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어우양위첸 (歐陽予倩, 1889∼1962)
화극 배우, 화극 연출가, 극작가, 연극 잡지 편집인, 영화배우,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중국 전통극 배우, 중국 전통극 작가, 그리고 대학교수와 학장. 이 다양한 일을 해낸 사람이 있다. 바로 어우양위첸이다. 그의 이력은 요약하기도 벅차다. 그는 춘류사(春柳社)가 공연했던 중국 화극의 역사적인 첫 작품 <흑인 노예의 절규(黑奴籲天錄)>(1907년)에 배우로 출연함으로써 중국 화극과 탄생을 함께했다. 그리고 춘류사에서 알게 된 친구 루징뤄(陸鏡若) 등과 함께 일본 신파극을 학습했고, 귀국 후에는 신극동지회(新劇同志會), 춘류극장(春柳劇場)을 옛 친구들과 함께하며 문명희(文名戱) 시대 중국 화극을 선도했다. 루징뤄가 병사하고 춘류극장이 해산(1915년)되자 놀랍게도 그는 경극에 뛰어들어 극작가, 배우, 연출가로 활약하며 세계적인 경극 배우 메이란팡과 함께 “북쪽의 메이란팡, 남쪽의 어우양위첸”으로 병칭될 만큼 명성을 누렸다. 오사운동과 함께 다시 화극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자 그는 화극계로 돌아와 희극협사(戱劇協社)에 가입(1922년), <말괄량이(潑婦)>, <집에 돌아온 뒤(回家以後)> 등의 극작품을 썼다.
그가 영화계에 입문한 것은 1926년의 일이다. ≪옥결빙청(玉潔氷淸)≫, ≪3년 후(三年以後)≫, ≪천애가녀(天涯歌女)≫ 등 영화 시나리오 세 편을 쓰고, 그중 두 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1929년부터는 광저우(廣州)에서 잡지 ≪연극(戱劇)≫ 출판에 뛰어든다. 동시에 <병풍 뒤(屛風後)>, <인력거꾼의 집(車夫之家)> 등 화극을 창작해 발표했고, <포효하라 중국이여(怒吼吧, 中國)>(1930년)를 연출했다. 이어 1934년에 시나리오 <신판 복숭아꽃이 그려진 부채(新桃花扇)>를 썼고, 이듬해 영화 <청명시절(淸明時節)> 등을 쓰고 연출했다. 1937년 중일전쟁 속에 상하이가 고립되자 그곳에서 연극인 훙선(洪深)과 함께 경극 <어부의 한(漁夫恨)>, <복숭아꽃이 그려진 부채> 등을 공연했다. 다시 이듬해에는 구이린(桂林)으로 가서 계극 개혁 운동을 선도하면서 동시에 <흠차대신(欽差大臣)> 등 화극 작품을 연출했다. 1941년에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역사 화극 <충왕 이수성(忠王李秀成)>을 썼고, 1944년에는 광시에서 중일전쟁 시기 최대 규모의 연극제였던 제1회 서남연극제(西南第一屆戱劇展覽會)를 개최했다.
중일전쟁이 끝난 뒤에는 홍콩, 타이완 등에서 공연하며 <복숭아꽃이 그려진 부채>를 화극으로 각색했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는 중앙연극대학(中央戱劇學院) 학장을 비롯해 중국문련(中國文聯), 중국연극인협회, 중국무용인협회 등에서 주석과 부주석을 지냈다. 그가 창작했거나 각색한 화극이 40여 편, 연출한 화극이 50여 편, 창작 및 각색한 전통 연극이 50여 편, 시나리오를 썼거나 연출한 영화가 13편이다. 그 밖에도 연극 연구자로서 <위첸 연극론(予倩論劇)>, <화극, 신가극과 중국 연극의 예술 전통> 등과 살아 있는 연극사의 증인으로서 <내가 연기를 한 이래로(自我演戱以來)>, <춘류를 추억하며(回憶春柳)> 등 회고록을 남겨 중국 연극(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를 제공했다. 어떤 키워드 하나로 꿰어 낼 수 있다면 더욱 간결하게 이력을 소개할 수 있었겠지만, 화극과 영화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별도의 훈련이 없으면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경극, 계극 등 중국 전통 연극까지 관통해 배우, 연출가, 극작가와 교육자까지 넘나든 그의 이력은 소개하자면 끝이 없어 보일 정도다.
