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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힐티 Carl Hilty

    카를 힐티 프로필

  • 국적 스위스
  • 출생-사망 1833년 2월 28일 - 1909년 10월 12일
  • 학력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교 법률학 학사
  • 경력 1899년 헤이그 국제재판소 초대 스위스위원
    1890년 벨렌베르그 대의원
    1873년 베른대학 평교수
    1857년 스위스 윤군 재판장

2015.01.14.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카를 힐티
‘나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과 정신적 교제를 했으며 현재 생존하는 사람보다도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인물들을 더 깊이 이해했다. 내가 가장 깊이 이해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요한, 단테, 토마스 아 켐피스, 타울러, 크롬웰, 또 최근에는 칼라일, 블룸하르트, 부스부인, 똘스또이이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제1부에서)
스위스의 성자 힐티는 스위스의 법률가이자 사상가로 장크트갈렌 주의 작은 도시 베르덴베르크에서 출생했다. 독일 괴팅겐 대학·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률학을 공부하고 런던·파리 등에 유학하였다. 1855년 고향에서 변호사로 개업하고 18년간 이 일에 종사했다. 1874년 베른대학의 헌법과 국제법 교수를 거쳐 총장을 지냈고, 1890년 국회의원이 되어 여성 참정권운동을 전개, 1909년 헤이그 국제중재재판소 위원을 지냈다.
힐티는 마지막까지 말과 행동이 일치한 것으로 유명하다. 노년까지 활발한 활동력을 유지했고 매우 부지런했다. 대학 강의도 아침 시간을 택해 겨울에는 아침 8시, 여름에는 7시에 시작했다. 대학에서 그의 75세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좋은 시간을 묻자 ‘아침 7시가 가장 좋다’고 대답한 일화도 있다.
만년의 힐티는 딸들과 제네바 호수 별장에서 지냈다. 어느 날 아침, 산책에서 돌아온 힐티는 딸에게 ‘조금 피곤하니 따뜻한 우유를 가져다 주렴’하고 말했다. 딸이 우유를 가지고 돌아와 보니 힐티는 잠든 듯 죽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그날 아침에 작성한 〈평화론〉이라는 원고가 남겨져 있었다. 이날이 1909년 10월 12일로 힐티는 향년 77세다.
힐티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종교적·윤리적 저작에 의해서였는데, 그 가운데 잘 알려진 것이 이 책에 실린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1901∼1919)》와 《행복론(1891∼1899)》이다. 1909년 힐티는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제2부 초고를 끝맺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는데, 부족했던 부분은 딸 멘타 힐티가 아버지의 저서 가운데서 보충하여 책을 완성했다.
그의 사상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이상주의적 사회개량주의로, 생명 없는 신학이나 교의를 싫어하여 복음의 숙독과 그 실천에 중점을 두고 직접 생활에서 실천하였다. 이것은 고전적 교양의 휴머니즘과 스토아적 금욕정신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역자 - 곽복록
일본 조치대학 독어독문학과 수학.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어독문학과 졸업. 미국 시카고대학교 대학원 독어독문학과 졸업(석사).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 독문과 졸업(독문학박사). 서울대학교․서강대학교 독문과 교수 역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사무국장 및 전무이사 역임. 한국 독어독문학회 회장. 한국 괴테학회 초대회장. 현재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저서 《독일문학의 사상과 배경》, 옮긴책 괴테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폰타네 《사랑의 미로》, 토마스 만 《마의 산》, 헤르칸 카자크 《강물 뒤의 도시》, 하인리히 뵐 《아담, 너는 어디 가 있었나》, 프리덴탈 《괴테 생애와 시대》, 슈테판 츠바이크 《어제의 세계》,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있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행복론>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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