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임학수
임학수(林學洙)는 1911년 7월 3일 전남 순천군 순천읍 금곡리 214번지에서 부친 임화일(林和日)과 모친 이가절(李佳節)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임학수의 본명은 학수이나 영택(榮澤: 족보명), 악이(岳伊: 개명 전 이름), 내홍(乃洪: 보통학교 학적부 이명) 등 네 개의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문인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9) 선생은 그의 15대조이며, 할아버지 임계옥(林桂玉)은 부농으로 상당히 많은 소작 농토를 두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임화일은 신식 문명에 깨어 있었으며, 해방 전부터 순천 읍내에서 금방을 운영하여 임학수의 집안 살림은 넉넉한 편이었다.
1936년 1월 임학수는 경성제대 동기 동창인 이정호의 누이동생 이호순(李浩順)과 연애결혼을 했으며, 1939년 경성부 청량리정 25의 7번지로 이사를 하면서 호적도 옮기고 그 후 몇 번 더 이사를 하면서 처 이호순과 채윤, 채강, 채문, 채령 네 딸과 함께 단란한 가족을 이루며 살기도 했다. 하지만 6·25 전쟁이 일어나 장녀 채윤과 셋째 채문이 먼저 부산 동생네로 떠나고, 뒤이어 합류하기로 했던 임학수와 처 이호순, 그리고 두 딸은 납북되어 서로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다. 또한 임학수는 북에서 다섯째 딸 채성과 장남 채호를 슬하에 둔다.
순천공립보통학교를 나와 경성제일고보를 거친 그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그가 경성제대 영문학부를 다니며 주로 관심을 기울인 시인들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인 바이런이나 셸리, 키츠 등이며, 이는 당시 영문학과 학과장이었던 사토 기요시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요시의 전공은 영국 낭만파 시였으며, 강의나 연구도 바이런, 키츠, 셸리 등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임학수의 졸업 논문 역시 이러한 영향 아래에서 셸리의 시 <해방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Unbound)>였다.
임학수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 경성제대 조교, 호수돈여고, 경신여고, 한성상고, 배화여고, 성신여학교 등에서 교원으로 재직했으며, 해방 후 고려문화사 주간과 ≪민성≫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는 서울사범대 교수, 1947년에는 숙명여대 강사, 1949년에는 이화여대 강사로 일했으며, 같은 해 고려대 교수에 취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교수직에서 해임된다.
1931년 동아일보로 등단한 임학수는 이후 1951년 납북되기까지 20여 년 동안 활발한 창작 활동을 했으며, 시집 ≪석류≫, ≪팔도풍물시집≫, ≪후조≫, ≪전선시집≫, ≪필부의 노래≫ 등을 펴냈다. 뿐만 아니라 번역 시집으로 ≪현대 영시선≫, ≪19세기 초기 영시집≫, ≪초생달≫, ≪챠일드 하롤드의 편력기≫ 등을 남겼고, 편저로는 ≪현대조선시인선집≫, ≪시집, 조선문학전집10≫ 등이 있다. 번역물로도 ≪일리아드≫(상, 하), ≪이도애화≫, ≪세계단편선집≫(1, 2), ≪슬픈 기병≫ 등 10여 권이 넘는다. 그 외 소설, 희곡, 시 등의 번역 작품이 남아 있다.
그는 문단 활동도 활발히 했는데 ≪시문학≫ 동인으로 김영랑, 박용철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1933년 12월에 창간된 순수문학 동인지인 ≪문학≫에 참여하여 순수문학을 주도했다. 또한 1934년 노자영, 신석정, 김영랑, 유치환 등이 중심이 된 ≪신인문학≫의 동인으로 참여했고, 1939년에는 최재서가 주재한 ≪인문평론≫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982년 72세의 나이로 작고한 것으로 알려진 임학수는 김일성대학 어문학부 교수·학장 및 평양 외국어대학 영어과 강좌장을 지냈으며, 말년까지 교편을 잡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또한 외국 문학을 번역 소개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벌여 왔다고 북한에서 간행된 ≪문화예술사전≫(1989∼1993)에 기록되어 있다.
편자 - 윤효진
윤효진은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종군위안부 여성에 대한 재조명 - 노라옥자 켈러의 ≪종군위안부≫론>, <손창섭 소설의 인물 연구>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임학수 시선> 저자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