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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규

    서석규 프로필

  • 국적 대한민국
  • 출생 1933년
  • 경력 주간과학 편집담당 임원
  • 데뷔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장날` 당선
  • 수상 1960년 독립신문기념 언론상 지역사회부문
    1993년 박홍근아동문학상

2015.02.04.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서석규
내가 태어나던 때
나는 1933년 봄에 금산(錦山)군 복수(福壽)면 다복(多福)리 월곡(月谷) 마을에서 태어났다. 여덟 가구가 사는 외딴 산골 마을이었다. 남쪽으로 긴 골짜기 동편 비탈길을 걸어 산모롱이를 돌아 나가면 금성천을 만나고, 황소 몸집보다 큰 네 개의 돌다리를 건너면 새로 열린 신작로가 있었다. 마을에서 시오 리 마전장에 가려면 소 등에 길마를 지워 앞산 재를 넘어야 했다. 일제 강점기 수탈의 마수가 시골구석까지 시퍼렇게 번뜩이던 때였다. 마을 어귀에 순사나 양복쟁이가 나타나면 마을은 긴장했다. 그밖에는 늘 한가롭고 평온했다.
마을에는 서당이 있었다. 여름이면 인근 마을 10여 명의 젊은이들이 서당에서 글 읽는 소리가 매미 소리와 어울려 온 동네를 덮었다. 이따금 여운이 남는 장닭의 우렁찬 울음이 온 마을에 울려 퍼진다. 누구네 닭 울음인지 다 안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새벽에 일어나 우물에 가서 세수를 하고 사랑방 할아버지께 아침 문안을 드리고 천자문을 펴고 읽던 일부터 시작한다. 글 읽으러 가기 싫다고 칭얼대면 어머니께서 무명 행주치마로 내 몸을 꼭 감싸면서 ‘장하다’며 다독여 주었는데, 그때의 어머니 향기도 남아 있다. 말을 배우면서부터 사랑방에 가서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천자문을 배웠다고 했다. 이렇게 시작한 글공부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9살)에 ≪천자문≫을 떼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틈나는 대로 할아버지 앞에 나아가 글을 읽었다. ≪계몽편≫ 과 ≪명심보감≫을 떼었다. 읽고 외우고 먹을 갈아 모두 외워 쓰면 시루떡을 만들어 동네에 돌리는 책거리를 했다. 할아버지 친구들이 찾아오면 칭찬해 주셨다. 근동에 신동이란 말이 펴졌고, 때로는 신동을 만난다고 말을 타고 찾아온 사람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나의 첫 스승이었다.

