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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찬

    송재찬 프로필

  • 국적 대한민국
  • 출생 1950년 6월 3일
  • 학력 서울교육대학교 학사
  • 경력 서울면일초등학교 교사
    서울신묵초등학교 교사
  • 데뷔 197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찬란한 믿음'
  • 수상 2006년 제39회 세종아동문학상
    2005년 제15회 방정환문학상
    2003년 제35회 소천아동문학상

2019.05.08.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송재찬
1950년 음력 6월. 제주도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바닷가 마을이라고 하지만 대개는 밭농사가 생업이었고 고깃배를 지닌 스물 남짓한 사람들과, 물질로 미역이며 소라를 따는 해녀들도 본업은 거의 농업이었다.
부모님과는 일찍 헤어져 외가에서 자랐지만, 어릴 때부터 눈치가 없어서인지 무탈하게 잘 자랐다. 다른 아이들도 먹는 것이라면 먹고 죽는 것만 빼고 다 덤비던 때라 시건 쓰던 다 잘 먹었고 식탐이 강했다. ‘참남밭’이란 넓은 밭을 가진 외할머니 덕에 세 끼를 다 챙겨 먹었지만 빈집일 때는 집 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았다. 찹쌀은 가을 추수 때 잠깐 숨겨 두지만 제사가 많은 외가여서 제사 지낼 쌀을 늘 준비해 보관했기 때문에 나는 그걸 찾기 위해 고팡(광) 구석의 항아리에 얼굴을 대고 손을 디밀어 뒤지곤 했다.
여름엔 종일 바다에서 살았다. 마을 어디에서나 보이는 한라산은 저 멀리 다른 나라처럼 보였다. 그 한라산에 처음 오른 것은 대학교 때였다.
고향을 떠올리면 바다와 한라산 그리고 차례로 나타나는 건물이 있다. 새벽이면 새벽 기도를 알리기 위해 종을 치던 초가집 교회와 신작로, 버스가 서는 차부(버스 정류장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의 외딴집이었던 이발소. 그 이발소는 길가에 서 있었고 출입문이 유리여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런 살림집은 우리 마을에 이발소뿐이었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2층으로 지은 집은 중학교에 있었다. 한 일(一)로 된 건물 가운데 부분이 탑처럼 우뚝 솟았는데 그것은 다락처럼 지은 2층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 올라가 보니 자물쇠로 꽉 채운 책장들과 방송 기기들이 들어차 있었다. 환갑을 지난 지금도 초가집 교회와 이발소 그리고 중학교 건물이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다.
자동차가 신작로에 왔다 해서 그것을 구경하러 바다에서 놀다 말고 차부로 헐레벌떡 뛰어갔지만 차동차가 떠나 버려 허탈하게 돌아서던 기억도 지금껏 지워지지 않는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한글을 못 읽었다는 기억, 글을 읽었다는 기억은 3학년부터 시작된다. 글을 읽는 것에 취미가 붙었지만 교과서 말고는 읽을 책이 없어 국어와 도덕책을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좋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면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봄이면 올챙이, 메뚜기 같은 걸 잡기 위해 친구들이랑 들판을 쏘다녔는데 어릴 때부터 나는 바다보다 들이 좋았다. 예쁜 꽃이나 나무 같은 걸 보면 캐다가 집에 심곤 했는데 나를 키운 외할머니는 들에 것을 집에 들이면 동티가 난다며 심는 족족 뽑아 버렸다. 그 할머니 눈길을 피해 우영팥(집 안에 있는 텃밭) 구석에 심은 숙대낭(향나무)은 용케도 잘 자라 나보다 키가 더 크게 자란 것을 몇 년 전에 보았다.
꽃을 좋아하는 것은 학형이 외삼촌을 닮았다고 했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을 외할머니는 꼭 대동아전쟁이라 했다) 때 피란길에도 꽃씨를 챙겼던 학형이 외삼촌이다.
1962년, 중학생이 되어 교복과 처음 신어 보는 운동화를 샀다. 유니온 영어 교과서의 주인공인 윌리와 샐리가 어른처럼 옷 입은 걸 보며 미국 아이들은 이렇게 어른처럼 옷을 입는구나 했는데 요즘은 우리나라 중고생도 그렇게 입는다.
중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H 선생님이 담임을 맡았다. 영어 선생님이었고 공정하고 원칙주의자였던 H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고사리를 꺾어 오게 해서 학급 문고를 마련해 주셨는데 동화작가 임정진은 그 이야기를 듣고 이런 글을 썼다.

