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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현

    윤기현 프로필

  • 국적 대한민국
  • 출생 1949년 5월 9일
  • 경력 전농 도연맹 부의장
  • 데뷔 1976년 기독교 아동문학상 동화 당선

2015.01.23.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윤기현
나는 정식으로 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또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평범한 농민으로 논 100여 마지기를 사고, 밭 30여 마지기를 갖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직업적인 작가가 되어 이 자리에 서 있다.
어떻게 그랬는지 여러분은 많이 궁금할 것이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해남군 옥천면 팔산리 835번지다. 해남 하면 땅끝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바다가 생각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닷가에서 상당히 먼 곳에서 태어났다. 1개 읍, 13개 면으로 되어 있는 해남은, 전부 바닷가에 접해 있는데 옥천면만 바닷가에 닿지 않은 지역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충북 같은 곳이다.
옥천은 평야로 이루어졌고 큰 산이나 깊은 골도 없는 곳이다. 대신 넓은 들판 가운데 커다란 내가 흘러 큰물이 날 때가 아니면 아이들이 놀기 좋은 곳이다.
나는 집이 가난해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더 이상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최종 학벌이 초등학교 졸업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동안 친척집에서 깔담살이를 했다. 첫 해는 먹여 주고 재워 주는 조건으로 1년에 쌀 한 가마니를 받는 것이었고, 다음 해는 조금 커서 쌀 세 가마니를 받는 조건이었다.
죽을 둥 살 둥 일을 했다. 새벽에 일어나 소죽을 데워서 소에게 퍼 주고, 마당을 쓸고, 물지게로 물을 길어 오면 먼동이 텄다. 여름에는 들에 나가 소꼴을 베어 와서야 아침을 먹었고, 해가 짧은 겨울에는 볏짚으로 새끼를 한 타래 꼬고 나서 아침을 먹었다.
정말 지독한 노동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잠이 쏟아졌으나 9시 전에는 자리에 눕지도 못했다.
그래도 즐겁게 받아들였다. 가난을 한번 벗어나 보자는 결심이었다.
이렇게 정성 들여 일을 해서였는지 친척은 2년 후에 논 다섯 마지기를 소작으로 주고, 집에서 일을 하면서 바쁠 때만 와서 도와 달라고 했다. 파종기와 수확기에 집중적으로 일을 해 주었는데 깔담살이 할 때보다 받는 것이 많았다.
정말 가난에서 벗어날 것 같아서 열심히 일을 했다.
이렇게 5년간 일을 하고 나니 신체검사를 하라는 통지가 나왔다. 대한민국 남자들이면 누구나 가야 하는 군대에 가기 위해서였다.
신체검사 통지서를 받아 들자 만감이 교차했다. 한번 자세히 따져보게 되었다.
5년 동안 죽자 살자 일을 했는데 나아진 것이 없었다. 내가 만약 군대를 가면 식구들이 굶어 죽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부지런하고 착하면 하나님이 축복해 줘서 잘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껏 믿어 왔던 믿음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 마을 청년회와 교회 반사 모임에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제야 철들었냐”고 놀렸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가난해서 자포자기에 빠져 있었다. 거기에 운명론도 한몫했다(잘사는 사람은 뒷산 귀신이 돌봐 주니까 그런 것이지 그냥 잘사는 것이 아니라고). 그래 무덤 자리를 잘 쓰려고 야단이었고, 끼니거리가 궁핍해도 제사는 분에 넘치도록 지냈다.
나는 이런 운명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직은 젊고,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나이에 운명론으로 자포자기한다면 내 인생이 너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걸 찾아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우리는 왜 가난한가? 그리고 해결 방법은 없는가?’ 이런 주제였다. 교회에서 했는데 마을 청년들도 참석했다. 토론의 요지는 ‘사람은 정말 착하고 부지런하면 잘사는가?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해 주시는가?’였다.
열띤 토론회가 되었다. 교회 목사님과 장로님은 착하고 부지런해야 하나님이 축복해서 잘살 수 있으며 그 예로 욥기에 나오는 욥을 들었다.