궁벽한 산골을 찾은 내력

내가 태어날 때 우리 가족은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큰어머니, 아버지, 어머니, 고모 한 분이었다. 큰아버지께는 후사(後嗣)가 없었다. 5대 장손인 나는 집안의 희망이며 보물이었다. 할아버지와 온 가족의 관심과 정성이 유별났다. 귀한 아기를 조용한 곳에서 기르고자 옥천에서 먼저 이사한 대고모댁 아기의 참사가 있은 뒤여서 잠시라도 위험한 데는 얼씬대지 못했다. 어른들 시야에서 벗어나면 증조할머니와 할머니가 나를 부르며 온 마을을 찾아 헤매셨다. 위험한 데 갈까 봐 항상 따라다니다시피 하셨다.
마을에는 내 또래 동무가 셋 있었다. 글을 읽다가 밖에서 왁자지껄한 아이들 소리가 들리면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으나 속으로 울음을 참으며 글을 읽었다. 그럴 때 두 살 아래 내 동생은 할아버지 눈치를 살피다가 책을 덮고 후닥닥 사랑방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나중에 종아리를 걷고 매를 맞아도 뛰쳐나가고 보는 동생의 용기를 부러워하면서도 한 번도 결행하지 못했다. ‘귀한 손자 절간의 중 만들 작정이냐?’는 할머니 말씀 때문에 할아버지의 언성이 높아지신 적이 있었다.
마을의 원로 네 분은 영동에서 내 고조부의 제자들로서 10년 전에 이 마을로 이사한 내 조부를 존경하였으며 여덟 가구 모두가 친형제 간 못지않게 화목하게 살았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전통을 가꾸기 위해 힘을 기울이던 네 분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은 없었다.
서당의 젊은이들은 글 읽는 틈틈이 활쏘기를 하고 산을 오르고 천렵하는 행사도 했다. 서당 뒤에는 대숲을 가꾸었고 개울가는 감나무, 대추나무, 배나무가 뒤덮어 여름에 가장 시원한 곳이었다. 서당 앞 작은 꽃동산에는 산에서 주워다 놓은 괴석들 둘레에 매화나무, 백일홍(배롱나무꽃), 수국 등 귀한 꽃들이 피었다.
명절이면 풍물놀이, 대보름날 달불놀이(달집태우기), 겨울철 매사냥…. 농사철 이외에는 늘 아이들도 모두 참가하는 신나는 놀이가 있었다. 철따라 연날리기, 제기차기, 팽이치기, 썰매 타기, 피라미 낚시, 새덫 놓기, 가재 잡기, 참꽃 꺾기 등 아이들도 해 가는 줄 모르는 놀이가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복사꽃 필 무렵, 고초골 실개천 가에서 인근 마을 친구들까지 불러 시회(詩會)를 열었다. 초등학교 입학 전해, 그게 마지막 시회였던 것 같다. 움푹 파인 커다란 벼루에 쬐그만 내가 먹을 갈 때, 둘러앉은 노인들이 칭찬해 주시던 그날 정경이 희미한 그림으로 뇌리에 새겨져 있다.
고향 마을은 내게 책을 가까이하고 전통을 존중하는 삶의 기본을 가르쳐 주었다. 그 작은 마을에서 갖가지 전통 문화를 체험하며 익힐 수 있었던 것은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나의 첫 스승 할아버지

당시 초등학교는 입학시험을 보았다. 1941년 봄 시험 보는 날, 아홉 살이던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학교에 갔다. 시험은 공깃돌 몇 개 놓고 개수를 세어 보라거나 누구랑 함께 왔느냐는 등 간단한 물음이었다. 내 차례가 되자 선생님들이 내 주변으로 모여 수군거렸다. 선생님 한 분이 신문(일본어 신문)을 내놓더니 글자를 짚으며 읽어 보라고 하셨다. 모두 다 읽었는데 한 글자를 읽지 못했다. 献(헌) 자였다. 낯선 글자였다. 집에 돌아와 할아버지께서 드릴 헌(獻) 자를 일본사람들이 쉽게 고쳐 만든 글자라고 가르쳐 주셨다. 지금까지도 헌(獻) 자만 보면 문득 그때가 떠오른다.

