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옥애
나는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다음 해인 1946년 늦은 봄에 태어났다. 호적엔 음력 4월 11일로 올려졌으나 양력으론 한 달 후인 5월 11일이다.
생가의 주소는 전남 강진읍 남성리 탑동 117번지. 그 집에서 아버지 김익균과 어머니 신정님은 2남 6녀를 낳았다. 그리고 나는 그중 넷째 딸이다.
내가 태어난 마을 탑동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쓴 시인 영랑 김윤식의 생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영랑은 내 할아버지의 친 누나 아들이다. 우리 아버지와는 외사촌 관계인 셈이다. 영랑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나는 시 작품 외엔 그를 전혀 모른다. 다만 부모님이나 친척들의 말을 통해 짜깁기하듯 전해 들었을 뿐이다.
아버지는 군청에 다니면서 한편으론 농사도 꽤 지었다. 그런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언제부터인지 도박에 손을 댔다. 결국 도박 빚을 갚느라 어머니가 애지중지한 논과 밭들은 깡그리 없어졌다. 그리고 5·16군사정변 직후 아버지는 불성실 근무자로 뽑혀 맨 먼저 직장에서 퇴출당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그때부터 나는 경제적으로 시달림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중학생도 가르치고, 학교 내에서 매점이나 식당의 도우미를 한 적도 있다. 학교생활이 힘들고 부유한 친구들이 부러울 땐 나는 아버지를 무척이나 원망했었다. 그리고 그런 불만들을 종이에 써 나갔다. 전남여고 3학년 문예반 윤삼하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부지런히 시 습작을 시켰다. 윤삼하 선생님이 단순한 문예반 선생님이 아닌 훌륭한 시인이었다는 것을 나는 훗날에야 알았다.
가정 형편 때문에 4년제 대학 대신 광주교육대학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최정순 교수님을 만났고 ‘단층’ 문학 동인을 만들어 문학 활동을 했다. 나는 학교 다니면서 2년제 교육대학에 늘 불만을 품었다. 내 형편에 초급대학도 과했지만 나의 꿈은 그게 아니었다. 틈만 나면 4년제 대학으로 갈 기회를 찾았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학교만 1년 늦게 졸업했다.
첫 발령을 받아 고향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지금은 없어져 버린 강진 서초등학교 근무 1년을 마치고 나의 모교인 강진 중앙초등학교로 옮겼다.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 박용수를 만났다. 아이들의 고전 읽기를 함께 지도하다 가까워졌다. 결혼을 하려 했지만 내 부모님과 형제들의 반대가 너무나 심했다. 그는 결별의 선물로 인쇄소에서 내 이름이 써진 원고지 3만 장을 찍어 나에게 선물했다. 기뻤고, 놀랍고, 감동에 젖은 나는 고향 학교에서 타지로 전출을 해 버렸다. 부모님과 가족들을 철저하게 배신한 상황에서 그해 12월 27일 결혼식을 올렸다. 내 나이 스물다섯 살 적 1970년의 일이다.
결혼은 낭만과 꿈과 자유를 모두 제약했다. 나보다 여덟 살 위인 남편은 아버지 안 계신 가난한 8남매 장남이었다. 나는 그런 상황에 처한 남편의 생활과 현실을 함께했다. 결혼 전에는 광주에 좋은 영화가 들어오면 강진에서 버스를 타고 광주까지 보러 다녔다. 영화관에 앉아 같은 영화를 세 번이나 본 적도 있었다. 한 번은 대사 듣고, 한 번은 배우 얼굴 보고, 한번은 눈 감고 음악 감상하고…. 집안일 같은 것은 거들떠보기가 싫었다. 배 깔고 엎드려 책 읽는 게 나의 일상이었다. 마음이 내키면 주말이나 방학에 바다로 산으로 떠나는 여행 또한 실컷 즐겼다. 그런데 결혼생활은 그런 자유와 여유를 용납하지 않았다. 자유분방했던 나는 1971년 첫 딸 낳고, 1972년 둘째 딸 낳은 후 협심증으로 시달렸다. 마음은 이것이 아닌데, 내가 이렇게 살아가면 안 되는데 하고 외치면서도 생활 속에서 5년 남짓의 시간은 그냥 떠밀려 갔다. 늘 나는 극기했다. 숨이 답답해서 컥컥 죽을 지경이었다. 심전도 검사를 수시로 했으나 아무런 병은 없었다. 신경성으로만 진단이 나왔다. 내 문학의 감수성은 협심증에 시달리며 먼지가 앉고, 녹이 슬어 갔다. 문학은 완전히 가출해 버린 상태였다.
