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자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또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다. 일찍이 태자소부(太子少傅)의 벼슬을 지내 ‘백부(白傅)’라고 칭하기도 하며 시호가 ‘문(文)’이라서 ‘백문공(白文公)’이라 부르기도 한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자, 문학가다.
정주(鄭州) 신정(新鄭)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전란으로 인해 5, 6년간 유랑하는데, 이때 사회의 모순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16년(800)에 진사과에 급제했고, 18년(802)에는 발췌과고시에 갑등으로 합격해 비서성교서랑을 제수받아 원진(元稹)과 함께 관직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후에 시단에서는 이 둘을 ‘원백(元白)’으로 칭하게 된다.
헌종(憲宗) 원화(元和) 원년(806)에는 교서랑을 그만두고 <책림(策林)> 75편을 지어 주질현위가 되었다. 원화 2년(807)에는 조정으로 돌아와 한림학사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좌습유를 제수받았다. 원화 4년(809)에는 원진·이신(李紳) 등과 함께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주도했다. 원화 5년(810)에는 경조부호조참군을 지냈다. 원화 6년부터 8년(811∼813)까지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관직을 그만두고 하규(下邽)에 머무르게 된다. 원화 9년(814)에 장안으로 돌아와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가 되었는데, 이듬해에 번진(藩鎭)의 반란이 일어나고 자객이 재상 무원형(武元衡)을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백거이는 앞장서서 재상을 살해한 자객을 체포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대신들은 그가 간관의 직무를 뛰어넘는 월권을 했다고 비판한다. 이때에 또 어떤 이가 이 기회를 틈타 그의 어머니가 꽃구경을 하다 우물에 빠져 세상을 떠났는데 <꽃을 구경하다(賞花)>·<새 우물(新井)>과 같은 시를 지어 예교를 어겼다고 모함해 강주(江州)자사(刺史)로 좌천당했다. 중서사인 왕애(王涯)가 상소를 올려 백거이가 군(郡)을 다스리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자, 이에 그는 다시 강주사마로 좌천되었다. 이 좌천은 백거이에게 큰 타격을 주어 벼슬을 하고 있으나 본마음은 은거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천하를 구제해야겠다는 젊은 날의 포부를 버리고 홀로 한 몸을 잘 보존해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원화 13년(818) 충주자사가 되었다가, 원화 15년(820)에 헌종이 갑자기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조정으로 돌아와 중서사인이 된다. 조정에서 당쟁이 일어나자 백거이는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자 외직을 맡겠다고 자청해 장경(長慶) 2년(822)부터 항주·소주자사 등을 지내며 백성의 마음을 얻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문종(文宗) 대화(大和) 원년(827)에 비서감·형부시랑을 제수받았지만, 그는 낙양(洛陽)에서 벼슬하며 머물 것을 자청한다. 대화 3년(829) 이후부터 백거이는 낙양에 거주하며 태자빈객·하남윤·태자소부 등의 관직을 지냈다. 낙양에서 백거이는 시·술·선(禪)·금(琴)·산수를 즐기면서 유우석(劉禹錫)과 창화(唱和)해 ‘유백(劉白)’이라 칭해지기도 했다. 무종(武宗) 회창(會昌) 2년(842)에 형부상서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회창 4년(844)에는 자비를 들여 용문(龍門)에 팔절석탄(八節石灘)을 정비해 물길을 편하게 해 주기도 했다. 회창 6년(846)에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낙양 용문 향산(香山)의 비파봉(琵琶峯)에 묻혔으며, 이상은(李商隱)이 묘지명을 썼다.
<백거이 시선> 저자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