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영순
나는 1934년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원산리에서 태어났다.
1941년 4월 1일, 할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입학식에 가는 길이었다. 들판 길을 지나는데, 때 아닌 봄눈이 시설스럽게 몰아친다. 할아버지는 바람이 부는 쪽으로 갓을 기울여 쓰고는, ‘춘설이 분분하니 춘래 불사춘이라’ 하고 한시 한 구절을 외운다.
“영순아, 학교에 들어가 일본 말이나 배우려고, 이 고생을 하며 먼 길을 다니려 하느냐?”
덜덜 떨고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러운지, 할아버지는 동네 서당에 다니며 한문 공부나 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까지 서당에서 ≪천자문≫과 ≪동몽선습≫, ≪명심보감≫ 등을 배우고 있었다. 내가 다닐 한산초등학교는 우리 마을에서 6킬로미터나 떨어진 한산 읍내에 있었다.
나는 입학해서 ≪조선어 독본≫을 한 시간만 배우고 그 책을 학교에 반납했다.
주일에 한 시간만 배우던 조선어 공부가 폐지된 것이다. 우리는 일본 말만 배웠다. 그런데 철없는 나는 먼 등굣길을 지각 한번 않고 학교에 다녔다. 그런데 그날은 등굣길에 무섭게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보려다가 5분 정도 지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복도에서 손을 들고 벌을 섰다. 수업이 끝나자 선생님은 알이 굵은 주판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지고쿠오 야라나이 구스리오 야루(지각을 않는 약을 주겠다).”
나는 속으로 ‘지각을 않는 약이 있나?’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며 그 약을 기다리는데, 선생님은 우리의 까까중머리에 알이 굵은 주판을 엎어누르고 득득 문지르는 것이었다. 머리통에 불이 붙는 것처럼 아팠다. 얼마 동안 얼얼하던 머리에 밭고랑이 생겼다. 우리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그렇게 스파르타식 군국주의 교육을 받으며 학교에 다녔다. 우리는 4학년 때부터는 성인 근로자들처럼 노동에 동원이 되었다. 농번기가 되면 보리 베기, 모심기에 동원되었다. 여름이면 퇴비 만들기, 건초 베기, 송탄유 짜기를 했다. 그리고 가을이면 추수하기, 겨울이면 가마니 짜기, 새끼 꼬기 등에 동원되었다. 남자 어른들이 징용, 징집 등으로 끌려갔기 때문에 초등학교 학생들이 그 자리를 보충하는 것이었다.
내가 5학년이 되던 1945년 7월이었다. 그날도 노역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담임인 기무라 선생이 우리 네 사람을 따로 불러 모았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비밀을 지킬 것을 당부하면서 이런 말씀을 조심스럽게 했다.
“우리는 조선 사람이다. 지금은 우리가 일본의 군국주의 교육을 받고 있지만, 우리는 조선의 글자와 문화 그리고 우리말을 잊으면 아니 된다. 우리의 말과 글을 잃으면 우리는 영원히 일본의 노예가 되고 만다. 이 봉투 속에는 우리의 선인들이 지은 시조 글 100수가 들어 있다. 너희는 우리 조선 글과 한문을 읽을 수 있으니까, 이 시조 100수를 여름 동안 외우도록 한다. 그런데 이것은 너희 부모님에게도 말해서는 아니 된다.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
나는 선생님이 주신 그 봉투를 우리 집 골방에 숨어서 뜯어 보았다. 그 속에는 등사판 글씨로 만든 시조 글 100수가 들어 있었다. 시조는 한글과 한문으로 혼합된 문장인데, 어려운 한문자는 한글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조의 작가나 해설문은 표기되지 않았고, 시조 글 본문만 달랑 써 있었다.
나는 시조 글의 작가나 내용은 모르는 채, 매일 두세 수씩 무조건 외워 나갔다. 내가 정말 아무도 모르게 그 시조 글 50여 수를 외우고 있을 때였다.
“영순아, 너는 시조를 읊조리는 영감들처럼, 무얼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니?”
우리 할머니가 내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가슴이 뜨끔했지만 시치미를 떼곤 했다.