나는 1년 동안 아파서 쉬는 동안 욥기를 열 번도 더 보았는데, 욥이 착하고 부지런했다는 구절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반대 논쟁을 했다. 청년들과 반사들은 아무래도 목사와 장로님들 편을 들었다.
나는 이렇게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문제를 풀면 언제나 목사님한테 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그 문제를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런 고민을 의논해 보려고 여러 사람을 만나 봤지만 전부 실망스러운 대답만 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만은 내 편에 서서 이야기를 했다.
“땅 많이 가지고 있고,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이 잘살지, 쥐뿔도 없는 사람들이 무엇 가지고 잘사냐?”
그러나 아버지의 이야기도 상식적이고 추상적이었다. 뭔가 확실한 실증을 얻고 싶었다. 그래 고민 고민하고 있는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조사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곧바로 마을 청년들과 교회 반사들에게 마을을 한번 조사해 보자고 했다.
“마을에서 누가 가장 착하고 부지런한가? 그리고 그 사람이 복 받아서 잘살고 있는가?”
조사를 청년들만 하면 편향될 수 있으니, 아주머니, 노인, 남자 장년 그리고 우리 청년, 이렇게 여러 계층의 의견을 모으기로 했다.
일주일간 조사를 했다. 100호가 넘는 큰 마을이라 청년들 40여 명이 해도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조사를 끝내고 토요일 오후에 모였는데 조사를 했던 우리들은 깜짝 놀랐다.
100여 호 가운데 정말 착하고 부지런하고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못살았다. 100여 집을 가장 가난한 순서대로 나열했을 때, 착하고 부지런하다고 인정받는 집들 중 둘만이 끝에서 서른 번째 안에 들었다.
착하고 부지런하면 복 받아서 잘산다는 말은 거짓말로 판명이 나 버렸다(나중에 여기서 조사한 것을 바탕으로 농민 자서전을 썼다. ≪일과 놀이≫라는 잡지에 연재했다).
“그런데 왜 교회 목사님이나 학교 선생님, 사회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 어른들은 착하고 부지런하면 복 받아서 잘산다고 가르칠까?”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래도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거꾸로 동네에서 가장 잘사는 부자들 열 집을 뽑아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조사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열 사람 중에 두 사람만 빼 놓고는 도덕적으로 마을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동네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은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일제강점기에 마름을 하면서 잇속을 챙겼던 사람, 소작 짓는 사람들에게 규정보다 더 많은 소작료를 받아서 원성을 샀던 사람, 고리채 놀이를 해 살림을 불린 사람이 둘, 세무서에 다니며 못된 짓을 해서 돈을 모은 집, 경찰을 해서 돈을 모은 사람, 전쟁이 끝나고 미군들이 준 배급을 빼돌려서 부자가 된 사람, 자기 딸을 부잣집에 팔아 그 대가로 논을 받아 거기서 나온 곡식으로 고리채를 놓아 부자가 된 사람 등이었다.
대체로 권력에 붙어 사람들에게 돈을 뜯어내거나, 고리채를 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논과 밭, 집과 세간을 빼앗은 사람이었고, 조금 점잖은 두 사람은 조상으로부터 많은 토지를 물려받아 소작을 놓아 대대로 부자로 대물림한 경우였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첩을 두서너 명씩 두는 것이 보통이었고, 심지어 같은 동네의 소작 집에서 빚을 못 갚는다고 쉰이 넘은 노인이 열여섯 살짜리 여자아이를 데려가서 욕을 먹은 경우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동네 사람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폭력을 일삼고, 가을마다 빚을 안 갚는다고 갖은 욕설과 모욕을 주기 일쑤였다. 또 일하러 오는 사람들을 사람 취급도 않고 무지막지하게 일을 시키는 집도 있었다.
“이렇게 대비되는 두 집단을 놓고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가?”
“착하고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들이 복 받고 잘사는 사회를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그 원인은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해결책은?”
