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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원

    류근원 프로필

  • 국적 대한민국
  • 출생 1952년
  • 학력 청주교육대학교 학사
  • 경력 안산 덕성초등학교 교사
  • 수상 2012년 제9회 한국 문협작가 상
    2010년 교원문학 상
    2009년 톨스토이문학대전 아동문학부분 대상
    1987년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

2015.02.04.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류근원
나는 1952년 겨울,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당시 전쟁 중이어선지 부모님이 출생 신고를 늦게 해 내 출생 연도가 호적엔 1954년으로 되어 있다. 내가 자란 충주는 산과 강이 잘 배치되어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탄금대를 휘돌아 흐르는 남한강과 전국에서 물맛이 최고로 좋다 해 이름 지어진 달래강도 흐르고 있다. 곳곳에 빼어난 절경들이 많은 데다. 게다가 집 가까운 곳에 충북선이 지나고 있어 어릴 적부터 기적 소리를 많이 들으며 자랐다. 기적 소리는 다른 곳에 대한 호기심을 많이 심어 주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이 내가 지은 동시에 95점을 주셨다. 그때의 칭찬 덕분에 내게 추상적으로 문학의 씨앗이 심어졌다. 게다가 담임선생님의 책상에 있었던 ≪톰 소여의 모험≫을 훔쳐 읽은 뒤 톰 소여가 되고 싶어 갖가지 사건을 일으킨 것도, 지금 곰곰 생각하면 동화작가가 되는 데 한몫을 기여한 것 같다. 친구를 꼬드겨 공동묘지를 탐험했던 일, 무인도 탐험 대신 무임승차로 열차를 타고 조치원까지 갔던 일들…. 공동묘지를 갔다 온 후, 밤마다 꿈속에서 귀신들이 나타났다. 공동묘지의 무덤이 갈라지며 온갖 귀신들이 나타나 나를 괴롭히는 꿈에 시달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집에 있는 마늘을 훔쳐 만화방에서 돈 대신 내고 몇 시간을 쭈그리고 앉아 만화책 읽은 기억도 난다. 글은 잘 쓴다는 칭찬을 받곤 했지만, 고등학교 졸업 시까지 글짓기 상은 별로 받아 본 기억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대표로 백일장 대회에 나가 장려상 받은 것 외엔 별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면서도 고교 시절 단짝이던 친구 김갑제가 후에 동시인이 되어, 그와 지금까지 문학에 대한 교류를 나누고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고교 시절 내가 연애편지를 대필한 일 때문에 친구들이 줄줄이 교무실로 끌려가 얻어맞고 온 사건이 있었다. 같이 앉았던 짝이 연애편지를 부탁해서 써 주었다. 그러나 그 편지를 짝은 여학생에게 건네주지도 못하고 다른 친구들이 릴레이식으로 훔쳐 가 읽었다. 그런데 소지품 검사로 연애편지가 생활 지도 선생님에게 발각되었다. 친구들은 “제가 쓴 게 아니고 훔친 건데요”라는 자백으로 줄줄이 교무실로 끌려가 흠씬 얻어맞고 왔다. 그러면서 점점 내 목을 옥죄여 오던 연애편지. 그러나 짝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마무리가 되었다. 짝은 교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매 수업 시간 전에 앞으로 끌려 나가 문제아로 얻어맞곤 칭찬 아닌 칭찬을 받았다. “짜슥, 공부는 못하는 게 연애편지는 잘 쓰네. 넌 이다음에 작가가 될 거야.” 지금도 그 시절 황당한 기억을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다.
청주교대를 졸업하고, 1974년 첫 발령지에서 글짓기 반을 맡게 되면서부터 글에 가까이 접근하게 되었다. 동시집과 글짓기 교본을 구해 지도하고, 학교 신문과 문집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교육 잡지인 ≪새교육≫과 ≪새교실≫에 아동문학 등용문인 동시와 동화 모집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냥 지나쳤다.