그런데 마침 8·15 해방이 되어 그 시조 글을 식구들 앞에서도 구구단을 외우듯 기를 펴고 외워 나갔다. 그러자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그 시조의 작가와 글 내용까지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공부한 시조 글을 소재로 해 뒷날(1990년대) ‘시조 풀이 동화’ 50여 편을 창작했다.
1950년 중학교 2학년 봄에 축구 시합을 하다가 척추를 크게 다쳤다. 대전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으나 별로 효과가 없어서, 집으로 돌아와 약을 지어다 먹었다. 탕약 열 첩 중 여섯 첩을 먹고 나니, 다리 근육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쑤시고 통증이 심했다. 비가 오는 밤인데 잠을 잘 수가 없어 마당을 마구 뛰어다녔다. 다음 날 아침 할아버지가 한의원을 찾아가 진상을 소상하게 말하니, 한의사는 ‘척추에 뭉쳐 있던 어혈(瘀血)이 풀려 나가는 좋은 징조니까 남은 탕약 네 첩도 모두 먹여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틀 뒤 두 다리가 마비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이후 장기간 치료를 받아 지팡이를 짚고 근거리는 다닐 수 있게 되었으나 중학교에는 다닐 수가 없어서, 이웃 마을에 있는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습득했다.
그 서당의 박준화 훈장님은 충남 지방에서는 명성이 높은 한학자였다. 그분에게 ≪소학≫, ≪대학≫, ≪통감≫ 등을 공부하면서 내가 뒷날(2000년대) 역사 동화를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건 그렇고 나에게 한학을 공부시키는 우리 아버지의 목적은 딴 데 있었다. 다리가 부실한 아들을 한의사로 만들려는 계획으로 ≪동의보감≫ 등 한의학 서적을 읽을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한의사 시험에 응시하려면 큰 한약국에 들어가 수삼년 동안 조수 노릇을 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서울에 한의사를 양성하는 동양한의대(뒤에 경희대 한의대로 편입됨)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학교에 들어갈 목적으로 중등학교 강의록을 주문해, 대학 입학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래서 2년 만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런데 막상 내 실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은, 동양한의대와 서라벌예대 정도였다. 나는 두 학교로부터 동시에 합격통지서를 받고 보니, 한의대보다 예대 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예대에 가서 소설 창작 공부를 해서 장애자가 된 내 불쌍한 영혼을 소설로 표현해 보고 싶은 충동심이 생겨, 결국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로 입학을 했다. 나는 1년 동안 아버지를 속이면서 예대를 무사히 다녔다.
서라벌예대는 건물이 남산 밑에 있다가 소실이 되어, 미아리 고개 너머 산중턱에 신축이 되었다. 그래서 등교를 하려면 돈암동 전차 종점에서 내려, 미아리 고개를 넘어야 했다. 비포장도로로 군용차량들이 쌩쌩 달리는 바람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고개를 넘어 다녔다. 그래서 큰길에서 좀 떨어진 호박밭의 샛길로 걸어 다녔다. 그러는 사이 다리에 힘이 조금씩 올라, 지팡이를 짚지 않고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예대 앞으로는 정릉천의 맑은 물이 흘렀다. 그 개울 건너 야산에는 만여 기의 무덤, 즉 ‘미아리 공동묘지’가 학교 앞의 진풍경이었다. 서정주 선생님은 그걸 보고, ‘학교는 명당자리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데,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저들의 무덤 앞에 생명이 긴 예술을 창조하는 예술학교가 우뚝 서 있으니, 이곳이 명당이로다’라고 농담까지 했다.
아무튼 학교 신축 개관 기념으로 5개과(문창과, 연영과, 무용과, 음악과, 미술과)에서는 돌아가며 교내 예술제가 한동안 베풀어졌다. 이 잔치에 시골에서 농사나 짓던 우리 아버지도 참석하게 되었다. 내가 서라벌예대에 다니는 것을 알게 된 아버지가 나의 학교생활이 궁금해서 학교를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무용과 여학생들의 발레를 관람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몇 분 동안 발레리나의 벗은 모습만 보고는, 곧 3층 강당을 뛰쳐나온 것이다. 아버지는 문창과 강의실 창 너머에서 손짓으로 나를 복도로 불러냈다.