내가 최초로 동화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께서 사다 주신 동화책을 보았을 때다. 노랑이 깔린 베이지색 바탕에 자잘한 연속 꽃무늬 표지의 2학년을 위한 ≪이야기 교실≫이었다. 일본어 동화책이었다.
4학년 때였던가? 가끔 학교에서 주는 ≪소국민(少國民)≫이라는 어린이잡지와 어린이신문이 있었다. 어느 날 첫 면이 온통 근엄한 얼굴들로 가득 찬 신문이 있었다. 새 총리대신과 조선총독 등이었다. 그 사진을 오려서 내 책상 위에 놓고 밖에 나갔었다. 놀다가 들어오자마자 할아버지께서 부르셨다. 사랑방 앞에 가서 고했더니 ‘당장 네 책상 위에 오려 놓은 화상들을 가지고 들어오너라’는 것이었다. 평소의 자상한 음성과 달리 노한 기색이 잔뜩 묻어 있었다. 무슨 말씀이 떨어질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사진을 할아버지 앞에 내놓고 앉았다. 묵묵히 사진을 뚫어지게 보시던 할아버지의 거친 음성이 벼락 치듯 내리꽂혔다.
“이놈아! 이 화상들이 네 애비냐, 할애비냐?”
그리고 긴 장죽의 대꼬바리로 사진을 치기 시작하셨다.
“그래! 이 화상들이 네 애비냐, 할애비냐? 네 편 내 편도 모르는 너 같은 놈을 믿고 어떻게 내가 눈을 감겠느냐”고 하시며 사진들을 내리치셨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그저 떨고만 있었다. 사진이 실린 신문지는 너덜너덜 다 부스러져 있었다.
얼마가 지난 뒤 ‘후유’ 하고 한숨을 쉬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네 잘못은 아니다. 네게 가르치지 못한 내 잘못이 크구나” 하시며 숨을 고르셨다.
그 뒤로 매일 아침 일찍 사랑방에 가서 우리 역사를 배웠다. 순 한문으로 된 굵은 글자의 책 끝 부분에 우리 역사가 간략하게 나와 있는 책이었다. 기자조선, 신라 등 나라 이름이 등장하는 책이었다. 그 부분 책장을 펴 놓은 채 할아버지 말씀을 들었으나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일본과 조선은 다르다는 것과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선 안 된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리고 일본인 선생이 조금씩 낯설어졌다.

꼬마 한글 선생

1945년 8·15 해방(광복)이 되던 날. 면사무소 호적서기였던 대고모 댁 아저씨가 해방 소식을 가지고 오셨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마을 복판 창호네 감나무 아래로 모였다. 어른들은 모깃불을 피워 놓고 밤이 이슥할 때까지 많은 말씀을 나누셨다. 해방의 의미를 모르는 아이들이 일본식으로 개명한 ‘에하라’니 ‘쿠니모토’니 하는 일본 성으로 부르다 ‘불호령’을 맞았다.
“멍청한 놈들아. 이제 지긋지긋한 왜놈들이 쫓겨 가고 우리나라가 독립된 거야. 일본 말이 징그럽지도 않냐?” 어른들의 꾸중이 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아이들 입에서는 한동안 일본 이름이 곧잘 튀어나왔다.
해방 다음 날이었던가? 그다음 날이었던가? 마을 청년들은 학교에서 무슨 모임이 있다고 떼를 지어 몰려갔다. 도끼와 톱을 들고 학교로 갔다. 좀 늦게 학교에 가 보니 사람들이 무척 많이 모여 있었다. 집회가 막 끝난 것 같았다. 사람들은 교장 관사 앞 우물가에 있던 벚나무와 동편 운동장 가에 있던 벚나무로 달려가 도끼로 찍어 대기 시작했다. 벚나무가 쓰러지자 함성이 올랐다. 운동장 가의 다른 한 나무는 밑동이 매우 굵어 쉽게 넘어지지 않았다. 쓰러뜨리지 못한 채 놔두고 사람들은 면사무소와 주재소로 몰려갔다. 거기에도 벚나무가 두 그루씩 있었다.
그 뒤 한두 달이 지나서였던가? 학교가 열렸다. 4학년 이상만 강당에 모였다. 교실 두 칸의 가운데를 막았던 칸막이 문짝을 떼어 내고 임시로 강당을 만들었다. 졸업식이나 학예회 같은 큰 행사를 할 때 터서 쓰던 교실이었다. 학교 선생님은 여섯 분이었으나 일본인 두 분이 떠나고, 한국인 가운데 한 분은 무슨 사정이 있었던지 세 분만 학교에 나오셨다. 선생님 세 분 가운데 한글을 아는 분이 한 분도 안 계셨다. 내가 두 개를 포개어 높인 교단에 올라가 칠판에 글자를 쓰면서 한글을 가르쳤다.
선생님들 세 분은 교실 뒤에 서서 듣고 계셨다. 그중 한 분은 해방되기 몇 달 전 징병검사장에서 ‘천황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도록 갑종 합격을 시켜 주십시오. 아니면 배를 가르고 죽겠습니다’고 외쳤다며 아침 전교조회시간에 일본인 교장이 치켜세웠던 분이었다. 5학년 때였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익혔다. 어머니가 밤에 마을 아주머니들에게 가르치던 ‘기역 니은…’, ‘아야 어여…’, ‘가 자에 기역 하면 각 하고…’ 하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익혔다. 어머니는 부엌일 외에 해마다 목화 따서 실 뽑아 베 날고, 누에 쳐서 명주실 뽑고…. 밤늦게까지 베틀에서 베를 짜고 다시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를 위해 얘기책을 읽어 드리는 등 잠시도 편히 앉아 있을 틈이 없었다. 고단한 어머니를 위해 얘기책은 내가 읽어 드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어깨너머로 한글을 터득했다. ≪심청전≫, ≪장화홍련전≫, ≪유충렬전≫… 등 얄팍한 책이었다. 띄어쓰기 없이 붙여 내려간 문장에 된시옷이나 아래아 자가 있던 책이었다. ‘언문책’이라고 했다. 매일 밤 한두 장씩 읽어 드렸다. 같은 책을 여러 차례 들으신 증조할머니와 할머니께서는 ‘얘야, 거기는 ○○○라고 돼 있는 거 아니냐?’고 바로잡아 주셨다.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듣고도 다시 듣고 싶어 하셨다. 대신 나도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를 졸라 ‘옛날이야기’를 듣고 또 다시 듣곤 했다.