1980년 서슬 퍼렇던 제5공화국 시절에 사회정화위원회 주관으로 ‘온 국민이 함께 부르는 노래’, 쉽게 얘기를 하면 건전 가요 가사 모집이 있었다. 나는 당시 시장에서 쌀가게를 하고 있었다. 가게 앞을 오가는 군상들을 보면서 <시장에 가면>이란 가사를 지어 응모했다. 떨어졌고 그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얼마 후 편지 한 통이 왔다. <시장에 가면>이 선외 입상작으로 결정되었다는 글과 소정의 상금이 들어 있었다. 이 가사는 후에 당선작들과 함께 악보에도 실리고 ‘류근원 작사, 이수인 작곡’으로 활자화되었다. 가수 혜은이를 비롯해서 많은 가수가 노래로 불렀다. 당시엔 모든 LP 레코드판이 끝 부분에 ‘온 국민이 함께 부르는 노래’가 실려야만 시장에 나올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하기 그지없는 가사였지만 귀에 따가울 정도로 많이 들었다.
내 인생을 바꾼 결정적 계기가 왔다. 1982년 시내 학교생활을 청산하고 벽지 학교로 부임하게 되었다.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로 유명한 천등산 산자락의 작은 학교에 부임하면서부터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면 소재지에서 시오 리를 걸어야 나타나는 오두막 같은 학교 그리고 빼어난 자연 경관과 외로움은 나를 생각의 우물로 빠뜨리기 시작했다. 학교 뒷산 솔숲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눈 뒤집어 쓴 나뭇가지들의 부러지는 소리, 부엉이 울음소리, 디딜방아 소리 등 많은 소리들이 가슴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리도록 맑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그리고 순진하기 그지없는 아이들…. 교육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 준 시기였다.
당시 학교에 유일하게 ≪서울신문≫이 들어왔다. 그 신문의 신춘문예 부문에는 시, 소설, 동화와 함께 교육 수기도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좌충우돌 아이들을 가르치며 처음으로 교육 수기를 써서 응모했다. 아차상으로 떨어졌지만, 내 글을 처음으로 유명인에게 심사받은 중요한 때였다. 응모한 교육 수기는 <천등산 아이들>이었고 심사위원은 ≪서울신문≫ 논설위원인 박갑천과 송정숙 씨였다.
“…끝까지 당선을 겨뤘던 작품은 류근원 씨의 <천등산 아이들>. 교사로서의 자세도 훌륭하고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자연의 환경이 수채화처럼 전해져 오는 분위기가 좋았다. 글이 감흥을 준다는 것보다 더 큰 성과는 없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상당한 기법을 터득하고 있는 문학도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으로 받아 본 평이었다. 그런데 평 속 ‘상당한 기법’이 무엇인지 몰라 한참 헤매기도 했다. 교육 수기 ≪천등산 아이들≫은 1983년 1월 20일부터 23일까지 4회에 걸쳐서 ≪서울신문≫에 연재되었다. 이후 동화도 응모했다. 그런 후 첫해는 결선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내 동화가 ‘관념적, 도식적’이라는 김요섭 씨의 평에 ‘관념적은 무엇이고, 도식적이란 말은 무엇인가?’ 또 한참 헤매야 했다. 이듬해 응모한 동화는 결선에도 오르지 못했다.
1983년 이영두, 전병호 작가가 중심이 되어 충북숲속아동문학회를 조직했다. 나도 회원이 되었다. 1984년 ≪아동문학평론≫지에 응모한 동화가 2회 천료되어 정식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이때 추천해 주신 분이 동화작가 조대현 씨였다. 후에 조대현 씨는 내 문학의 길을 이끌어 주는 스승이 되었다. 천료작은 <민이는 내 동생>과 <거꾸로 자라는 뿌리>였다.
등단이 되면 출판사에서 원고 청탁도 오고 어쩌고저쩌고…. 어깨 으쓱거리며 한참 동안 들떠 있었다. 그러나 말짱 신기루였다. 1년이 가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때 조대현 씨가 장편동화를 써 보라고 했다. 장편동화? 당시의 장편동화는 원고지 500∼600매로 지금 분량 기준과는 완연히 달랐다.
1985년 1월, 충북 단양의 구인사 외진 방에서 2주일 만에 장편동화 ≪싸릿골 이야기≫를 완성했다. 그리고 계몽사에 응모를 했다. 제4회 계몽사어린이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정비석 씨가 상패를 준 기억이 난다. 내 이름이 조금 알려지게 되었다.