“학교를 당장 옮겨라. 발가벗고 광대놀이나 하는 학교에 너를 보내려고, 소를 팔아 등록금을 갖고 온 줄 아느냐?”
아버지는 내가 다른 대학으로 옮기지 않으면 등록금을 줄 수 없다고 역정을 냈다.
“아버지, 우리 문예창작과는 시와 소설을 창작하는 공부를 하기 때문에….”
“듣기 싫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너희도 연애소설이나 쓰는 것을 공부하겠지? 한의대가 싫으면 사범대학으로 들어가 선생 노릇이나 해라.”
아버지로부터 등록금과 하숙비를 차단당한 나는, 한 학기를 버티다가 결국 서울문리사범대학 국어과로 편입학을 했다. 그렇게 되자 시를 써 들고 자주 찾아가던 공덕동의 서정주 선생님 댁도 면목이 없어 발길을 끊고 아울러 문학 공부의 희망도 접어 두고 말았다.
1958년 사대를 졸업한 나는 중학교의 교사 자리가 여의치 않아, 경기도 연천초등학교 교사로 나갔다. 그렇게 선생 노릇이 시작되었으나, 3년 3개월 만에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탓으로 그다음 달(1961년 6월)에 교직에서 퇴출되었다. 원인은 내가 군 복무를 안 했기 때문에 공직에서 파면당한 것이지만, 그때는 어떠한 이유로도 면죄를 받을 수가 없었다.
죄인처럼 고향으로 쫓겨난 나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삭히기 위해 일명 ‘학못’이라고도 부르는 저수지로 낚시질을 다녔다. 그런데 그 낚시질이란 것이 물고기를 낚은 사람이 술까지 사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친구들과 자주 술타령을 하다 보니, 실업자가 되어서 어머니로부터 용돈을 받아 쓰는 처지라 면목이 없었다.
나는 낚싯대를 파기하고 일체 두문불출, 집 안에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그때 뒷방에서 들려오는 누이동생의 한산 세모시 베를 짜는 베틀 소리가, 마치 삼매승의 목탁 소리처럼 들려왔다. 하얀 모시 적삼을 입고 머리를 치렁치렁 따 내려 빨간 갑사댕기를 맨 누이가 베틀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단아한 단정학(丹頂鶴)을 보는 듯했다.
누이는 내가 중학교를 다니다가 병이 들어 집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내게 잔심부름을 해 주던 예쁜 동생이었는데, 어느덧 성장해 단정학처럼 정숙한 처녀가 되어 있었다.
아무튼 나는 그런 무아지경에서 소설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서라벌예대를 다닐 때 구입한 문학작품 창작론 등의 교재도 다시 읽어 보고, 월간 문예지인 ≪현대문학≫도 구독하면서 소설 습작을 부지런히 했다. 그리고 소년소설도 몇 편 써 보았다. 소년소설 중에는 <학처럼>이란 30매 정도의 단편이 있다. 지금은 단정학의 모습으로 베틀에 앉아 있지만, 10여 년 전 내가 집에서 장기간 요양하고 있을 때 누이는 초등학교 학생이었는데 어찌나 오빠(나)의 수발을 살갑게 들어 주던지.
<학처럼>은 그렇게 자전적인 소재로 구성한 작품이었다. ‘소년소설이나 동화는 작가의 어린 시절의 체험을 재연하는 작업이다’라고 공부한 나는 그 작품에 애착이 생겼고, 그 작품을 몇 번 고쳐 연말에 ≪한국일보≫ 신춘문예(동화 부문)에 처음으로 응모를 했다. 그런데 1962년에 당선되었다. 마해송 선생과 이원수 선생이 심사를 했는데, ‘<학처럼>은 오누이의 돈독한 우애를 사실적으로 잘 묘사한 동화다’라고 심사 평에 극찬을 해 주었다. 아무튼 <학처럼>이 당선되어 나는 동화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것이 꼭 50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초야에 묻혀 있던 나는 동화를 발표할 지면을 얻지 못해 개점휴업 상태로 3년을 지냈다. 그리고 교사 채용 시험을 봐서 초등학교에 복직이 되었다. 그런데 아동문학 작품을 게재하는 잡지가 귀하던 시절이라 10여 년 동안 ≪교육 자료≫, ≪새교실≫ 등 교육 잡지에 단편동화를 겨우 여덟 편 발표했다. 그러다가 1976년 ≪아동문예≫와 ≪아동문학평론≫ 등 문예지가 생기면서 동화를 발표할 지면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1978년에는 일간지 ≪소년조선신문≫에 졸작 ≪늦동이≫를 연재했다.