어렵던 시절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까지 교과서 말고는 읽을 책이 없었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고사리를 꺾어 오라는 숙제를 냈다.
제주도엔 봄철에 많은 고사리가 돋아난다.
선생님이 시키시는 대로 까까머리 중학생들은
고사리를 꺾어 삶아 말려서 냈다.

며칠 후 학교에 가니 책꽂이가 생겼고
또 며칠 후 그 책장에 책이 가득 찼다.
“고사리 팔아서 산 책이다.”

가뭄에 단비처럼 그 책은 아이들의 마음속으로
머릿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중의 한 학생이 커서 유명한 동화작가가 되었다.
동화작가 송재찬 님의 추억이다.

그 시절에 고사리 판 돈이 얼마나 된다고
책이며 책꽂이를 다 장만할 수 있었을까.
새삼 선생님의 뜻이 고맙기만 하다.

나는 미처 몰랐다. 정말 우리들이 꺾어 온 고사리로만 그 많은 책을 사 온 줄 알았다.
선생님은 책을 읽고 독후감 정리 노트도 마련하게 하고 또박또박 검사까지 했다. 한 쪽을 2등분해서 두 권의 책을 정리하도록 했는데 독후감이 뭔지 제대로 몰랐던 나는 줄거리만을 간추려 노트를 채웠다.
나의 책 읽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때 읽은 책들은 주로 학원사에서 나온 학원문고였다. 세계 명작과 위인전도 있고 ≪얄개전≫, ≪억만이의 미소≫ 같은 국내 작품도 있었는데 지금은 초등학교 아이들이 그 수준의 책을 읽는다.
1965년,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와 외삼촌들이 계시는 일본으로 밀항해 떠났고 중학교를 졸업한 나도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막내 외삼촌과 일본으로 밀항하기 위해 부산으로 떠났다. 그러나 1년 동안 여관 밥값만 물어 주고 밀항하지 못한 채 다시 제주도로 돌아갔다.
빠른 취업을 위해 상고에 입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은 공부를 하느라 2년 동안 마음고생을 했다. 그리고 고3 때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인문학교로 전학했다.
1969년에 제주교육대학에 입학했다. 군사 훈련과 아르바이트로 정신이 없었지만 문학동인 ‘연지’를 결성하여 시 습작을 했고 소설을 열심히 읽었다. 2년제 교육대학은 금세 끝났고 9월에 남제주 대정초등학교에 발령이 났다. 도서관연구학교여서 여느 도서실에는 쉽게 볼 수 없는 한국창작동화 같은 게 꽂혀 있었다. 처음으로 한국 창작동화를 읽기 시작했고 교육잡지 ≪새교실≫과 ≪교육잡지≫ 독자 문예란에 시를 투고하기 시작했다. 투고 작품은 최종심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독자 문예에 뽑힌 작품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는 사이, 동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신춘문예, 소년중앙 문학상 등 아동문학작품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유년기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외로움을 크게 느끼면서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큰 뜻을 품었던 것은 아니고 섬을 떠나 육지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1974년 봉화군 춘양초등학교로 임지를 옮겼고, 혹독한 육지 추위에 시달렸다. 봉화, 영주, 안동 등을 다니며 동화책을 사기 시작했고 이원수 선생님 추천으로 ≪새교실≫ 동화 3회 추천을 끝냈다. 당시는 동화에 전념하기 위해 속옷만 갈아입고 겉옷은 일주일씩 입어 빨래할 시간을 줄여 나가던 시기였고 동화작가 배익천에게 날마다 편지를 쓰던 시기였다. 