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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하운

    한하운 프로필

  • 국적 대한민국
  • 출생-사망 1920년 3월 20일 - 1975년 2월 28일
  • 학력 북경대학교 농학원 축목학계(畜牧學系) 학사
    이림농림학교 축산학 학사
  • 경력 1960년 무화문화사 설립자
    한미제역회사 회장
    청운보육원 원장
    1954년 대한한센총연맹 위원장
    1944년 함경남도청 축산과 근무
  • 데뷔 1949년 시 한하운 시초

2015.01.23.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한하운(韓何雲)
한하운은 1919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태영(泰永)으로, 하운(何雲)이란 호는 스스로 지었으며, 구름처럼 흩어져 떠돌며 사는 문둥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으로서는 입학하기 힘든 전라북도의 이리(裡里)농림학교 축산학과에 합격했다. 이때 일본어로 된 ≪시론(詩論)≫과 ≪시학(詩學)≫, ≪시작강좌(詩作講座)≫를 읽으면서 시를 습작했다. 그러면서 바이런, 하이네, 릴케, 타고르, 워즈워스, 베를렌 등의 시를 읽으면서 시 공부를 했다. 축산학과를 다니면서 문학을 공부하고 시를 습작하던 한하운은 1936년 경성제국대학 부속 병원에서 나병 확진을 받는다. 이후 그는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 유학 도중 나병이 악화되어 귀국하고, 금강산에서 요양을 한다. 그는 나병을 앓으면서 애인과의 실연, 삶에 대한 환멸 때문에 만주를 거쳐 북경으로 간다. 그는 북경대학교 농학원 축목학계(畜牧學系)에 입학해 졸업을 한 후 함경남도청 축산과에 근무하다가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간다. 이때부터 본명인 ‘태영’을 버리고, ‘하운’을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삼은 채 문학에 정진한다. 일제 말 노골화한 군국주의 현실에서 심해진 나병이 목숨을 위협했으나 문학은 그를 구원해 준 마지막 힘이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뒤 북쪽에서는 소련 군정이 실시되었고, 그는 아우와 함께 헌책방을 운영하면서 시와 소설 습작에 몰두했다. 소련 군정으로 인한 경제 혼란과 이념의 억압 속에서 함경도 학생들 중심으로 1946년 3월 13일 함흥학생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사건 혐의자로 감옥에 갇혔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월남했고, 다시 북으로 넘어갈 때 체포 ‧ 투옥되었지만 이감 수송 중 원산에서 탈출해 월남했다. 그는 ‘나시인(癩詩人) 한하운 시초(詩抄)’라 하여, <전라도 길>, <별>, <목숨> 등 시 13편을 ≪신천지(新天地)≫ 1949년 4월호에 발표한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정음사에서 첫 시집 <한하운시초>를 간행했다.
1950년 강원도와 황해도를 배회하다가 경기도 부평에 나환자 수용촌 성계원을 건설하고 자치회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나환자를 위한 사회적 봉사와 나병 퇴치 노력, 즉 나해방(癩解放)을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1954년 대한한센총연맹을 결성해 위원장으로 활동한 것 역시 그 일환이다. 그런데 1953년 10월 15일 자 ≪서울신문≫에 발표된 <보리피리>가 이른바 문화 빨치산으로 회자되면서 언론과 국회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물론 이 사건은 진실이 밝혀지면서 해프닝으로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 이후 그의 두 번째 시집 ≪보리피리≫가 1955년에 인간사에서 간행된다. 그리고 그동안 연재되던 <나의 슬픈 반생기>가 1958년에 ≪고고한 생명-나의 슬픈 반생기≫란 제목으로 인간사에서 출간되었다.
그는 나병이 음성으로 판명되면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는데, 1960년에 한미제약회사를 창립하는가 하면, 같은 해 7월에 서울 명동에 무하문화사(無何文化史)란 출판사를 설립했고, 자작시 해설집 ≪황토길≫을 간행했다. 1964년 7월에는 나병 해방을 위한 원대한 취지에서 월간 ≪새 빛≫을 창간했고, ≪정본 한하운 시집≫을 무하문화사에서 간행했다. 1960년대는 한하운이 가장 왕성한 사회활동을 보인 시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71년 한국카톨릭사회복지협의회를 결성해 회장에 취임한다. 1973년에 한하운 시비가 소록도에 세워졌고, 1975년 2월 28일 간경화증으로 인천 자택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서거 35주기를 맞이한 2010년에 ≪한하운전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되었다.

편자 - 고명철
1970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비평사와 소설을 연구하고 있다. 1998년 ≪월간문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반 연간지 ≪비평과 전망≫ 및 계간 ≪실천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반 연간 ≪바리마≫, ≪리얼리스트≫ 및 계간 ≪리토피아≫ 편집위원으로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뼈꽃이 피다≫, ≪순간, 시마에 들리다≫, ≪논쟁, 비평의 응전≫, ≪칼날 위에 서다≫, ≪비평의 잉걸불≫, ≪‘쓰다’의 정치학≫ 등이 있다. 젊은평론가상, 고석규비평문학상, 성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하운 시선>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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