나를 변화시킨 스승과 세상

해방 다음다음 해인 1947년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사범학교는 6년제였는데 이때 학제 변경으로 중학교 과정은 부설중학교로, 고교 과정은 사범학교로 학제가 바뀌었다. 특차 모집이었던 사범학교는 경쟁률이 12대 1이 넘었다. 각처에서 모인 수재들이라고 했다. 책 읽는 친구들이 몇 있었다. 서로 빌리고 빌려 주며 소설책을 주로 읽었다. 두꺼운 책도 하루 아니면 이틀에 다 읽었다. 어려운 책도 읽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건성으로 넘기는 부분도 많았다. 겉멋이 들어 어느 것이나 닥치는 대로 뒤적이는 동안 차츰 이해하는 힘이 생겼다. 어느 날 교양잡지 ≪신천지(新天地)≫를 읽고 있는데 선배 한 분이 불러냈다. ‘문예반’원이 되어 함께 책을 읽자고 했다. 어떤 선배는 ‘독서회’에 나와 함께 읽자고 했다. 문예반에서는 주로 읽은 책에 대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연극 연습도 했다. 대전방송국에 가서 라디오 단막극을 공연할 때 아역을 맡아 겨우 한두 마디 한 것이 시골뜨기에겐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선생님 가운데는 매우 어려운 것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몇 분들은 곧 대학으로 가셨다.

부설중학 3학년 때 국어의 김석규(金錫奎) 선생은 가끔 동화를 읽어 주셨다. 동화를 써 보라고도 하셨다. 어쩐 영문인지, 자주 “서석규는 천재야!” 하며 칭찬해 주셨다. 그때 친구들이 붙인 ‘천재’라는 별명이 늘 부끄러웠다. 최근에도 어떤 친구가 ‘그때, 왜 천재라며 그리도 치켜세웠느냐?’고 물었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분은 부임 1년도 안 돼 학교를 떠나셨다. 뒤에 듣자니 서울에서 신학교를 거쳐 목사가 되었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셨다는 것이다. 한때 라디오 방송드라마도 쓰셨다고 들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한 아동문학 사료에서 194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동시 1석에 김석규(金錫奎)의 <봄>이라는 기록을 보았다. 바로 그분인지 여부를 알고 싶었으나 이미 해외에서 고인이 되셨다고 했다. 호기심 많은 산골 소년의 머릿속에 ‘동화’의 향기를 살짝 뿌려 주고 가신 분이었다.