이웃 학교에 계시는 이오덕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기 시작해 권정생 선생님을 소개받고 안동군 일직면 송리로 권정생 선생님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다. 1975년 동화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벽지로 자원, 동면초등학교로 옮겼다. <강아지똥>을 당선시켰던 ≪기독교 교육≫에 <종을 치는 마음>이 당선되고 창주문학상에 <화가와 비둘기>가 당선됐다. 그리고 1976년 마침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찬란한 믿음>이 당선되었다. 이오덕 선생님과 함께 중앙선 열차를 타고 시상식에 참가했다. 동면에서 어느 여름방학 날, 예고도 없이 배익천이 찾아와 그를 따라 영양으로 갔고 그의 집에서 며칠을 보내며 가정의 따뜻함과 어머니의 자애로움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1997년, 대구 가까이 간다고 간 것이 금릉군 장전초등학교였다. 장전에서는 폐가를 사서 교회를 세우고 결혼을 했다. 이때는 잘 안 잡히는 FM 음악을 듣기 위해 긴 전선을 늘이고 클래식 음악에 심취하던 시절이다. 휴대용 전축과 세계음악대전집을 월부로 구입하고 비발디와 차이콥스키를 아침저녁으로 들으며 동화를 썼다. 광주에서 내던 ≪아동문예≫에 첫 장편을 연재했고 첫 작품집 ≪민들레섬의 나비≫가 나왔으며 중편 <안개와 들꽃>으로 한국동화문학상을 받게 되어 아내와 함께 광주로 내려갔는데 집에서 외워 갔던 수상 소감을 제대로 못해 쩔쩔매던 기억이 난다. 원고지에 작성한 그 긴 수상 소감을 다 외워서 해야만 하는 줄 알던 시절이었다.
<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로 제7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은 것도 장전에 살 때였다. 장전리 전체에 전화라곤 달랑 하나. 이장님 댁에 설치된 새마을 전화뿐이었다. 스피커로 누구 씨 전화 받으세요, 하면 달려가 전화를 받았고 전화 걸 일이 있으면 이장 댁으로 걸어가 전화를 했고 전화국 교환이 일러 주는 전화 요금을 이장님 손에 쥐여 주곤 했다.
모내기를 준비하던 때였으니까 1984년 5월 말쯤이었다. ≪소년동아일보≫에서 전화가 왔다고 해서 뛰어갔더니 ≪소년동아≫ 성인환 기자였다.
“성인 일간지에선 1970년대 젊은 작가들이 신문 연재를 성공적으로 하고 있어요. 우리 소년지도 젊은 작가에게 연재를 맡겨 볼까 하는데, 쓸 자신 있어요? 자신 있으면 하루 틈내서 다녀가세요.”
자신? 없다고 할 수 없어 무조건 자신 있다고 대답하고 연가를 내어 서울로 달려갔다. 그렇게 시작한 게 <돌마당에 뜨는 해>다. 동아일보 출판국에서 아동물을 시작한다고 해서 ≪소년동아≫는 이 작품을 추천했고 작품집으로 묶여 나왔다.
1981년 9월, 노원호 시인의 덕으로 서울사립학교인 서울여대 부설 화랑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기고 서울 사람으로 살기 시작했다. 대형 서점을 구경하는 동안 제주도에 관련된 책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 오히려 제주에 대해 더 알게 되었고 작품 속에 제주도 설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장편 ≪큰불 장군과 작은불 왕자≫, ≪제주도 할머니를 찾습니다≫, ≪하얀 야생마≫ 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2012년 8월, 정년 퇴임. 41년간 몸담았던 학교를 그만두고 한낮에도, 창밖 흔들리는 모과나무를 보며 음악을 듣고 있다. 읽고 싶었던 책들도 읽고 생각해 두었던 작품을 구상하고 있는데 제주도 신화와 설화를 바탕에 깐 장편을 오랫동안 생각해 왔지만 아직은 스토리도 만들지 못한 채 쓰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 연재만 하고 손질을 하지 못했던 작품을 정리하는 일도 계획하고 있지만 워낙 게을러서 계획대로 잘될지 모르겠다.

