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李承熙, 1847∼1916)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퇴계학을 계승한 근대기 성리학자다. 성주 출생으로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계도(啓道), 호는 강재(剛齋)·대계(大溪)다. 1909년 북만주 한흥동에서 개척 사업에 진력할 때, 대하(大夏)로 개명하고 한계(韓溪)로 개호했다.
부친이자 스승인 한주 이진상의 학설을 이어받고 이를 발전·계승하고자 전념하던 그의 삶은, 일제의 조선 침략을 계기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환된다. 그는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곽종석 등의 문인과 함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각국 공사관에 전달했다. 또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수백의 유생을 대표하는 소수(疏首)가 되어 ‘을사오적의 목을 베고 조약의 파기하라’는 내용의 상소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罷勒約疏)〉를 직접 들고 상경했다. 그러나 일경의 방해로 결국 성사하지 못했고 오히려 대구 경찰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그의 투쟁은 옥중에서도 계속되었다. 다음 해 4월 석방되었지만 끊임없는 일경의 감시가 이어지자 그는 국외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이사이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성주 지역의 회장이 되어 활동했으며,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서한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 만행을 규탄했다.
1908년,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하자 62세의 노유 이승희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게 된다. 이곳에서 이상설·안중근·유인석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기지 및 한인 공동체 건설을 구상했다. 이윽고 1909년, 중·러 국경 지대에 위치한 밀산현 봉밀산을 기지로 낙점해 100여 가구를 정착시키고, 그곳을 한국을 다시 일으킨다는 의미의 ‘한흥동(韓興洞)’이라 명명했다. 운영 방식 및 자금에 대한 문제, 또 지리적 위치 등을 이유로 부득이 그곳을 나오게 된 그는 1913년 이미 안동에 정착하고 있던 동전 맹보순·대눌 노상익 형제·수파 안효제와 같은 선비 동지들과 결합해 동삼성 한인 공교회를 창설하고, 중국 공교회와의 합작을 통해 시국의 난관을 돌파하려 했다. 그렇게 북경으로 떠나 지회 승인에 성공했지만 기대에 못 미치는 현실을 확인한 그는 1914년 결국 봉천(현 선양)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그는 덕흥보라는 곳에 터(약 56만여 평으로 여의도의 3분의 2 면적)를 잡고 독자적인 또 본격적인 유교 공동체 겸 독립운동 기지 구축 사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해빙으로 인해 농장이 수몰되면서 계획은 시작과 동시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생계의 모든 것을 팔고 이곳에 모인 유림과 농민들은 이 일을 계기로 급격히 흩어지기 시작했고 한인 공교회도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 그리고 1년 뒤인 1916년 2월, 그는 70여 년의 생을 이역의 일승잔(日昇棧)이란 한 여관에서 마감하게 된다. 이렇게 약 9년간 이어진 그의 해외 독립운동도 종료되었다. 1977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그의 두 아들 이기원(李基元, 1885∼1982)과 이기인(李基仁, 1895∼1981) 역시 독립 유공자로 지정되었다.
한길로
전남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대학 시절 철학을 전공했고 대학원 진학 후, 한문학을 전공해 〈1910∼20년대 재중(在中) 지식인의 한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일 강제 병합 100년 한일 청년 학생 포럼 한국위원회 실무 책임·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국사편찬위원회 해외 구술 자료 사업 〈두 개의 ‘이름’을 통해 보는 ‘재일조선인’의 역사〉 연구 책임자·중국인민대학 방문학자·동국대학교 강사·국제한인문학회 편집위원 등을 지냈다. 역서로는 《요좌기행》·《청구야담》(공역)이 있고 ‘한말 의병 문학·근대기 재만(在滿) 유림의 한시 및 중국 기행문·일제 말 친일 한시’와 관련한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중국 지린성 성도(省都) 창춘(長春)에 위치한 지린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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