막내인 아들을 낳았다. 1974년 10월 4일 새벽에.
그날은 아들을 얻었지만 답답하던 나의 삶에도 변화가 시작된 날이다. 아들을 낳았다는 자부심에 마음이 홀가분해진 거였다. 이제 내 일을 시작해도 되겠지, 하는 욕심이 생겨났다.
결혼 전에 남편이 찍어 준 원고지를 떠올렸다. 먼지가 쌓여 있는 원고지들을 다락방에서 꺼냈다. 그동안 문학공부를 하지 못한 내 실력을 시험 쳐 보고 싶었다. 쓰자. 한번 써 보자.
신생아가 잠든 곁에 앉아 몸조리 대신 나는 만년필을 움직였다. 5년 남짓 펜을 놓아 버린 상태에서 엉뚱하게도 소설이 아닌 동화를 써 나갔다. 그만큼 학교생활의 경험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해 처음 써 본 동화를 1975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우물가를 맴도는 아이들>이란 동화였는데 운이 좋았던지 당선이 됐다. 동화 <우물가를 맴도는 아이들>은 담양 금성초등학교 아이들이 양철지붕 아래의 우물가에서 노는 모습들을 소재로 했다. 당선 소식을 듣자 나는 학교 교무실 난로 가에 주저앉아 버렸다. 나 같은 사람도 신춘문예에 당선될 수 있구나 하는 신뢰감이 일었다. 세상이 온통 정의롭고, 맑고, 공정하게 느껴졌다.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도 생겨났다. 협심증 증세도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 무지개만 같았던 소설, 소설.
동화 당선 후에도 나는 소설만 입으로 되씹으면서 3년 동안 동화 한 편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소설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가을이 짙어 갈 무렵 교육대학 시절 문우 전원범 시인이 이런 내 모습에 따끔한 일침을 놓았다. 동화 쓰기에 흔들리지 말라고. 앞으로 동화문학 한 길을 가라고. 방황하다 세월 보내면 이것도 저것도 다 잃는다고.
문우의 충고를 받아들인 나는 다시 그해에 중앙지 신춘문예 준비를 시작했다. 광주 남초등학교의 교실 뒤편 연못을 보면서 환상 동화를 준비했다. 1979년 ≪서울신문≫에 두 번째 쓴 동화 <너는 어디로 갔니?>를 응모했다.
역시 운이 따랐는지 당선이 되었고, 당선이 되니까 여기저기서 원고 청탁을 많이 받았다. 겁도 없이 다음 해인 1980년엔 동화집을 묶기 위해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다. 며칠 후 5·18이 일어나 혹시 인쇄소에 불은 나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다행히 ≪너는 어디로 갔니?≫란 동화집이 아동문예사에서 출간됐고 그해 11월 15일 그 책으로 전남 아동문학가상을 수상했다. 그 무렵 문우 전원범과 박종현 아동문예사 발행인의 권유로 전남아동문학가협회라는 단체에도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까지 줄곧 동화의 밭을 가꾸면서 살아왔다.
요즘처럼 컴퓨터가 없던 시절엔 만년필로 원고지를 한 칸 한 칸 메워 나갔다. 1970년대의 글쓰기 속도와 컴퓨터로 써 내려가는 요즘을 어찌 비교나 할 수 있겠는가. 급식을 실시하지 않았던 때라 가족들 도시락을 일곱 개까지 싸면서 근무를 했다. 낮에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퇴근길엔 시장에 들러 다음 날 아이들 도시락 반찬 준비하고, 약속된 원고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파지가 많이 나온 날엔 밤을 새워야 했다. 주변에선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나를 ‘철인’이라 칭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광주에서 동화 쓰는 사람 다섯이 모였다. 전국 최초의 동화 모임이었다. 장문식, 황일현, 김재창, 김옥애, 전양웅. 이렇게 다섯 사람이 ‘흙 담’ 동인을 만들었다. 남자 네 명에 여자는 나 혼자였다. 하지만 모임을 끌어갔던 전양웅 선생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흙 담 모임은 흐지부지 허물어져 버렸다.
나는 무대에서 연극도 해 봤다. 고향에서 만든 모란촌 동인지 20주년 기념행사로 기획한 연극이었다. <병자 삼인>의 대본을 외우면서 나는 잠시 또 연극에 미쳤다. 여자 주인공 ‘이옥자’ 역의 연기를 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공연이 끝나자 다시 또 무대에 서고 싶었던 그 기분을 체험하면서 연극인들을 이해하게 됐다. 왜 그들이 자기 직업을 꿋꿋이 지키고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그뿐이랴. 지방 방송국에서 지역프로로 나간 어린이 시간대의 극본도 썼다. 드라마 극본 쓰는 일 역시 즐거웠다. 날더러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가서 정식으로 드라마 쓰는 공부를 해 보는 게 어떠냐며 꼬드긴 선생님도 있었다.