작품 및 수상 연보

197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찬란한 믿음> 당선.
1977년 ≪아동문예≫ 8월호부터 <유채꽃 피는 고향> 연재 시작.
1979년 동화집 ≪민들레섬의 나비≫(목양사) 출간. <안개와 들꽃>으로 한국동화문학상 수상. 동화집 ≪안개와 들꽃≫(교학사) 출간.
1980년 동화 <새는 돌아오지 않았다>로 제7회 한국아동문학상 수상. 4월, ≪소년동아일보≫에 <돌마당에 뜨는 해> 연재 시작.
1981년 ≪아동문예≫ 1월호에 <어둠 속의 빈집> 연재 시작.
1984년 소년소설 ≪돌마당에 뜨는 해≫(동아일보사) 출간.
1985년 동화집 ≪작은 그림책≫(창작과비평사), ≪애국자 다바코≫(웅진출판주식회사) 출간.
1986년 동화집 ≪먼나라 이야기 섬≫(인간사) 출간.
1987년 동화집 ≪손톱만큼 작은 돈≫(대교문화) 출간.
1989년 소년소설 ≪아름다운 약속≫(휘문출판사), 동화집 ≪이상한 여행≫(교육문화사) 출간.
1990년 소년소설 ≪어둠 속의 빈집≫(서강출판사) 출간.
1991년 소년소설 ≪작은 어린이 나라를 아십니까≫(지경사), 유년동화집 ≪민호의 금메달≫(문공사), 유아그림동화 ≪나무 거인과 꽃 난쟁이≫(프뢰벨) 출간.
1992년 동화집 ≪커닝주식회사≫(도서출판동지), 동화집 ≪어느 천사의 작은 이야기≫(학원출판공사), 동화집 ≪유리산 도깨비의 봄나들이≫(늘푸른) 출간. 동화집 ≪유리산 도깨비의 봄나들이≫로 제2회 대교문학상 수상.
1993년 장편동화 ≪혼자서 움직이는 그림자≫(동아출판사), 소년소설 ≪돌마당에 뜨는 해≫(계몽사, 재출간), 동화선집 ≪찬란한 믿음≫(중원사) 출간. ≪소년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열쇠>를 제목을 바꾸어 ≪황금 열쇠의 비밀≫(지경사)로 출간.
1995년 동화선집 ≪장미꽃과 열쇠고리≫(꿈동산), 장편동화 ≪날개를 잃어버린 사람들≫(중앙일보사) 출간.
1996년 장편 ≪날개를 잃어버린 사람들≫로 제16회 이주홍아동문학상 수상.
1997년 장편동화 ≪돌아온 진돗개 백구≫(대교출판) 출간.
2000년 월간 ≪소년≫에 <비둘기 날아가는 푸른 아침>을 연재. 3월 <먼 나라 이야기 섬>을 개작한 장편 동화 ≪큰불 장군과 작은불 왕자≫(문공사) 출간.
2001년 장편동화 ≪숲 속의 이상한 샘≫(한국어린이교육연구원), 장편동화 ≪골목 학교 할머니 선생님≫(중앙출판사), 단편동화집 ≪이 세상이 아름다운 까닭≫(대교출판) 출간. 단편 <늑대와 사냥꾼>을 개작한 중편 ≪무서운 학교 무서운 아이들≫(푸른책들) 출간.
2002년 단편동화집 ≪양복 한 벌의 아버지≫(진선출판사) 출간. 소년소설 ≪어둠 속의 빈집≫을 개작하여 ≪아버지가 숨어 사는 푸른 기와집≫(파랑새어린이) 출간. 장편동화 ≪하얀 야생마≫(세상모든책) 출간. 장편동화 ≪하얀 야생마≫로 제35회 소천문학상 수상.
2003년 월간 ≪소년≫에 자전소년소설 <노래하며 우는 새> 연재.
2004년 장편동화 ≪나는 독수리 솔롱고스≫(두산동아) 출간. ≪날개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개작하여 ≪제주도 할머니를 찾습니다≫(대교출판) 출간.
2006년 소년소설 ≪노래하며 우는 새≫(우리교육), 장편동화 ≪하늘이네 식구는 모두 2학년 7반≫(가문비) 출간. 동화집 ≪작은 그림책≫을 ≪주인 없는 구두 가게≫(창작과비평사)로 재출간. 10월 ≪노래하며 우는 새≫로 제39회 세종아동문학상 수상.
2007년 장편동화 ≪비밀 족보≫(푸른책들), 소년소설 ≪우리 다시 만날 때≫(계수나무) 출간. ≪소년≫에 연재했던 <비둘기 날아가는 푸른 아침>을 ≪난 이제 혼자가 아니야≫(계림닷컴)로 출간.
2009년 동화 ≪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효리원) 출간.
2010년 저학년 장편 ≪작은북이 동동동≫(좋은책어린이), 그림동화 ≪빗방울의 여행≫(와이즈아이) 출간.

해설 - 전명희
1957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경북여자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대구 구남여자중학교 국어과 교사로 근무했다. 1984년 영남대학교 일반대학원 국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 동대학원 국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에 아동문학 평론가로 등단했다. 현재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책객원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최서해 소설 연구>, <한국 근대 소년소설 연구>, <현덕 소설의 일고찰>, <근대소년소설에 나타난 성장담>, <영상예술사조 속의 아동문학>, <해리포터를 통해 본 아동문학의 대중성>, <황선미론>, <동화와 만화의 바람직한 접목>, <청소년 문학의 정체성>, <남북한 문학 속에 투영된 여성미 비교 고찰>, <표현주의 관점에서 본 <날개>>, <현대 청소년 소설의 다양한 미학성> 외 다수가 있다.

<송재찬 동화선집> 저자 소개

송재찬 작품 총 5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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