≫(아이세움) 출간. <시추야 힘내>(창비어린이 가을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지 게재 우수작품 지원작으로 선정.
2009년 ≪연이와 칠성이≫·≪이야기는 이야기≫·≪코 길어진 욕심쟁이≫(사파리), ≪무적의 용사 쿨맨≫(사계절) 출간. 5∼10월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문학가 도서관 파견 사업 수행(금정도서관). 12월 칼럼 <네모 반듯>(사상도서관 소식지) 실음.
2010년 2월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졸업(학위논문 <일제 말기 ‘소년’지 수록 아동 소설 연구−파시즘체제와 모험서사를 중심으로>). 단편 <타래부인이야기>(월간 소년) 발표. 비평 <지금, 여기−SF와 아동문학>(어린이문학이야기 겨울호) 실음. ≪짜짜네 신비한 가게≫(<짜짜네 신비한 가게>, 북스토리), ≪박순미 미용실≫(<돌계단 위의 꽃잎>, 한겨레아이들) 공저 출간. 5∼ 10월 문화 체육관광부주최 문학가도서관파견사업 수행 (화명도서관). 5월 ≪내일 또 만나≫(우리교육) 출간. 6월 ≪하얀 얼굴≫(창작과비평사) 공저 출간.
2011년 비평 <아동추리소설은 무엇을 찾는가>(창비 어린이), <인생체험센터>(열린아동문학 봄호), 단편 <길 건너 저편까지>(어린이문예 9∼10월호), 3월 심사 평 <죄송합니다만, 당신의 글은 채택되지 않았습니다>(어린이와 문학) 발표. 4월 ≪어린이를 위한 정의란 무엇인가≫(주니어김영사) 출간.
2012년 단편 <앵두나무 아래 옹심이>(창비어린이 봄호) 발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문예창작기금 수혜. 8월 부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수료. 12월 ≪부산 소학생 영희, 경성행 기차를 타다≫(사계절) 출간.
해설 - 송희복
1957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1990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되었고, 1992년에 <해방기 문학비평사 연구>로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문학비평집으로 ≪다채성의 시학≫ 외에 다수 간행한 바 있다. 현재 진주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국제언어문학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안미란 동화선집>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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