또 이 지역의 각종 글짓기 심사도 퍽 많이 맡았다. 작게는 교육청 출장에서부터 크게는 호남예술제와 ≪전남일보≫(현재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이르기까지. 신춘문예에서 내가 뽑았던 사람들이 열심히 활동을 하면 혼자서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어디론가 묻혀 미아가 되어 버린 사람들도 생겨났지만 장편동화 ≪무익조≫로 문학동네 상을 받은 김성범, <학교에 간 개돌이>를 쓴 김옥, 서울출판사에 근무한 문자영, 16회 창비 좋은 어린이 책 대상으로 뽑힌 김성진, 유아동화를 쓴 한은경 등은 지금도 관심이 가는 훌륭한 후배 동화작가들이다.
1980년대에는 밤에 학교까지 다녔다. 광주교육대학 야간 4년제에 입학을 했었다. 마치 4년제 대학을 가지 못했던 한풀이라도 하듯 졸업 후엔 일반 대학원까지 다니면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생각해 보면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인지 개성이 없는 작가인지 모르겠다. 직장도, 가정도, 문학도 모두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명예퇴직하기 전까지는 한 몸에 다섯 지게를 지고 다니면서 끙끙거렸다. 그 짐을 하나도 내려놓질 못했다. 학교생활을 하나 접은 후에야 집에서 장편동화를 몇 편 썼다. 그래서 ≪들고양이 노이≫로 제12회 한국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래도 넌 보물이야≫를 써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어 2천만 원의 창작 지원금을 받았다. 또 그 동화로 28회 불교아동문학상까지 수상했다. 이런 일들은 내가 할머니가 되어서 늦게 이루어졌다. 나이를 먹는 것과 일하는 것은 별개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내 삶에 동화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이 나이에 많이 허전했을 것 같다. 또 문학이 전부인 양 내 가족들을 돌보지 않았더라면 지금 꽤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갈등은 많았지만 일상의 삶과 문학은 무난히 공존해 왔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운명인지도 모르지만.
작품 및 수상 연보
1980년 ≪너는 어디로 갔니?≫(아동문예사) 출간.
1984년 ≪잠을 자는 돈≫(겸지사), ≪보우네 집 이야기≫(세종출판사) 출간.
1987년 ≪개똥벌레의 춤≫(견지사), 수필집 ≪겨울 그 솔바람 소리≫(진화당) 출간.
1990년 ≪이상한 안경≫(경원각) 출간.
1992년 ≪바람을 보았니?≫(국민서관), 수필집 ≪모든 사람들이 가는 그 길을 가거라≫(문학통신) 출간.
1993년 ≪기차를 타고≫(국민서관) 출간.
1996년 ≪갈매기가 울어요≫(경원각), ≪손가락 발가락≫(견지사) 출간.
1998년 ≪옹기는 들꽃이다≫(애신) 출간.
2002년 ≪들고양이 노이≫(청동거울), ≪별이 된 도깨비누나≫(청개구리) 출간.
2003년 ≪들고양이 노이≫로 제12회 한국아동문학상 수상.
2005년 ≪엄마의 나라≫(청개구리) 출간.
2010년 ≪그래도 넌 보물이야≫(청개구리) 출간.
2011년 동시집 ≪내 옆에 있는 말≫(청개구리) 출간. ≪그래도 넌 보물이야≫로 제28회 한국불교아동문학상 수상.
2012년 ≪늦둥이라도 괜찮아≫(청개구리) 출간.
해설 - 이동순
가사문학의 산실인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났다. 식영정과 환벽당, 소쇄원을 놀이터 삼아 자랐으며,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송강 정철과 식영정이 나오자 신기하기만 했던 기억이 여전하다. 전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조태일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5년에 시로 등단했으나 시는 오래전부터 쓰지 않고, 2011년 ≪아동문학평론≫에 평론 <동일화를 향한 동심의 열린 시선>으로 등단해 현대 시와 아동문학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움직이는 시와 상상력≫, ≪조태일 전집≫(편저)이 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샌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공부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하루도 쉬지 않고 공부해야 한다’는 키다리 아저씨의 말씀을 주문처럼 외우며, 광주전남 지역문학 연구와 아동문학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김옥애 동화선집> 저자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