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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삼

    김상삼 프로필

  • 국적 대한민국
  • 출생 1944년
  • 학력 대구교육대학교 학사
  • 경력 대구교육대학교 대학원 교수
    대구보건대학교 강사
    2006년 초등학교 교사
    영남대학교 아동문학 강사
  • 데뷔 1977년 창주문학상 `철이와 살구나무`
  • 수상 1995년 대통령 표창
    1987년 한국동화문학상
    1979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2015.02.04.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김상삼
나는 1944년 경북 상주 이안면 가장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가집 앞에 살구나무가 있는 집이다. 가난으로 종교의 혜택을 받기 위해 백부님이 성직자로 계시는 전북 정읍으로 이사했다.
내가 다닌 북면초등학교에서 나는 벙어리 아닌 벙어리로 자랐다. 내가 뱉은 경상도 사투리 한 마디는 곧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내가 경상도 보리 문둥이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우리 마을에 나병 환자가 있어 아이들은 정말 나를 문둥이로 알았다. 그래서 함께 놀기는커녕 내가 다가가면 피했다. 내가 입을 연 것은 책을 읽을 때가 전부였다.
당시 문자 해득을 못 한 어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머니는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치셨다. 그래서 겨울밤이면 작은 마을 아낙네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들었다. 어머니는 <한양가>와 고전소설을 읽어 주는 스토리텔러였기 때문이다. 이야기보따리가 얼마나 큰지 날마다 다른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상상력을 키웠고, 리듬과 감정을 넣어 책도 읽었다. 선생님이 이런 나를 ‘모범독’으로 자주 책 읽기를 시켜 주어 다행이었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마을에 같은 반이 없어 누구 하나 내 편이 없었다.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라고 했다. 나는 남달리 달리기를 잘했고, 공을 잘 찼다. 그런데 아이들은 공을 차다가 몸이 서로 부딪치면 문둥병 걸린다고 제외시켰다. 나는 정말 문둥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으로 거울 앞에 섰다. 금방이라도 까만 눈썹이 하르르 날아갈 것만 같아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고맙게도 제자리를 지켜 준 내 눈썹이 고마웠다.
공을 차고 나서 선생님이 글짓기를 하라고 했다. 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대해 썼다. 선생님은 내게 다른 아이들보다 길게 쓴 내 글을 읽어 보라고 했다. 감정을 살려 읽는데 한 아이가 예배당에 있는 책 내용과 똑같다고 말했다. 다른 아이들도 그렇다고 입을 모았다. 얼굴을 붉히며 읽기를 포기한 나에게 선생님은 알밤을 먹이며 남의 글을 베끼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확인하지 않은 선생님이 원망스러웠다. 전라도에서 바라본 경상도 고향이 너무 그리웠다. 나는 다시 경상도로 이사 가자고 아버지께 졸랐다. 여기도 세월이 지나면 고향이 된다며 내 눈물을 닦아 주셨다. 이 사건은 장편동화 ≪외톨이가 된 보리 문둥이≫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 뒤로 나는 또다시 그런 일을 당할까 봐 글짓기만 하라면 엉터리로 몇 줄 적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마을에서는 글을 잘 쓰는 신동으로 통했다. 이 동네 분들이 군에 간 아들에게 편지를 써야 하는 일을 내가 맡았다. 동네 편지를 맡아 놓고 쓰는 나를 보고 장래에 글쟁이가 될 거라 마을 사람들은 예언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외톨이에서 벗어났다. 그래도 숨어 사는 짐승처럼 한번 움츠러든 내 성격은 이미 내성적으로 굳어져 버렸다. 낯선 사람들이 두려웠고 더불어 어울리기 싫었다.
정읍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백부님을 따라 정읍에서 익산으로 이사했다. 주위에서는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성직을 택하라고 권유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호남의 명문인 남성고등학교로 진학시켰다.