6·25전란이 터지자 할아버지의 ‘당장 시골로 오라’는 불호령이 인편을 통해 내려졌다. 책 한 짐 달랑 지고 부모님에 앞서 혼자서 50리 산길을 걸어서 고향 마을로 갔다. ‘난세에는 경거망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할아버지 말씀 따라 아침을 먹고선 흰 바지저고리에 지게를 지고 마을 뒤 후미진 산속으로 갔다. 나무꾼이 되어 잡목의 가지와 풀 따위를 베어 말렸다. 어둠이 깔린 뒤 나뭇짐을 지고 마을로 돌아왔다. 누룽지나 주먹밥 하나로 점심을 때우고 개울물을 마시며 후미진 그늘에서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었다. 짊어지고 간 몇 권의 시집과 소설집과 창간호부터 갖춘 월간 ≪문예≫를 닳아 빠지도록 읽고 또 읽었다. 남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 일거리를 만들었다. 버려진 괘종시계의 태엽을 숫돌에 갈고 또 갈아 작은 조각칼을 몇 개 만들었다. 그것으로 도장을 팠다. 참꽃(진달래) 뿌리는 결이 부드러워 조각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나무꾼들의 낫에 베이고 또 베어져 위로 자라지 못해 밑동만 두둑하게 뭉쳐진 뿌리였다. 제법 넓적한 평면이 나왔으나 손잡이가 짧았다. 이것저것 글자나 그림을 새겼다. 도장도 여러 개 파 봤다.

수복 후 대전 집에 들렀다. 비워 놓고 간 집 안은 엉망이었다. 피란민들이 들어와 살면서 책상이나 옷장의 서랍 따위를 빼다가 아궁이에 쳐 넣었고 두고 갔던 책이나 공책들도 모두 불쏘시개가 되어 흔적도 없었다. 마당이 질퍽거렸던지 지붕의 슬레이트는 마당에 내려와 깨져 있었다. 지붕 한쪽에 포탄 파편이 떨어져 구멍이 나 있었다. 집이 전소되지 않은 것만이 다행이었다.
가을에 개학이 되었으나 피란 때 한동안 습한 땅굴 속에서 보내다 얻은 늑막염으로 좀 늦게 복교했다. 난을 피하고 돌아와 복교하는 학생들이 띄엄띄엄 나타났다. 누구는 어디 어떤 전선에서 죽었고, 누구는 어떻게 잡혀서 총살을 당했고…. 흉흉한 교우들의 소식에 가슴이 아팠다. 군복에 권총을 차고 나타난 친구도 있었다. 학교 뒤 산비탈 양지쪽에 가마니를 뜯어 바람을 막은 노천 교실에서 공부했다. 봄여름 내내 폭격으로 흔적 없이 사라진 학교 빈터에 흙벽돌을 찍어 교실을 짓고 공부했다.