우리는 이런 문제를 놓고 한겨울을 토론하고 공부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문제를 우리만 고민한 것이 아니라 40∼50년 전 일제 치하에서 소작쟁의 했던 사람들이 먼저 고민하고 싸워서 성과도 많이 얻어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6·25가 끝나고 역사가 거꾸로 갔던 것이다.
교회에 모인 반사들이나 청년들은 집이 가난해서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가지 못한 사람들의 자식들이었고, 지금은 집안을 책임지고 있는 당사자들이었다. 한겨울 동안 공부하고 토론한 끝에, 지금 같은 조건으로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죽도록 일해도 잘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때, 우리 마을 조건은 남자 어른들이 하루 일하면 쌀 1되, 아주머니들이 하루 일한 품삯이 쌀 반 되였다. 나도 초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일을 했는데 하루 종일 지게질을 하고도 쌀 반 되를 받았다. 보통 하루 14시간을 일하는데도 이것밖에 안 되니.
또 소작을 지었는데, 주인집에서 짚을 가져가면 50 대 50, 소작 짓는 사람이 짚을 가져가면, 소작인 40 대 지주 60으로 나누었다. 거기다 세금은 소작인이 부담했다. 이런 결정을 1년에 한 번씩 지주들이 모여서(마을 유지협의회) 했다.
일은 가난한 사람들이 다 하는데 품삯은 일을 부리는 사람이 정하고, 그나마 너무나 적었다. 나는 부당함을 이야기했다. 옛날 소작쟁의 사례들을 모아 같이 나누어 보며 목사님을 설득하고, 청년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작목반을 조직했다. 작목반은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하되, 교회에 다니지 않는 청년들도 동참하도록 했다.
교회 장로님이 세 분 있었는데 다들 반대했지만 목사님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나는 그해에 총각 집사가 되고 겸직으로 주일학교 부장도 맡게 되었다. 뭔가 일을 하려면 조직이 필요할 것 같은데 교회는 좋은 배경이 될 것 같았다.
작목반이 구성되자 우리는 품삯과 소작료를 정하는 유지협의회에다 우리들의 요구를 제시했다.
“소작료를 지주 40 대 농민 60으로 하고 부산물(짚)을 농민들에게 주고, 세금은 지주들이 부담하라. 그리고 후작으로 보리를 갈겠다고 할 때는 그 논에 모내기를 해 주는 조건으로 논을 대여하라.”
“하루 품삯을 남자 장정은 쌀 두 되, 아주머니는 쌀 한 되, 16세 이상의 남자아이는 쌀 한 되 반을 줘야 한다(100퍼센트 인상).”
“농사짓는 경비로 빌리는 색거래(양곡 빚)는 연 50퍼센트를 넘게 받아서는 안 된다.”
“이런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우리는 농사를 짓지 않겠으며, 협의회 쪽 초상이 나거나 큰일이 나도 돌아보지 않겠다.”
(이미 일제강점기에서도 이루어진 상황이다.)
이렇게 되자 동네가 발칵 뒤집어졌다. 유지들은 조직원들을 회유하러 다니고, 교회에서는 장로님들이 그러려면 교회에 다니지 말라며 야단을 치고, 나보고 마귀에 사로잡혔다고 했다.
그래도 잘 버텼다. 6월 농번기가 오자 정말로 모내기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6월 27일로 끝나 버렸다. 그날 갑자기 순사들이 동네에 밀려와 나를 비롯해서 보이는 대로 청년들을 연행해 갔다. 동네 사람들은 겁에 질렸고, 면장은 다른 쪽의 인력을 강제로 동원해 모내기를 했다.
우리는 끌려가서 무지막지하게 맞았다. 뒤에서 누가 조종을 했냐며 대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미리 말을 맞추어 놓았기에 내가 주동자라고 했다. 경찰에서는 믿지 않았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사람이 어떻게 일제강점기의 소작쟁의를 알고, 또 작목반을 만들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고문을 하고 조사해도 나라고 하자, 나를 빼놓고 다른 사람들은 석방했다. 나는 누구에게 사주를 받았는지 배후를 밝히라고 고문을 많이 당했다. 소작쟁의는 책에서 보았고, 또 농사를 지으면서 있었던 일과 마을을 조사해 봤을 때의 일 등을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조직하는 것은 목사님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자생적인 사회주의자라고 했다.