1962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는 고등학교보다 학비가 적게 드는 대구교육대학에 입학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마음은 푸근했지만 고향은 이미 고향이 아니었다. 보수 성향이 짙은 대구 친구들이 전라도 말을 하는 나와 거리를 두었다. 나는 고향에 와서도 전라도치가 되어 캠퍼스의 외톨이가 되었다. 성장기에 다섯 번이나 거주지를 옮기다 보니 사회성이나 정서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걸 그때 이미 간파했다.
1964년 상주 함창초등학교에 발령을 받고 찾아간 고향은 너무 초라했다. 하늘을 받치던 높은 숭덕산은 야트막한 뒷동산이었고, 너른 들판을 가로질렀던 큰 강줄기는 개천이었다. 우리 집은 헐리고 살구나무도 베어져 있었다. 그때 잃어버린 고향이 장편 ≪고향 별≫로 태어났다.
군에 갔다가 1967년 고향에 있는 숭덕초등학교로 복직했다. 나는 고향 학교를 빛낸다는 사명감으로 당시에 인기가 높았던 주산 지도에 나섰다. 군에서 3년 동안 수판알을 굴린 경력에, 처제가 주산 국가대표라 의욕적으로 지도했다. 2년 안에 경북 제패란 목표를 세우고 신혼살림을 하는 윗방을 합숙소로 정했다. 주산부 다섯 명과 하루를 25시간으로 늘려 함께 호흡하며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그 결과 목표대로 경북 제패를 했다. 땀 흘린 그 과정을 1971년 ≪새교실≫의 ‘교육애 기록’에 냈더니 우수상을 받은 것이 동화 작가가 된 계기가 되었다. ≪새교실≫에 발표된 내 글을 보고 동화 작가 권태문 님이 동화 입문을 적극 권했다. 늦깎이지만 늦다고 생각될 때가 적기라는 말을 믿고 학교의 동화책을 거의 다 읽으며 습작에 밤을 새웠다. 첫 작품을 들고 설레는 가슴으로 권 선생님께 찾아갔더니 달랑 밑줄 하나 쳐 주는 게 지도의 전부였다.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 물었더니 그걸 찾아내는 게 공부라며 책을 소개해 주셨다. 나는 당장 책방에 가서 ≪창작의 실제≫와 ≪공≫이라는 책 두 권을 샀다. ≪공≫은 표지에만 제목 ‘공(空)’이 쓰여 있고 350쪽 정도 되는 백지 공책이었다. 나는 그 공책에 소설과 동화를 두루 읽으며 시적인 문장과 오감을 통한 묘사를 적어 나갔다. 석 달 만에 깨알 같은 글씨로 공책 두 권을 채우고 나니 좋은 문장에 대한 감이 잡히었다.
1971년은 경북 주산 대회 우승, 교원 실기 대회 우수상, ≪새교실≫ ‘교육애의 기록’ 우수상 등이 ≪중앙일보≫에 발표되면서 나는 학부모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고향 학교라는 이유로 학부모와 맞서다 희생양이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교육부 연구학교가 끝나자 좋은 선생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문제 교사 하나가 온 것이었다. 당시 육성회에서는 그 책임을 교장의 무능으로 몰아붙였다. 고향에 있는 내가 모른 척할 수 없어 나섰다가 주먹질에 휘말렸다. 결국 나는 1972년 자원 형식으로 벽지 학교인 전의 초등학교로 가게 되었는데 그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전교생 60명, 유치원 뜰만 한 운동장에 달랑 교실 일곱 칸이 학교의 모두였다. 나는 먼저 아이들과 함께 줄자로 거리를 재어 이정표를 곳곳에 세웠고, 마을 회관을 지어 주산 합숙소로 활용하며 진학 못 한 청소년을 지도했다. 실과 시간과 수업을 마친 뒤에는 아이들과 함께 버려진 화전에 피마자와 콩을 심어 소득을 올렸다. 이런 실천적 교육이 장편 ≪엄마의 얼굴≫과 장편 ≪아버지의 별나라≫의 배경이 되었다. 산골의 생활 모습과 자연은 그대로 작품의 배경이 되었고, 산짐승 하나하나 그리고 전설 어린 바위와 명소들이 작품으로 태어났다.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눈을 감은 누렁이>는 산골의 일상을 작품화한 것이고,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꽃배>도 실화의 소재를 작품화한 것이다.