이때 문예반을 맡은 한성기(韓性祺) 선생님은 월간 ≪문예≫에서 추천을 마친 시인이었다. 시에 열중한 선생님의 국어 시간은 교과서를 읽다간 곧잘 문학 강의로 돌변했다. 문학에 대한 끓어오르는 정열을 주체할 수 없어 언성을 높이며 땀을 뻘뻘 흘리셨다. 스스로 도취되었던 ‘명작에서 얻은 감동’을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전하고자 열을 올리셨다. 선생님의 열정과는 달리 흥미를 갖는 학생이 적었다. 학교가 파하고 돌아갈 때 선생님은 더러 ‘서 군, 나랑 함께 가자’고 하셨다. 댁으로 가서 일대일 강의를 듣는 것이다. 술상을 놓고 내게도 한 잔씩 먹이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그 말씀에 대꾸라도 해야 하므로 읽으라는 책을 읽지 않고는 못 배겼다. 선생님 댁에서 새벽까지 마주 앉아 대작을 하며 문학 얘기를 들었다. 이튿날 한 상에서 아침을 먹고 ‘누가 볼까 봐’ 선생님보다 한 발 앞서 학교로 갔다. 시를 쓰다가 자주 퇴짜를 맞고 소설에 열중했다. 지역신문에 내 수필이 실렸다. 선생님과 함께 ≪대사(大師)≫라는 교지를 만들었다. 원고가 인쇄를 거쳐 책이 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이때 체험은 뒷날 나를 인쇄잉크 냄새 맡는 일터에 빠지게 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발령을 받았다. 의무 복무 기간 때문에 대학 진학이 좌절된 내게 담임선생은 도의 학무과장이 대학 친구라며 ‘시골 연구학교에서 당장 일할 졸업생 하나 추천해 달래서 널 추천했다. 내년에 시내로 발령 내 준댔으니 열심히 하고 내년에 대전에서 만나자’고 격려하셨다. 홍성(洪城) 장곡(長谷)에 있는 농촌중심연구지정학교였다. 학교장은 도의 과장과 처남 매부 사이였다. 배운 대로 꿈꾸던 대로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전선의 총성이 멈추던 1953년이었다. 휴일이면 대전으로 나가 책 몇 권 사 들고 돌아오거나 인근 바닷가나 두메 학교에 가 있는 친구를 만나 낯선 주막에서 술을 마시곤 했다. 새내기 교사에게 학급담임 외에 가을 연구발표 과제와 회계업무까지 맡겼으나 보람으로 알고 꾀부리지 않았다. 그래도 틈틈이 빈 교실에서 조용히 책 읽을 시간은 있었다. 1년 뒤 도내 교사의 이동 발령이 났다. 대전시로 들어간 동기들 일고여덟 명의 이름 가운데 내 이름이 없었다. 앞뒤 돌아볼 겨를 없이 사표를 냈다. 담임선생님이 더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 ××를 친구로 믿은 내가 잘못이었다. 너한테 참으로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 뒤에도 만날 때마다 ‘야아, 그땐 미안했어’란 말씀을 빼놓지 않으셨다. 대전 전입의 특혜를 입은 친구들에게 일일이 확인했다. 모두가 도의 누구누구, 중앙의 누구 등 굵거나 질긴 줄이 있었다. 이 사건은 뒤에 내가 신문기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공주사범대학 국어국문학과로 입학했다가 빈자리가 생긴 충남대학교 화학과로 끼어 들어갔다. 대전의 문인 모임에 막내로 참여할 때부터 ‘멋진 시인’으로 통하던 이희철(李禧哲) 형을 매일 만난다는 게 무엇보다 큰 즐거움이었다. 그는 나보다 두 학년 위 국문과 학생이었다. 치밀한 관조(觀照)의 힘과 섬세한 감각이 빚는 향기 짙은 그의 시를 한성기 선생이 무척 좋아하셨다. 대학에 들어가던 날부터 늘 함께 다니다시피 했다. 가끔 ‘형제 간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는 곧 문학지의 추천을 마친 시인이 되었다. 대학 문학 서클의 수장 격인 그는 ‘문학의 밤’ 등 학교와 지역 문학 행사의 중심인물이었다. 둘은 이 핑계 저 핑계로 자주 술을 마셨다. 화제는 주로 그 달에 나온 문학지의 작품에 관한 것들이거나 흔한 젊은이들의 고뇌 따위였다. 우리는 빌려 온 ‘판’(명곡 레코드)을 들고 다방을 쏘다니기도 했다.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부탁하는 곡을 틀어 주는 다방이 우리들의 단골이었다. 대학신문 편집 팀에 끼어 가끔 원고 보따리를 싸 들고 서울 인쇄소를 찾았다.