결국 주동자가 나라는 것을 알고 목사님이 도와주었다고 하니 조사한 사람들은 맥이 빠졌다. 어떻게든 사상범으로 몰아 보려고 했는데, 우리 집안이 해남 윤가에, 내가 교회 현역 집사에, 주일학교 부장을 맡고 있는 데다 목사가 도와주었다고 하니, 건드렸다가는 시끄러울 것 같았는지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하고 내보내 주었다.
7월이 되자 신체검사 받은 청년들이 전부 영장이 나와 버렸다. 내 동생은 초등학교 3학년밖에 안 다녔는데도 현역으로 영장이 나와 군대를 가게 되었고(나중에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폐에 너무 상처가 커서 보류되었다(아니면 군대 보내 놓으면 거기서도 말썽을 부릴까 봐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목사님도 쫓겨났다. 장로님들이 쫓아냈다. 청년들을 선동하고, 교회 다니지 않는 청년들과 어울리며, 교회를 타락시켰다는 명목이었다. 그런데 장로님들이 교회 평신도들에게 강한 지지를 받고 있던 나는 집사직이나 부장직에서 자르지 못했다.
그 후 동네 사람들은 겁을 먹고 나하고는 만나지도 않으려고 했다.
내 가슴속에서는 현실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다짐과, 달걀로 바위 치기라는 절망감이 투쟁을 하는데, 이웃들이 하는 행동을 보니 화가 불끈불끈 치솟았다. 끝까지 투쟁하자는 오기가 생겼다.
“왜? 지주들과 소작인들이 의견 대립으로 다투는데 공권력이 동원되어야 하는가?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 왜 우리는 무기력하게 졌는가?”
참 외롭고 힘든 기간이었다. 방황하기도 하고, 회의가 찾아오기도 했다. 혼자 미친 사람처럼 저녁에 산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런데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장로들이 늙은 목사님을 쫓아내고 젊은 전도사를 모셔 왔다. 그는 한국신학대학을 막 졸업하고 민중 신학을 선교하기 위해 농촌 교회를 찾던 중 우리 교회로 오게 되었다. 젊은 전도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사태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나를 불러 지혜 없는 짓을 했다며 충고를 했다. “힘없는 행동은 때로는 악이 될 수도 있다”면서 청년들을 조직하고 의식화시켜야 한다며 나보다 훨씬 강하게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그리고 나를 의식화시키기 위해 읽을 만한 책들을 빌려 주었다. 서남동 박사, 안병무 박사, 문익환 목사님이 쓴 책들이었다.
나는 다시 힘을 얻었다. 그러나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지주들이 소작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임자가 없는 하천을 개간했다. 우리 밭은 냇가 옆에 있었는데 큰물이 질 때마다 냇물이 깎아 먹고, 깎아 먹고 했다. 그러다 보니 하천이 활처럼 휘어 흘렀다. 나는 그 하천을 반듯하게 내고, 냇물이 흐르는 곳을 막아 논을 만들었는데 다섯 마지기나 되었다. 또 겨울에는 진도로 김을 하러 가서 돈을 벌어 오고, 제주도에 가서 밀감나무 구덩이를 파거나 건축 현장에서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와 집도 짓고, 밭도 사고, 소도 샀다. 살림이 조금 나아지자 아버지도 그전처럼 술도 드시지 않고 노름도 하지 않았다. 자식이 고생해서 벌어 놓은 돈을 까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보면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전도사하고 똥창이 맞아 기독교청년회 해남군연합회 임원을 맡기도 했고, 4-h 운동도 하고, 새로운 영농을 배워 실천하는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또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도 맡고 청년회보도 냈다. 이때가 1969년부터 1972년이었다.