타는 목마름이 있었다. 지금도 내 문학의 고향이 되는 천등산, 그 아름다운 자연과 아이들을 잊을 수 없었다. 그해 가을, 장편동화 ≪천등산 이야기≫를 탈고해 ≪새벗≫에 응모했다. 제4회 새벗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한 해에 장편동화로 문학상을 거푸 받으며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어린이 잡지 월간 ≪새벗≫은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잡지였다. 1986년 한 해 동안 ≪천등산 이야기≫가 전성보 화백의 그림으로 ≪새벗≫에 연재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 흐른 후, 미술 잡지에 전성보 화백의 인터뷰 기사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어린이 삽화를 그리면서 제일 인상에 남은 기억에 대해 ‘류근원 선생의 ≪천등산 이야기≫를 읽으며 삽화를 그리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라고 쓴 구절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후로 탄탄대로였다. 예림당, 문공사, 대교출판 등에서 원고 청탁이 줄줄이 들어왔다. 쉼 없이 써 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원고료와 돈 맛에 중독되어 처음의 예술성 문학성은 어디 가고 상업성 글을 쓰느냐고 조대현 씨에게 호된 꾸지람을 받은 적도 있었다.
단편동화보다는 장편동화를 위주로 써 나갔다. 그래서 내겐 단편동화집보다 장편동화집이 훨씬 많다. 1987년도엔 MBC 방송사의 ‘꿈을 키우는 나무상’에 교육 수기 <대장장이의 꿈>이 입상되어, 그해 스승의 날을 전후로 해서 MBC 라디오 60분 라디오극으로 방송되기도 했다. 동요 작사에도 손을 대 1987년 제4회 MBC 창작 동요제에 <산으로 가자>가 결선에 오르기도 했다.
1989년 충청북도에서 경기도로 직장을 옮겼다. 이때부터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국어 교육을 전공했다. 시인 오탁번 교수에게 지도를 받고 대학원을 졸업했다. 국문학 박사 과정까지 생각했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조금씩 글과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1992년 ≪소년동아일보≫에 ≪얄개삼총사≫를 연재하며, 재미있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일러스트레이터 김충원 작가가 야심차게 차린 ‘사과나무’ 출판사에 ≪얄개삼총사≫ 1∼3권을 처녀작으로 출간했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5권까지 내려고 했지만, 여의치 못했다. 출판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내 꿈도 접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김충원 씨는 스케치 및 미술 교실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장편동화 ≪얄개삼총사≫를 마지막으로 매너리즘과 슬럼프에 푹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10년을 허비했다. 그동안 교사에서 교감으로 승진을 했다.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 이름도 아동문학인들 사이에서 잊혀 갔다. 그러나 교감 시절 매주 동시 한 편을 지었다. 그러고는 교사들의 삽화와 함께 현관 게시판에 붙여 전교생이 읽도록 했다. 그때 지은 동시를 모아 동시집 ≪본오풀꽃들의 사랑 방법≫을 내기도 했다. 대단히 웃기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1996년에는 안산교육청에 안산·시흥 사랑에 대한 작사 요청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안산과 시흥을 고향처럼 사랑하자는 내용의 가사 청탁받은 것이었다. 당시엔 안산 교육청에서 시흥 지역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작고한 김소운 동시인이 시흥 찬가 작사를 하고, 나는 안산 찬가 작사를 했다. 작곡은 동요 <숲 속을 걸어요>의 정연택 씨가 담당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곡은 음반으로 제작이 되고, 안산과 시흥에서 매년 안산교육청 합창 대회 시 지정곡으로 3년 정도 불리더니 사라져 버렸다.