그리고 이 모든 이력 못지않게 놀라운 것은 그가 비록 후난 성 류양(瀏陽) 현이라는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나름 명문가의 아들이었는데 연극인이 되었고, 자유연애의 의미를 알았으면서도 집안에서 짝 지어 준 아내와 평생 함께했다는 사실이다. 한국도 그랬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 중국에서 예술인, 특히 공연예술인은 사회에서 가장 천시하는 직업군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구식 결혼과 자유연애, 구여성과 신여성 문제를 <말괄량이>, <집에 돌아온 뒤> 등을 통해 다루기도 했던 그는 유학 중에 잠시 귀국했을 때, 가문의 뜻에 따라 이미 자신과 결혼한 상태였던 아내 류윈추(劉韻秋)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신여성도, 자유연애로 사랑한 연인도 아닌 ‘집에 돌아온 뒤’ 처음 만난 아내와 평생을 함께했다. 그냥 해로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에게 아내는 당장이라도 연극을 그만두라는 집안 어른들의 압력을 막아서는 든든한 바람막이였고, 무대 의상을 꼼꼼하게 바느질해 주었던 평생 조력자였으며, 유혈 진압이 자행되던 5·30 운동의 현장에서 함께 유인물을 나눠 주던 투쟁 동지였다. 한 사람의 생애가 어쩌면 이토록 극적일 수 있을까.
그런데 그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어우양위첸의 역사(연극사, 예술사)적 위상은 생각만큼 높지 않다. 이는 중국이 작가야말로 연극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진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중국 연극사에서 명작이 나오기 시작한 원대의 잡극 이래 모든 명작의 주인은 극작가였다. 원대 관한경, 왕실보, 명대 탕현조, 청대 공상임, 홍승(洪昇)에 이르기까지 모두 작가의 이름만 남았을 뿐, 배우나 연출가의 이름을 연극사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비록 19세기에 등장한 경극은 배우의 연극이었다고 하나, 현대에 들어서도 그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연극사는 늘 문학사의 일부였고, 문학사에서 연극을 언급할 때 주요 작품의 주인 격은 언제나 작가의 몫이었으며, 작품의 발표 시기는 늘 초연이 아닌 지면 출판을 기준으로 했다. 문학으로서 극본이 아닌 공연예술로서 연극에 관해 언급할 때도 연출가와 배우, 공연은 소외되기 일쑤였다. 최근 들어 점차 극작가와 함께 연출가와 배우를 아우르는 연극(사)적 안목을 가진 연구 성과가 나오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우양위첸이 연극과 영화의 다양한 길에서 남긴 업적은 그를 거인(巨人)이라 부르기에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그를 오직 작가로만 바라보면 그 체구가 갑자기 작아지는 느낌이 든다. 그가 지면으로 남긴 작품들 중 좋은 작품은 많았지만 압도적인 명작이라 평가받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 어우양위첸을 대표하는 작품이라면 바로 이 <복숭아꽃이 그려진 부채>가 첫손가락에 꼽힌다. 순수 창작물도 아닌, 고전을 각색한 작품이 그의 최고 대표작이라니. 그러니 그에 대한 평가와 역사적 위상이 높았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를 작가로만 바라보고 접근하는 것은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아니다.
화극 탄생에서 문화대혁명 직전까지 60여 년 동안 화극과 전통 연극, 영화를 넘나들며 작가, 연출가, 배우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던 그의 생애를 상기하면 어우양위첸을 읽는다는 일은 중국 연극의 근대, 아니 그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중국 극장의 근대를 읽는 일과 같다. 연극사에 따르면 근대 중국의 극장에서 중심은 분명히 화극의 몫이었던 것 같지만, 그것은 화극이 ‘근대적인 연극’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술된 것이지, 정말로 화극만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근대 중국의 극장은 근대적인 연극(화극), 전근대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역동적으로 변모하고 있었던 전통 연극, 그리고 영화라는 전혀 새로운 예술이 공존하던 곳이었다. 그 근대 중국의 극장 어디에서나 만나게 되는 이, 그가 바로 어우양위첸이다.
역자 - 김종진
김종진은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영동대학교 중국어과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중국 근현대 연극을 전공했으며 대표 저서로는 ≪중국 근대 연극 발생사≫(연극과인간)가 있고, 대표 논문으로는 <중국 화극의 중국성(中國性)과 중국적인 화극>, <중국의 화극 민족화와 민족 화극> 등이 있다.
<복숭아꽃이 그려진 부채> 저자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