벽지에 와서도 권 선생님께 자주 찾아갔으나 늘 줄 하나 받아 오는 것이 전부였다. 아내는 ‘1박 2일 동안 배운 것이 달랑 줄 하나냐’라며 비아냥거렸지만 그때 들은 문학 이야기는 내 평생의 자산이다. 벽지 생활에서 보이는 것은 동화의 소재였고 느끼는 것은 자연과 교감이었고, 들리는 것은 시적 리듬으로 문장 공부의 대상이었다. 벽지의 아이들을 전국 주산 대회에서 우승시키고 화전을 경작하며 야학을 시키는 등 벽지 개발에 앞장선 내 선행이 기사화되면서, 나는 1976년 대구 경북에서 제일 큰 상인 금오대상(교육 부문)을 받게 되었다.
넓으면 깊지 못하다더니, 이런 많은 일 때문인지 해마다 신춘문예에 이름은 올리면서도 최종심에서는 떨어지고 말았다. 나는 문학가로 거듭나기 위해 1976년 대구로 나오면서 주산 지도에 쏟던 정열을 창작 활동에 전력투구했다. 그래서인지 1977년에 <철이와 살구나무>로 창주문학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나왔다. 고향 집은 헐리고 살구나무는 베어졌지만 가슴속에 남아 있던 살구나무가 나를 아동문학가로 등단시켜 준 것이다. 나도 모르게 생겨난 자신감으로 동화의 늪에 몸을 던졌더니 1979년 <눈을 감은 누렁이>로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산골 이야기에 가장 알맞은 문장을 찾아 하루에 한 줄이라도 고치고 다듬어 오면서 흘린 땀의 결실이었다. 내 작품을 본 권 선생님이 ‘황소처럼 뚜벅뚜벅 걷더니 결국 황소로 당선되었다’라며 나를 ‘우보(牛步)’라 불러 주었다.
그 뒤로도 중앙지 신춘문예에 도전했지만 해마다 여러 신문의 최종심에 이름만 오를 뿐이었다. 나는 심각해진 신춘문예라는 병의 처방으로 1983년에 첫 동화집 ≪흔들리는 뿌리≫를 냈다. 처방약이 맞지 않았던지 가을바람이 일자 또다시 병이 재발해 잠을 설치며 네 편의 작품을 썼다. 그중 한 편은 최종심에 올랐고 <꽃배>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로[相]석[三]’이란 이름으로 당선되었다. 그 작품을 보고서야 권 선생님은 ‘이제 됐다’라며 동화 공부를 한 지 12년 만에 처음으로 칭찬해 주면서 약삭빠른 여우가 아닌 황소에게는 장편이 어울린다고 말했다.
목표를 이루고 나서 나는 자신이 게을러질까 봐 1985년 3월부터 통신문학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매달 거르지 않고 71호까지 냈다. 앞면에는 내 동화를, 뒷면에는 고요의 평론을 실었다. 매달 500매를 내어 학생들과 문인 그리고 동료들에게 주었다. 컴퓨터가 없던 그 시절 타블로이드판 통신 문학지는 반응이 좋았고 팬도 많았다.
1987년에는 잃어버린 고향을 소재로 쓴 장편동화 ≪고향 별≫이 월간 ≪아동문예≫에 연재되어 한국동화문학상을 받으면서, 반짝이는 재치가 부족한 나는 단편이 아닌 장편이 체질이라는 걸 감지했다. 그때 쓴 장편동화 ≪두 사람≫이 계몽문학상을 받았고, 이듬해에 쓴 장편동화 ≪박섬의 보물지도≫로 대구문학상을 받았으며 같은 해에 쓴 장편동화 ≪엄마의 목소리≫가 중앙도서관 우수 동화로 선정되었다.