2000년에는 경기도 교육청에서 ‘경기 교육의 노래’ 가사 모집이 있었다. 응모를 했더니 전화가 왔다. 최우수작으로 뽑혔으니 조금 수정해도 되겠느냐는 장학사 이야기에 당연 오케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전화 소식 이후 감감무소식이었다. 바람결 소문에 교육감이 마음에 맞는 가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최우수작은 사라지고 우수작으로 표창장을 받아 왔다.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무엇인가 좋지 않은 음모가 꾸며지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공문과 함께 악보와 CD가 학교로 배달되었다. 공문의 주 내용은 ‘경기 교육의 노래를 도민과 학생 그리고 교사들이 즐겨 부를 수 있도록 지도하라’는 것이었다. 악보는 보는 순간, 경악했다. 내 작사 앞뒤 글의 판박이에, 중간 부분은 입상작에서 도용을 한 것이 교육감 작사로 나온 것이었다. 분통이 터졌다. 더 분통이 터지는 것은 경기도 교육청으로 출장을 가는 날엔 하루 종일 ‘경기 교육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이후 각종 연수 시에도 ‘경기 교육의 노래’가 불리곤 했다. 교감 연수 시절 개회식 때 강당에서 합창으로 그 노래를 불러야 하는 얄궂은 운명과 접하기도 했다. 결국 그 교육감은 비리에 연루되어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말았다. 나는 글을 안 쓴 10년 동안 여러 신설 학교의 교가를 작사했다. 그러나 작사를 부탁한 교장들과의 친분을 이유로 작사에는 내 이름 대신 교장의 이름이 올랐다. 단 남양주의 한 초등학교에만 내 이름으로 작사된 교가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 외도의 글들이 문학에 대한 인연의 끈을 완전히 놓지 못하게 한 것도 같다.
2004년 봄, 느닷없는 전화 한 통화가 걸려 왔다. ≪아동문예≫의 박종현 주간이었다. “무엇 하고 있었어? 빨리 동화 한 편 지어 보내라”라는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동화를 못 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며칠 고민을 해서 단편동화 <가위바위보>를 송고했다. 보내 놓고 아무래도 이상했다. 후에 알고 보니 아주 오래전 ≪아동문학평론≫에 발표한 작품이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잊힌 10년의 세월이었다.
다른 작가들의 동화를 많이 읽었다. 젊은 작가들의 동화를 읽을 때마다 주눅이 들어 자신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내 동화를 임신행, 윤수천, 김영순, 이효성, 박성배, 이상배 등 내로라하는 선배들이 칭찬을 해 주어 힘을 얻었다.
이대로 주저앉으면 영원히 동화와는 멀어질 것 같았다. 다시 나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단편소설로 교원문학상을 받았다. ‘아직 죽을 때는 아닌 게 분명한데…’라는 생각은 끊임없이 나를 담금질해 댔다.
다시 장편동화 창작에 들어갔다. ≪눈자니마을의 동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만남≫, ≪열두 살의 바다≫,≪어느 날 그 애가 왔다≫ 등 쉬지 않고 써 댔다. ≪열두 살의 바다≫는 ‘한국해양문학상’을,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만남≫은 ≪문예춘추≫에서 주관하는 ‘톨스토이문학대제전 아동문학대상’을, 단편동화 <뱃고동 소리>는 ‘한국동화문학상’을, ≪눈자니마을의 동화≫는 ‘천등아동문학상’을, ≪어느 날 그 애가 왔다≫는 ‘한국문협작가상’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 정말 열심히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2008년 교장이 되고부터 교실에 직접 찾아가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며 아이들에게 감성교육을 시작했다. 동화 구연가와 시 낭송가 자격증을 따 아이들을 지도했다. 매주 한 번 문학방송을 실시, 아이들에게 ‘글과 친해지기’ 운동을 펼쳤다. 이 내용이 2011년 12월 교육 방송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 다큐멘터리에 <빨간 코의 피에로 교장>이란 제목으로 30분 동안 방영되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동화작가가 되었기에 받는 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욕심부리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장편동화를 창작하고 싶다. 문학성과 재미가 어우러져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동화 창작을 위해서 부지런히 노력을 해야겠다.

작품 및 수상 연보

1984년 단편동화 ≪이름 모를 꽃≫(현대아동문학가협회 연간집) 수록.
1985년 첫 동화집 ≪노래하는 물풍금≫(아동문예) 출간. 장편동화 ≪싸릿골 이야기≫로 제4회 계몽사어린이문학상 수상. 장편동화 ≪천등산 이야기≫로 제4회 새벗문학상 수상.