장편동화 ≪늦동이≫는 다음 해에 도서출판 ‘상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고, 1981년에 제3회 현대아동문학상을 받는 영광도 누렸다. ≪늦동이≫는 지능 장애가 있는 정신지체아의 생활 모습을 그린 일종의 장애 아동의 재활을 돕는 재활 동화다.
나는 39년간의 교직 생활 중 17년 동안은 교감 교장으로 관리직에 있었고, 나머지 22년 동안은 평교사로 근무했는데 그중 8년 동안은 정신지체 아동만 가르치는 특수학급을 담임했다. 나 자신이 장애자로 살아온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장애아들의 재활 교육 방법을 교습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구 한국 산업대학에 가서 매 학기 4주씩 4회에 걸쳐 16주간 특수교육을 받아, 특수교사 자격증을 받고 특수학급을 담당했다. 그런 관계로 1980년대에 출간된 내 작품집에는 장애자의 재활을 다룬 재활 동화집이 여덟 권이나 된다. 그런 재활 동화의 소재는 모두 한국 산업대학에서 특수교육을 받을 때 습득을 한 것과 특수학급을 담임할 때 체험한 것들이라, 사실주의에 충실한 작품성을 지니고 있다는 평을 들었다.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나는 역사 동화를 많이 쓰고 있다. 장편 역사 동화 ≪고구려의 왕자≫로 제1회 민족동화문학상을 받았다. 아동문학 평론가인 최지훈 선생은 ‘김영순의 역사 동화는 오로지 한국사와 한국의 위인과 한국 문화 인물을 동화로 부각하는 데 전심전력을 다함으로써 그의 문학적 의식을 분명하게 할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자임을 분명하게 작품에 표현하고 있다’라고 호평을 해 주었다. 내가 이렇게 역사 동화를 창작할 수 있는 것은 한문학을 꼼꼼하게 공부한 것들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동화 문학은 아니지만 ‘한국슈타이너’에서 계획 출판한, ‘신한국사 50권’ 중에서 여덟 권을 내가 집필했다. 제11권 ≪신라의 화랑과 고승들≫, 제12권 ≪발해, 일어나다≫, 제13권 ≪통일 신라의 황금시대≫, 제14권 ≪후삼국의 영웅들≫, 제15권 ≪겨레의 새 영도자, 왕건≫, 제45권 ≪애국 열사들의 투쟁≫, 제46권 ≪일본의 패망과 8·15광복≫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나는 2000년대에 들어와서 우리의 고유 문학인 시조 글을 소재로 해 시조 풀이 동화 50편을 창작해 동화집 네 권을 발간했다. 그중에는 황진이의 시조 여섯 수와 그 밖의 옛 시조 여섯 수를 소재로 삼아 장편동화 ≪시조 시인 황진이≫를 책으로 출간했는데, ‘황진이의 아름다운 정과 한을 노래한 우리나라 최고의 시조 문학을 어린이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한 동화’라고 좋은 평을 받았다. 이런 결과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이 비밀스럽게 건네준 시조 100수를 외운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1941∼1945년), 내가 직접적으로 체험한 것을 소재로 해 장편으로 창작한 ≪우차꾼의 아들≫은 제12회 방정환문학상을 받았다. 그 밖에 나는 한수 이북 향토 탐방 자작 시조 서른두 수를 창작해, ≪한북신문≫(경기도 지방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그렇게 30여 권의 책으로 엮어 낸 나의 동화들은 대부분이 직접 체험을 해서 소재를 얻었거나, 공부를 해서 간접 체험으로 얻어진 것들이다.