이 무렵 나의 하루는 대개 저녁을 먹고 일찍 잠을 자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자정 무렵에 일어나 새벽까지 산 쪽으로 창문이 난 ‘아주 작은 골방’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그대로 세수를 하고 학교에 가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한밤중에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맛에 흠뻑 빠졌다. 부족한 일본어 공부를 겸해서 일어판 세계문학전집을 읽었다. 반년 이상 계속된 즐거운 새벽 시간은 ‘환자 몰골이 된 겉모습’ 때문에 더 지속할 수가 없었다. 얼굴은 핏기 없이 하얗게 바래 있었고, 뼈만 앙상한 송장 같은 몰골을 어른들이 더 이상 그냥 두지 않으셨다. 1955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동화 <장날>도 이 무렵에 마무리된 작품이었다.

신춘문예 당선 이후

1955년 1월 초 한국일보사에서 신춘문예 당선자에 대한 시상식이 있었다. 그해 대전에서 등단한 사람이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이었다. ≪중도일보≫ 편집국장 추식(秋湜) 선생은 ≪현대문학≫(1월 호)의 소설 2회 추천을 마쳤고, 취재부장 임희재(任熙宰) 선생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이 당선되었다. 열 살 이상 연상인 두 분은 내게 집안의 아저씨 같고 때로는 형과 같았다. 대전의 ‘호서문학(湖西文學)’과 ‘문협 대전지부’ 동인이었고, 객원기자로 들랑거리며 가까워진 분들이었다. 글 쓰는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시상식 때 심사를 해 주신 강소천 선생께 인사드리고자 종로 ‘새벗사’로 찾아갔다. 무척 반갑게 맞아 주셨다. “≪조선일보≫ 동화 심사도 했는데, 뽑고 보니 이름은 다른데 원고지나 글씨가 ≪한국일보≫ 당선자와 똑같아서 제쳐 놓았죠. 거기도 낸 거 맞지요?” 하고 물으셨다. 필명으로 낸 것이 들통 난 것이다. 그날로 문인들이 모이는 명동의 ‘문예살롱’ 다방으로 데리고 가 주셨다. 거기 나와 있는 여러 문인들에게 ‘이번 ≪한국일보≫ 동화 당선자’라고 소개해 주셨다.
신춘문예 당선으로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원고 청탁이 오는 것도 아니고 크게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대학 문학 서클 선·후배의 부러움을 샀다. 추식 선생과 임희재 선생이 있는 중도일보사에 들르는 횟수가 잦아졌다. 중도일보사 객원기자가 되었다. 그래도 강의는 열심히 나갔다. 문학 서클 활동에도 빠지지 않았다. 관청의 높은 분이 베푸는 술자리에도 더러 끼었다. 추 선생과 임 선생 두 분 다 술이 약했다. 내 술은 어찌된 영문인지 바닥이 없는 ‘말술’이었다. 그때 술 마시는 사람들의 핑계는 주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기왕이면 먹고 죽자’는 거였다. 청탁(淸濁)을 가리지 않던 시절에 술을 배웠다. 그러나 많이 마셔도 결코 주사는 없었다.
대전의 문학인들이 모두 모인 이해 여름 ‘문학의 밤’ 행사에서 발표한 내 단편소설 <까치>는 지도교수와 문우들의 호평을 받았다. 한성기 선생과 추식 선생도 자리를 함께해 격려해 주셨다. 대학신문 한 면 가득 그 소설이 실렸다. 비로소 작가가 된 기분이었다. 동화는 먼 서울에서 강소천 선생이 챙겨 주시지 않았으면 그대로 잊힐 지경이었다. 시골의 신인에게 원고 청탁이 올 리도 없고 지방에 동화를 발표할 지면도 없었다. 감히 작품집을 낸다는 생각도 못 했다. 소설이 주목받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같은 시기에 함께 등단한 세 사람은 1년 내내 ‘대전 탈출’을 모색하다가 1년 만에 뜻을 이루었다. 추 선생과 임 선생은 이런 저런 연줄로 서울에 직장을 알아보고 있었다. 나도 덩달아 마음이 들떴다. 때마침 작은 건설업체를 운영하던 아버지의 사업 부진도 내 등을 떠밀었다. 1956년 1월 6일, 세 사람은 함께 서울행 기차를 탔다. 청진동 골목의 여관방 하나에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추 선생은 ≪동양통신≫ 사회부장(뒤에 ≪연합신문≫ 문화부장으로 옮김)으로 자리를 잡았다. 임 선생은 월간잡지 ≪여성계≫의 주간 자리를 갖게 되었다. 두 분이 각각 자기와 일하자고 나를 끌었다. 임 선생이 나와 함께 가지 않으면 자기도 갈 수가 없다며 완강했다. 결국 임 선생을 따라가 ≪여성계≫ 편집을 맡았다. 생소한 잡지 편집을 해낼 것 같지 않아 강소천 선생을 찾아가 상의했다. 기술적으로 어려울 게 없다면서 모든 걸 다 도와 주시겠다고 했다. 하루가 멀다시피 강 선생을 찾아가 꼼꼼하게 일을 배웠다. 3개월쯤 지나니 일이 손에 익었다. 선생님은 퇴근길에 곧잘 을지로 어귀에 있던 ≪여성계≫ 편집실 아래 ‘녹원’ 다방에서 불러 주셨다. 선생님이 읽고 난 아동문학 관련 일본서적을 갖다 주시면서 읽어 보라고 하실 때도 있었다. ≪새벗≫에 실린 동화나 동시 얘기도 해 주셨다. 주로 선생님 말씀을 들었다. 문인들이 모이는 ‘문예살롱’으로 불러 주실 때도 있었다. 내가 직접 ‘새벗사’로 가기도 했다. 새벗사 사무실 아래 ‘시온’ 다방에 가면 선생님을 찾아온 김동리, 황순원, 박목월… 선생을 가끔 만났다. ‘사무실 가면 담배를 못 피워서…’ 하며 이분들은 주로 다방에서 기다렸다. 어른들의 치기 어린 한담을 곁에서 들으면서 선비들의 청유(淸遊)를 보았다.