1986년 ≪새벗≫에 <천등산 이야기> 연재. 장편동화 ≪싸릿골 이야기≫(계몽사) 출간. 단편소설 <나의 사랑 고리탈로찌>로 교원학예술상 수상.
1987년 ≪아동문예≫에 ≪삼총사 행진곡≫ 연재. 장편동화 ≪천등산 이야기≫(새벗), 장편동화 ≪삼총사 행진곡≫(아동문예), 장편동화 ≪물총주식회사≫(예림당) 출간,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 수상.
1988년 동화집 ≪우리들도 사람이야≫(대일출판사), 장편동화 ≪영광의 7회말≫(견지사) 출간.
1990년 장편동화 ≪철부지들의 풀빛 노래≫(대교출판) 출간.
1991년 단편동화집 ≪아빠 미안해요≫(예림당), 장편과학동화 ≪또또또 세계를 뒤바꾼 소리≫(대교출판), 장편동화 ≪얄개삼총사 1≫(사과나무) 출간. ≪소년동아일보≫에 ≪얄개삼총사≫ 연재.
1992년 장편동화 ≪얄개삼총사 2≫(사과나무), 장편동화 ≪얄개삼총사 3≫(사과나무), 그림동화집 ≪다람쥐 루루의 모험≫(대연), 그림동화집 ≪아기사슴 딸랑이≫(대연) 출간. ≪새벗문학회 연간집≫에 단편동화 <토토와 휘파람새> 수록.
1995년 단편동화집 ≪까까머리 왕자님≫(문공사) 출간.
1996년 단편동화집 ≪빨간 벙어리장갑≫(성은미디어) 출간. ≪남기고 싶은 내 동화 5≫(교학사)에 단편동화 <산새들이 만든 이불> 수록.
1997년 그림동화집 ≪동물마을의 성탄절≫(아이런), 토토와 나비≫(아이런), ≪해바리기 부채≫(아이런), ≪아기도깨비 루루≫(아이런), ≪우리 모두 일등≫(아이런) 출간.
1999년 ≪새벗≫에 ≪은빛늑대≫ 연재.
2000년 장편동화 ≪은빛늑대≫(새벗) 출간.
2004년 단편동화 ≪가위바위보≫(아동문예) 수록.
2005년 동시집 ≪본오풀꽃들의 사랑방법≫(예당) 출간.
2006년 ≪아동문예≫에 중편동화 <배트콩의 첫사랑> 수록.
2007년 ≪시와 동화≫에 ≪눈자니마을의 동화≫, ≪월간문학≫에 단편동화 <약속> 수록.
2008년 장편동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만남≫(아동문예) 출간.
2009년 장편동화 ≪눈자니마을의 동화≫(홍진P&M) 출간. 장편동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만남≫으로 톨스토이문학대전 아동문학부분 대상 수상.
2010년 ≪눈자니마을의 동화≫로 제10회 천등아동문학상, 제32회 한국동화문학상, 단편소설 <P교장의 연어 되기>로 교원문학상 수상. ≪아동문예≫에 단편동화 <뱃고동 소리>, ≪열린아동문학≫에 단편동화 <워낭소리>, ≪문학미디어≫에 단편동화 <종소리> 수록. 단편동화집 ≪훌쩍이의 첫사랑≫(도서출판 가문비) 출간.
2011년 ≪새싹문학≫에 단편동화 <형사 연습> 수록.
2012년 ≪아동문학평론≫에 단편동화 <짜장면> 수록. ≪아동문예≫에 ≪어느 날 그 애가 왔다≫ 연재 및 출간, 제9회 한국문협작가상 수상.

해설 - 김현숙
아동문학 평론가이며 동화작가다. 1962년 전남 나주에서 출생했다.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95년 ≪아동문학평론≫지를 통해 아동문학 평론가로 등단했다. 199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당선했다.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등에서 아동문학론을 강의하고 있다. 아동문학 관련 주요 저서로는 평론집 ≪두 코드를 가진 문학 읽기≫와 저학년 장편동화 ≪여우들의 맛있는 요리 학교≫ 등이 있다.

<류근원 동화선집> 저자 소개

류근원 작품 총 3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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