동화 월평도 ≪아동문예≫에 1996년 1월호부터 2012년 현재까지 17년 동안 계속 집필하고 있으며, ≪월간문학≫에도 2002년, 2004년, 2009년 3차에 걸쳐 10개월분을 썼다.
나는 동화를 창작할 때 나 나름대로 몇 가지 원칙을 세워 놓고 그것에 따르려고 노력한다.
첫째, 동화는 한글 문학이다. 그런 한글 문학인 동화의 문장에는 외국어와 한자어는 최대한 배제하고, 순수한 우리말만 쓰도록 노력한다.
둘째, 소재는 우리의 정서에 알맞고, 우리의 전통문화가 배어 있는 것을 뽑아서 쓰도록 한다. 토속적이고 향토적인 소재들을 가려 쓴다.
셋째, 복잡한 복선 구조를 지양하고, 장편동화까지도 간결하고 선명한 단선 구조로 줄거리를 짠다.
작품 및 수상 연보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학처럼> 당선.
1979년 11월 장편동화 ≪늦동이≫(상문서관) 출간.
1981년 ≪늦동이≫로 제3회 현대아동문학상 수상.
6월 장편동화 ≪섬까치와 휴전선≫(상문서관), 단편집 ≪햇살을 모으는 아이들≫(갑인출판) 출간.
8월 단편집 ≪윤사월≫(한국서적공사) 출간.
1982년 호국 문예 중편소설 <나는 한국인>으로 국방부장관상 수상.
3월 장편동화 ≪용못에 달뜨고≫(한국서적공사) 출간.
7월 장편동화 ≪목각공의 딸≫(교음사) 출간.
8월 장편동화 ≪휴전선의 아침≫(문화교육원) 출간.
1985년 8월 장편동화 ≪오빠새와 인삼≫(동아일보사) 발표.
1986년 3월 연작 동화 ≪꽃집과 완구점≫(아동문예) 발표.
1987년 9월 동화 선집 ≪공주와 숯장수≫(아동문예) 발표.
1988년 6월 장편동화 ≪호수보다 깊은 산≫(아동문예) 발표, 장편동화 ≪화랑해≫(한국서적공사) 출간.
1989년 의정부시 문화상 문학 부문 수상.
1990년 10월 장편동화 ≪배달의 영웅들≫(아동문예) 발표.
1991년 7월 단편집 ≪황제가 없는 나라≫(금왕출판사) 출간.
1992년 7월 연작 동화 ≪섬까치의 정찰≫(남광) 출간.
11월 장편동화 ≪배달나라 왕자≫(아동문예) 발표.
1993년 11월 단편집 ≪장닭 선생님≫(금왕출판사) 출간.
1994년 <고구려의 왕자>로 제1회 민족동화문학상 수상.
1월 단편집 ≪지각 않는 약≫(신구미디어) 출간.
1995년 4월 장편동화 ≪고구려의 왕자≫(아동문예) 발표.
1996년 9월 장편동화 ≪남부여 광복군≫(아동문예) 발표.
11월 단편집 ≪왕개구리의 착각≫(가정교육사) 출간.
1998년 12월 장편동화 ≪배달나라 발해≫(아동문예) 발표.
2002년 ≪우차꾼의 아들≫로 제12회 방정환문학상 수상.
3월 장편동화 ≪우차꾼의 아들≫(아동문예) 발표.
2003년 6월 동시 공부 ≪이메일 편지≫(아동문예) 발표.
2004년 5월 시조 동화 ≪열두 시조의 아주 특별한 동화≫(파랑새어린이) 발표.
2005년 4월 시조 동화 ≪한산섬 달 밝은 밤≫(아동문예) 발표.
2009년 12월 장편동화 ≪탈춤 추는 금수레≫(아동문예) 발표.
2010년 7월 시조 동화 ≪공부하지 말라≫(글사랑) 출간.
2011년 1월 시조 동화 ≪황진이와 홍랑≫(글사랑) 출간.
7월 단편집 ≪일본에 맞선 사람≫(글사랑) 출간.
해설 - 기도연
1970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후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13년에는 ≪아동문학평론≫ 평론 부문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평론가로 등단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공저 ≪문화산업과 스토리텔링≫(다할미디어, 2007)이 있다.
<김영순 동화선집> 저자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