이때, 내 꿈은 선진적인 농민이 되고, 부지런히 일해서 논 100마지기를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상록수≫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그렇게 사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이 따로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내가 글을 쓰게 된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나는 주일학교 부장을 여러 해 하고 있었다. 1972년 여름방학 때 하기학교를 했다(교회에서 여름방학마다 하는 계절학교다). 당시에는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은 아이들을 유치부, 초등학교 1∼4학년을 유년부, 5∼6학년을 초등부로 나누어서 가르쳤다. 따로 중학생들을 위한 중등부가 있는데 우리 마을에는 중학생이 많지 않아 중학생들도 초등부에 넣어서 같이 공부하게 했다.
하루는 초등부 애들이 데모를 했다. 수업을 거부하고 산으로 도망을 가 버렸다. 담임을 여선생이 맡았는데, 나이도 조금 있고, 독학으로 공부해서 실력이 있었다. 이 여선생은 집에서 교회에 다니지 말라고 극성스럽게 탄압을 해도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선생이 파랗게 질려서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줄줄 흘리면서 울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쫓아가 물었다.
“너희들이 수업을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사람이 어떻게 중학생이 있는 초등부 담임을 할 수 있어요. 그런 선생한테서는 공부를 할 수 없으니 선생을 바꿔 주세요.”
중학교 1학년짜리 집사님 아들이 눈을 부라리며 이렇게 대드는 것이었다. 이유는 학벌이 낮은 사람이 어떻게 학벌 좋은 사람을 가르치느냐는 것 하나였다.
나도 충격이 컸다. 나도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아 설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전도사님에게 말했고, 전도사님이 갖은 말로 설명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그 애 혼자 목사님이 맡기로 하고 협상을 보았다(지금 그 친구는 한국신학대학을 나와 대전 큰 교회에서 목사를 하고 있다).
그 후 여선생은 교회를 나오지 않다가 서울로 올라가 버렸다. 이 사건 후로 학벌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다.
“도대체 학벌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 친구가 중학생이라고는 하지만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가 다섯 달 공부를 했는데, 실력이 되면 얼마나 되겠는가? 여자 선생은 동네 야학을 다니면서 강의록으로 중·고등학교 공부를 다 마쳤는데 그것은 왜 알아주지 않는가? 학벌로 사람을 판단하게 하는 것을 누가 가르쳤는가?”
이런 의구심과 함께 나 자신도 학벌 문제에서 새삼스럽게 열등의식이 생기고 부끄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그래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늦게라도 학교를 가야 할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해에 또 충격을 받는 일이 생겼다. 나는 교회 반주를 맡고 있어 시간이 있으면 오르간 연습을 해야 했다. 저녁 시간을 이용해 연습을 하는데, 그날도 연습을 하러 교회에 갔다. 때가 여름이라, 밤이 짧기 때문에 일찍부터 연습하려고 저녁을 막 먹고 가서 오르간 앞에 앉았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르간을 연주하지 못하고 아주머니가 기도를 마치고 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10시가 지나고 11시가 지나도 가지를 않는 것이었다. 다음 일요 예배 때 부를 성가대의 노래가 조금 복잡해서 연습은 해야 하겠는데…. 기다리다 못해 옆으로 가서 가만히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슬퍼하시오? 집에 무슨 일이 있소?”
그러자 아주머니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자기는 딸 둘을 믿고 사는데, 딸들이 자기를 부끄러워하며 어머니를 어머니로 안 보니 살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아주머니는 남편이 6·25 전쟁터에 나가 전사를 했는데, 재혼도 않고 혼자 딸 둘을 키우며 살았다. 이렇게 여자 혼자 딸 둘을 키우며 살려니 억척을 부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 억척스럽다고 동네에 소문이 나고, 몸을 전혀 돌보지 않아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마음이 착해 동네 가난한 사람 중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죽도 쒀서 갖다 주고, 약초를 캐 달여서 갖다 주기도 해서 동네에서 인심을 얻고 사는 사람이었다. 딸 둘은 남자들도 보내기 어려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보냈다. 그런데 이틀 전 딸에게 찾아갔다가 봉변을 크게 당하고 그것이 슬퍼서 운다고 했다.
