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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차다예프 Pyotr Chaadayev

    표트르 차다예프 프로필

2026.01.22.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표트르 야코블레비치 차다예프(Пётр Яковлевич Чаадаев, 1794∼1856)는 1794년 모스크바에서 부유하고 유서 깊은 러시아의 명문 귀족 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드미트리 셰르바토프 공작 집에서 귀족식 교육을 받았다. 1807년부터 형 미하일과 함께 모스크바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1808년 6월에 모스크바대학 학생으로 정식 등록하여 1811년 중반까지 학업을 이어 갔다. 대학에서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야쿠시킨, 《지혜의 슬픔》의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그리보예도프,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투르게네프,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무라비요프ᐨ빌렌스키 등과 교유했다. 대학 강의와 친교는 차다예프의 사상을 형성하고 행동 방식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시기 차다예프는 독일 사상, 특히 칸트에서부터 피히테, 셸링,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 철학의 주요 내용을 직간접으로 인용하고 반박하고 수긍하면서 《철학 서한》의 뼈대를 만든다.
1812년 5월, 형 미하일과 같이 후견인이자 외삼촌인 드미트리 셰르바토프가 근무했던 세묘노프 근위보병연대에 소위보로 입대한다. 1813년 중위로 진급한 뒤 세묘노프 연대를 떠나 아흐티르 기병연대로 자리를 옮긴다. 1812년 6월 12일 조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로디노 전투, 타루티노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여하고, 쿨름 전투와 파리 점령에도 참전한다. 그 공로로 성 안나 4급 훈장, 프로이센 공훈 훈장, 쿨름 십자장을 받는다.
조국전쟁이 끝난 후 1816년 차르스코예 셀로에 주둔하고 있던 레프 근위기병연대에 전속된다. 이곳에서 카람진의 저택에 드나들면서 여러 문인과 접촉하게 되는데 푸시킨과의 만남도 이때였다. 푸시킨은 차다예프에게 상당한 감명을 받아 〈차다예프에게〉라는 시를 남긴다. 1817년 23세의 차다예프는 근위대 사령관의 부관으로 임명되고, 1819년에는 기병대장으로 진급한다. 그러던 1820년 10월 근무하던 기병연대에서 반란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1820년 12월 사직서를 제출하고, 1821년 2월 불명예제대를 한다.
이후로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서 멋쟁이, 푸시킨의 용어 사용법에 따르면, 댄디로 주목받는다. 조국전쟁에서의 빛나는 전훈 그리고 유럽을 직접 목도한 인물, 거기다 예술적 옷차림과 학식, 당시 사교계 사람들은 차다예프를 두려움 섞인 존경으로 바라보았다.
1822년 형 미하일과 유산을 나누고, 1823년 건강 회복을 위해 외국 여행길에 오른다.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를 거쳐 독일에도 머무나 건강이 악화돼 1826년 다시 러시아로 돌아온다. 여행 중 1825년 카를스바트에서 셸링과 만난다. 셸링과의 만남은 《철학 서한》을 비롯한 차다예프의 철학적 인식 구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1820년대 중반 서유럽으로의 여행을 기점으로 차다예프의 사고는 계몽주의적 성격에서 종교철학적 세계관으로 전환된다. 1826년 러시아로 돌아오던 길에 차다예프는 데카브리스트들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국경선 근처에서 체포된다. 니콜라이 1세의 명령으로 차다예프는 엄중한 심문을 받았다. 그는 어떤 비밀 결사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썼으며, 북부결사에 참여했다는 의혹을 완강히 거부했다. 데카브리스트들의 실패는 차다예프가 기존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셸링과 프리메이슨 사상이 그 빈자리를 메꾼다. 차다예프 철학은 이제 종교적 사유와 철학적 사유가 융합된 형태로 자리 잡는다.
1826년 7월에 국경선 근처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40일 만에 풀려난 차다예프는 9월 초 모스크바에 도착하고 그해 10월 4일 드미트로프현으로 이주한다. 이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모스크바의 노바야 바스만나야 거리에 있는 레뱌세프 가문의 저택과 드미트로프 영지 사이를 오가며 생활한다.
시골 영지와 모스크바를 오가며 생활하면서 1829년에서 1831년 사이 《철학 서한》을 집필한다. 1836년 《철학 서한》의 〈제1서한〉이 문예지에 등장하자마자 엄청난 사회적 파장이 몰아쳤다. 니콜라이 1세의 진단에 따라 당국은 차다예프를 ‘정신이상자’로 공식적으로 규정했고, 차다예프는 모스크바 경찰 당국에 출석하여 그 결과를 공식적으로 통보받는다. 그 후 매일 의사가 찾아와 정신 상태를 검진했고, 산책은 하루에 한 번만 허용되는 등 사실상 가택 연금에 놓인다. 이 조치는 1837년에 일부 완화되었으나 더는 글을 쓰지 말 것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철학 서한》의 나머지 일곱 편의 서한은 그의 생전에는 출간되지 못했다. 니콜라이 1세는 그를 정신병자로 낙인을 찍었고, 당국은 재빠르게 그를 정신이상자로 세상에 공표했다. 마치 낙인이론의 설득력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차다예프도 비아냥거리듯이 스스로를 미치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듬해에 쓴 《미치광이의 변명(Апология сумасшедшего)》(1837)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차다예프는 계속 모스크바에 머물렀고, 말쑥한 옷차림으로 사교계에 출입했고, 여러 모임에 참석했다. 호먀코프, 게르첸, 키레옙스키, 악사코프 등과 친교를 나누었다. 그러나 여전히 당국의 감시를 받았고, 주변 사람들은 그를 불편해했다.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상가는, 게르첸의 표현에 따르면, 항상 슬픈 비웃음을 달고 살았다. 크림 전쟁(1853∼1856) 이후에는 자살을 결심했다고도 전해진다. 1856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도네스코이 수도원 내 공동묘역에 안장되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안동진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전북 고창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문학을 참 좋아했다. 세계문학 전집과 위인전, 그리고 《삼국지》를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국문과를 가고자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를 선택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 정책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 설정에 한몫을 단단히 하길 원했던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노어과를 선택했지만 문학의 길을 고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논문은 〈투르게네프의 주관의 미학〉이다.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한 축을 담당했던 투르게네프를 연구 주제로 삼았다.
이후 한국외국어대학교, 청주대학교, 호서대학교 등에서 러시아 문화와 문학을 가르쳤다. 청주대 한국문화연구소,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 한국외대 디지털인문한국학연구소 등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지금은 국민대학교 유라시아연구소 비상임연구원으로 있다. 옮긴 책으로는 《러시아문서보관소 자료집 1, 2》(공역), 《북아시아 설화집 2》, 《체호프 아동소설선》 등이 있다.

<철학 서한>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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