1990년에 대구교육대학 부속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교생들에게 동화 창작을 지도하는 데 힘써 왔다. 내가 가진 책들을 나눠 주며 아동문학에 입문하기를 적극 권했다. 그리고 교생을 마칠 때 첫 작품을 가져오면서 책을 반납하라 했다. 작품을 써 오면 권 선생님의 방식으로 줄 하나 쭉 긋고 생각해 보라 했더니 하나같이 끈기가 없이 발길이 뜸해졌다. 매도 잃고 꿩도 잃는다더니 아끼던 내 책만 많이 없어졌다. 그래도 통신 문학지를 통한 문학 교육의 저변 확대, 문예 지도와 교생 지도의 공로로 1995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1988년에는 ≪아동문예≫ 월평(145∼156호까지)을 맡으면서 소설 창작론부터 체계적인 이론 학습을 했다. 골이 깊어야 범이 살고 덤불이 짙어야 도깨비가 산다는 말을 공감하며 창작과 이론 접목을 폭넓게 시도했다. 또 1990년부터 ≪아동문학≫ 평론지에 계간 평을 맡으면서 평론 분야에 대한 이론적 배경도 공부했다. 이론에 대한 시야가 넓어지면 넓어진 만큼씩 작품을 분석하는 눈도 넓어졌다. 그래서 나름대로 만든 작품 분석표를 활용했더니 작품 활동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 1991년부터 3년간 계간 ≪동화문학≫의 평도 맡았으며 1991년 ‘아동문학의 위상 정립’이란 주제로 열린 아동문학 합동 세미나(8월 10∼11일, 서울 그린파크호텔)의 동화 부문에서 ‘동화 문학의 위상 정립과 판타지의 회복’이란 주제를 발표했다. 1995년부터 현재까지 창주문학상 심사위원을 맡고 있고, 1997년부터 5년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심사를 맡았다. 2000년부터 2년간 영남대학에서 아동문학 강의를 했고, 2006년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한 후 대구보건대학에서 5년간 강의했으며, 2010년부터 대봉문학 아카데미에서 동화 창작론을 강의하고 있으며, 2011년에는 대구교육대학교 대학원에서 동화 창작론을 강의했다.
내 동화는 성장 과정의 영향으로 하나같이 고향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나는 고향에서 가져온 살구 씨 하나를 뜰에 심고 반백 년을 한 집에서 살고 있다. 살구나무가 고목이 되었다. 집이 바람을 막아 주고 볕바른 양지에서 자라 그런지, 벚나무보다 일주일은 일찍 꽃을 피운다. 살구꽃이 피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꽃그늘 아래서 걸음을 멈춘다. 그럴 때 우리 집은 살구나무 하나로 대궐이 된다. 살구가 익으면 또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노란 살구를 올려다본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살구를 하나씩 나눠 준다. 이 살구나무 하나로 우리 아이들은 계절을 잃은 도시 속에서 봄의 의미를 알고, 나눔의 진리를 실천하며, 비 오는 날에도 매미가 우는 뜻을 헤아린다. 나는 살구 꽃잎 하나에서도 무디어진 감각을 갈고 살구나무 그늘에서 동화를 구상하며 동심의 세월을 엮는다. 그리고 장편을 쓰는 데 필요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 네 시간씩 운동을 하고 있다. 삶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쓰고 또 쓸 것이다.

작품 및 수상 연보

1971년 <자갈밭에 보리수를 심기까지>로 ≪새교실≫ 교육애 기록 우수상 수상.
1972년 <벽지의 기적을 위해>가 교육연합회 논픽션 당선.
1975년 ‘둥지(상주아동문학회 모태)’ 동인으로 문단 활동 시작.
1976년 금오대상 교육 부문 수상.
1977년 <철이와 살구나무>로 창주문학상 받아 문단에 나옴.
1979년 <눈을 감은 누렁이>로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1983년 첫 동화집 ≪흔들리는 뿌리≫(대일출판사) 출간.
1984년 <꽃배>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1985년 월간 통신 문학지 ≪두 사람의 이야기≫ 타블로이드판으로 71호까지 냄.
1987년 ≪고향별≫(아동문예) 연재.
1988년 장편동화 ≪고향별≫(아동문예)로 한국동화문학상 받음.
1989년 장편동화 ≪두 사람≫(계몽사)으로 계몽문학상 받음.