그 당시는 농사를 지으려면 일일이 손으로 다 했다. 제초제가 없던 때라 손으로 논과 밭을 매고, 쟁기로 갈며 땔나무도 해야 했다. 이런 세상에 여자 혼자 농사지으랴, 소 거두랴, 땔감 장만하랴, 눈 코 뜰 새 없이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딸들을 읍내로 유학(방을 얻어서 자취를 시켰음) 보냈어도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벼르고 별러서 두벌매기가 끝나자 짬을 내서 딸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냥 가는 것이 너무 낭비인 것 같아, 읍내 장날, 옥수수 조금, 참외 몇 개, 캐 놓은 감자 조금, 봄에 꺾어서 말려 놓은 고사리 조금, 녹두와 참깨 몇 되, 이렇게 장에 가서 팔 수 있는 것을 한 짐 이고 30리 길을 걸어서 갔다. 그리고 장에서 팔 것은 팔고 살 것은 사서 머리에 이고 학교로 딸을 찾아갔다.
그때는 여자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언덕 위에다 새로 지어서 밑에서 누가 오면 다 내려다보였다. 어머니가 오는 것을 고등학교에 다니는 큰 딸이 먼저 보았던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몸뻬를 입고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찾아오자 창피해서 살며시 몸을 숨겨 버렸다. 어머니는 그것도 모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찾아갔다.
어머니가 이렇게 학교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해 안에 집에 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길이 나빠 막차가 오후 4시면 끊어졌고, 집에는 소와 돼지, 닭 등 가축이 있어 꼭 돌아와야 했다. 여자 몸으로 밤중에 걸어올 수가 없으니 학교에 가서 딸들을 만나고, 얼굴도 보고, 전해 줄 것을 주고 오기 위해서였다.
어머니가 학교에 가서 딸을 찾으니 자리에 없었다. 담임선생이 아이들을 풀어 찾아보라고 했다. 변소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아이들이 질질 끌다시피 데려왔다. 그 앞에 어머니가 반찬거리와 팔다 남은 옥수수니 감자니 참외를 주니, 그 애는 그걸 받아 땅바닥에다 패대기를 치며 ‘뭐하게 찾아와 나를 창피 주냐’며 악을 바락바락 쓰며 길길이 뛰었다.
어머니는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의 사랑 표현이 딸을 창피하게 하고, 화나게 했다는 것에 경악했다. 어머니는 죄인처럼 고개만 숙이고 있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 와서 생각하니 너무나 화가 나고 슬퍼서 잠도 오지 않고, 밥도 먹고 싶지 않고, 내가 뭐 때문에 사나 하는 생각에 억울하고 슬퍼서 이렇게 운다고 했다(후에 문제작인 단편 <어머니 죄인>이란 작품을 쓸 때 많이 참조했다).
이야기를 듣고 나도 충격을 받았다. 그 집 딸의 행동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만약 나라면? 내가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우리 어머니나 아버지가 볕에 시커멓게 타고, 옷은 후줄근하고, 행동은 어눌하게 하면서 나를 찾는다면?’
나도 아주머니 딸처럼 행동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나나 아주머니 딸에게 이런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주머니는 남에게 해 한 번 끼치지 않고 살았고, 부지런히 일해 자식들을 가르치고, 여유가 있으면 남을 도운 자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사기를 치거나 도둑질을 하고, 남을 속여 자기의 잇속을 챙기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을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하다니?’
또 반사들, 청년들과 토론을 벌였다. 반사들과 청년들도 의식적으로는 내가 하는 말이 맞는데, 막상 닥치면 누구나 다 부모를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이 어디에서 오는가?’ 찾아보기로 했다.
나는 주일학교에서 두 아이들 담임을 한 적이 있어서 그때 기억을 더듬었다. 중학생이라고 초등학교 나온 사람에게 수업을 못 받겠다고 데모를 주동했던 학생과 아주머니의 딸은 다 모범생이었다. 조금 내성적이고 책을 좋아해서 책을 많이 읽던 기억이 났다. 아이들이 읽은 책을 한번 조사해 보기로 했다. 마침 우리 교회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있어, 그분의 도움을 얻어 학교에 비치되어 있는 책을 리어카로 실어 와서 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책을 봐 가면서 깜짝 놀랐다.
아이들이 가장 재미있게 보는 동화와 동요가 농촌 아이들과 동떨어진 작품들이고, 그 작품들의 특징은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왕자, 공주, 귀족, 장군, 교수, 의사 등)을 아름답게, 노동하는 사람들은 바보나 조금 모자라고 성격이 이상한 사람들로 그렸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열등의식에 젖어 있는 작품들이었다(이오덕 선생의 ≪시 정신과 유희 정신≫이란 평론집에 들어 있는 <열등의식의 극복>이라는 글을 보면 자세히 나온다). 그렇지 않은 작품들은 이슬, 꽃, 봄바람, 하늘 등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순수문학이었다. 이런 작품을 읽으니, 아이들은 작품 속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자기 아버지가 힘없는 백성이고, 그중에서도 가난한 농민이라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이오덕 선생은 이런 글을 써서 발표했다.

우리 민족이 공통으로 갖는 열등의식이 어떤 것인가 살펴보자.
서울에 가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취직해 있는 젊은이라도 좋다)이 시골 고향에서 꾀죄죄한 모습으로 찾아온 어머니를 가리켜 저건 우리 집 식모라고 제 친구에게 말했다는 얘기는 단순한 우화도 아니고 옛날얘기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요 현실이다. 가난하고 약한 자신을 부끄러워하여 덮어 감추기에 정신을 잃고 있는 이 정신 상태는 봉건시대 이후 우리 민족의 삶의 방식이 되어 오늘날 우리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이 되고 있다. 끊임없는 외국 세력의 위협과 봉건 왕조의 학정과 그 뒤를 이은 군국주의자들의 총칼 앞에서 과연 서민들이 살아갈 윤리가 이것밖에 없는 것일까. 열등의식으로 살아온 민족―근세 이후의 정치와 교육, 도덕, 종교, 학문, 예술 등 모든 우리의 문화는 이 치욕적인 열등의식에서 벗어나려는 민족적·민주적인 자각과, 한편 열등의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서 불합리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열등의식을 더욱 심각한 상태가 되도록 조장하는 노예적 근성과―이 두 가지 가치관의 대립과 상극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아동문학이 열등의식을 벗지 못하고 조장한다고 질책하고 있다.
이 글에서 봤듯이 그때 어린이 책은 정말 엉망이었다. 외국에서 번역된 작품이 주를 이루고(그것도 정식으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짜깁기하는 등) 소비가 미덕이라는 자본주의 상업적인 이념을 교묘하게 포장한 것들이 많았고, 국내 작가들은 순수문학이라고 동심천사주의를 표방하면서 자연이나 노래하고 있으니 그걸 읽은 아이들이 열등의식 속으로 더 빠져 들어간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 당장 바꾸기로 했다.
“그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이걸 거꾸로 만들어 보자. 일하는 농민들을 착하고 아름답게 그리자.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 되는 것으로 그리자.”
교회에서는 동화 시간이 있어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는데 아이들이 이 시간을 좋아한다.
이 시간에 성서에 나온 이야기도 해 주지만 아이들이 싫어해 옛날얘기나 동화를 읽고 들려준다. 내가 맡아 자기 아버지의 이야기, 어머니의 이야기, 할머니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들려주었다. 아이들의 반응이 빠르게 왔다.
“선생님, 재밌는데 그걸 어느 책에서 읽었어요? 저희들도 보게 가르쳐 줘요.”
이렇게 묻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것 다 너희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고 너희들 이야기야. 선생님이 지어서 들려준 거야.”
나는 이렇게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농민운동을 도와주기 위해 방문했던 지식인들은 그걸 작품으로 써 보라고 권했다.