단편동화집 ≪꽃피는 모래성≫(문학세계사), 전기문 ≪노벨≫(문공사) 출간.
1990년 장편동화 ≪엄마의 목소리≫(아동문화교육원)가 중앙도서관 우수동화 선정.
장편동화 ≪박섬의 보물지도≫(윤성)로 대구문학상 받음.
계간 아동문학 평론지 ≪아동문학평론≫에 2년간 동화 계간 평을 씀.
1991년 아동문학 합동 세미나 <아동문학 위상정립을 위한 환타지회복> 발표.
단편동화집 ≪꾀돌이 왕짱구≫(어린이교육연구원) 출간.
1992년 ≪작은 아씨들≫·≪섹스피어 4대 비극≫·≪섹스피어 5대 희극≫(어린이교육연구원) 엮음.
1993년 ≪이무기야광주≫·≪말오줌 먹은 목사≫·≪점치는 나무≫(장원) 출간.
성인을 위한 동화 ≪가슴앓이 새≫(중원사), 전기문 ≪유관순≫(태극) 출간.
그림 동화집 ≪체육실에 떠도는 영혼≫(문공사), ≪죽음을 예언한 컴퓨터≫(문공사) 출간.
1994년 중편동화집 ≪그림 속의 날개≫(한국독서지도회), ≪설명문 쓰기≫(한국교과 연구회) 출간.
장편동화 ≪외톨이가 된 보리 문둥이≫(동아출판사) 출간.
1995년 저학년 동화집 ≪떡볶기 반장≫(한국독서지도회), ≪숨바꼭질≫(한국독서지도회) 출간.
장편동화 ≪지구어린이 경찰대≫(한국서적공사) 출간.
≪도깨비다리≫·≪까치로 변한 공주≫·≪욕쟁이훈장님≫(장원)
문학 교육 공로로 대통령상 받음.
1996년 장편동화 ≪탈을 쓴 아이≫(두산동아)로 한국도서저작상(문공부장관) 받음.
1997년 동화집 ≪동전을 낳은 교탁≫(관일미디어) 출간.
1999년 중편동화집 ≪무지개 꽃≫(수능교육) 출간.
2002년 장편동화 ≪아버지의 별나라≫(청동거울), 단편동화 ≪얼굴만큼 큰 귀고리≫(한국 독서지도회), ≪글쓰기 지도법≫(교육자료) 출간.
2003년 장편동화 ≪느티나무가 있는 학교≫(효리원) 출간.
2006년 퇴임 기념 문집 ≪뚜벅뚜벅 걸어온 길≫(영광사) 냄.
2008년 전기집 ≪최무선≫(효리원) 출간.
2010년 대봉문학아카대미에서 동화 창작론 강의(현재까지).
장편동화 ≪너와집 산소년≫(소년문학) 225∼239호 연재.
2011년 단편동화집 ≪깜상≫(한국독서지도회) 출간.
2012년 장편동화집 ≪엄마의 얼굴≫(상서각) 출간.

해설 - 심후섭
1951년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대구교육대학, 대구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 대구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등에서 상담 심리와 교육 방법 등을 공부하고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대구달성교육지원청 교육장 및 대구교육대 겸임 교수로 일하고 있다.
1980년 창주문학상 신인작품상 동시 부문에서 당선되고 ≪아동문학평론≫지에 동시가 추천되어 아동문학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서 1984년까지 ≪소년≫에 동화가 추천 되고, ≪새벗≫ 및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동화 부문과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서 당선이 되었다. 따라서 동시와 더불어 동화 작품을 함께 발표하고 있다.
이후 제1회 MBC 금성창작동화대상 장편동화 부문, 대구문학상 동화 부문, 한국아동문학상 동화 부문 등에서 문학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할머니 산소를 찾아간 의로운 소 누렁이≫를 비롯해 60여 권이 있다. 그리고 동시 <꽃눈>·<비 오는 날>·<가위바위보>·<외갓길>, 동화 <세상에서 제일가는 정원사> 등이 현행 초등학교 국어 및 음악 교과서에 실린 바 있다.

<김상삼 동화선집>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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