이렇게 6개월 정도 자신들과 닮은 사람들이 주인공이 된 이야기를 들려주자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어른들에게 인사도 하고, 가난한 것을 그렇게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당당하게 집안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지내던 차에 1975년 월간 ≪기독교 교육≫에서 창작 동화 현상 응모가 있어서 호기심에 응모를 해 봤다. 나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는 선생님들의 가르치는 수준도 낮았고, 또 건설한다고 책보자기로 모래를 퍼 나르고, 들것으로 흙과 자갈을 나를 때였다. 거기다 집에 일이 있으면 결석하기 일쑤였다. 그러니 원고지 쓰는 법도 몰랐다. 대학 공책을 찢어 거기에다 써서 보냈다.
그런데 12월 하순에 전보가 한 장 왔는데 “당선을 축하합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응모는 했어도 당선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믿기지가 않았다.
나중에 시상식에 가서 들었더니, 오소운 선생님과 이봉구 선생님이 심사를 했는데, 작품이 괜찮아 당선시키되 이봉구 선생님이 내 응모작을 원고지에 다시 옮겨 쓰고, ≪원고지 쓰는 법≫이라는 책을 한 권 사서 선물로 주시며 다음부터는 원고지에 쓰라고 말씀해 주었다.
그때 상금이 10만 원이었는데 쌀 열 가마니 값이 넘었다. 오소운 선생님과 이봉구 선생님은 상금을 타고 회식 자리에 있으면 돈을 내게 된다며 회식 자리에 끼지도 말고 어서 내려가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동화를 쓰는 작가가 되었다.

그 후 농민 문제는 내 작품의 주제가 되고 소재가 되었다. 농민들의 교육 현장에서 그들의 문제를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주었다. 그러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해결 방법까지 내놓았다.
처음에는 내 작품이 사람을 선동하는 선동문이지 작품이냐고 따지고 토를 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의 처지가 바뀔 수만 있다면 어떤 평가를 받아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당연히 정부의 탄압도 받았다. 내 작품은 잡지에 실을 수도 없었고 혹시 싣게 되면 발행인과 편집자가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책을 내 준 출판사도 많은 탄압을 받았다.
그런데 처음 책 ≪서울로 간 허수아비≫가 탄압 속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팔려 나가자 출판사에서는 위험하지만 모험을 해 볼 만한 일이 되었다. 이후 이런 운동권적 시각에서 쓰인 작품들이 출판 운동과 함께 봇물처럼 터져 나왔고, 결국 단행본 시장을 장악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원론적인 물음은 의미가 없어진다. 현실적인 삶 앞에 어떤 당위성도 힘을 잃는 것이다. 지식, 문학, 철학, 사회학 등 인문학이 힘을 잃는 것은 사람들 삶과의 연계성이 끊어질 때 생겨나는 현상들이다. 나는 문학의 부활, 인문학의 부활은 사람과의 연계성을 추구할 때만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특히 문학은 현상보다 현상 안에 감추어진 것들을 형상화하는 작업일진대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때만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은 감동받았을 때 자기 자신의 삶을 바꾸고 나아가 역사를 바꾸는 주체가 될 것이다.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작품―내가 추구하는 문학의 지향점이다.

해설 - 황수대
문학박사이자 아동청소년문학 평론가다. 1965년 대전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이문구 동시 연구>로 석사 학위를, <1930년대 동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에서 문예비평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대학 졸업 후 잠시 직장 생활을 했으나 책과 아이들을 좋아해 1996년 대전에 어린이도서관을 설립해 2005년까지 대략 10년 동안 운영했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그저 좋을 것 같아 시작한 도서관 일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즐기다 보니 어느덧 아동청소년문학에 푹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내친김에 도서관을 시민단체에 기증하고 본격적으로 아동청소년문학을 공부하고 글을 쓰기 시작해, 2007년 <이문구 동시의 생태학적 의미>로 제5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평론가상’을 받았다. 현재는 고려대학교와 청주대학교, 한경대학교에서 아동문학과 글쓰기 강의를 하면서 틈틈이 아동청소년문학에 관한 연구와 더불어 비평문을 쓰고 있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동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푸른책들, 2011)과 ≪글쓰기와 말하기≫(공저, 역락, 2012)가 있다.

<윤기현 동화선집>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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