당시 보건사회부가 을지로 네거리에 있었다. 강 선생은 어린이헌장 제정을 위해 보사부에 가실 때나 다녀 나오실 때 곧잘 녹원다방에 들러 불러 주셨다. 항상 끼고 다니시는 책보에서 메모 노트를 꺼내 놓고 설명해 주시곤 했다. 어린이헌장의 초안부터 문안의 변천 그리고 추진 과정에 관해서 여러 차례 말씀을 들었다. 주무 담당부서였던 보사부 부녀국 아동과를 거쳐 국장까지 올라가는 동안 몇 차례 들르셨다. 당시 이예행(李禮行) 부녀국장은 뒤에 숙명여고 교장을 맡았던 온건한 여성 지도자였다. 이 국장의 결재와 추진 의지를 확인한 날 다방에 들르셨다. “됐어요. 지금 부녀국장 만나고 오는 길인데, 어린이헌장이 곧 확정될 거라고 했어요” 하며 좋아하시던 강 선생의 환한 웃음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강소천 선생과 어린이 신문과 아동문학연구회와….

1958년 연합신문사 문화부로 일자리를 옮겼다. 피폐했던 경제와 사회가 조금씩 안정을 찾으면서 신문 지면이 계속 늘어났다. 조간과 석간을 함께 내고 면수도 크게 늘었다. 신문사마다 새로운 지면 편성을 위해 머리를 짜내고 있을 때였다. 나는 ‘조간 한 면을 어린이 신문’으로 내자고 했다. 광고 없는 전면을 매일 누가 무엇으로 채울 것이냐며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부장이셨던 추 선생은 내 능력을 믿어 주셨다. 내 알량한 과학 지식도 한몫해서 ≪어린이 연합≫이라는 머리띠를 두른 국내 처음인 ‘일간 어린이 신문’을 내게 됐다.
이때 강소천 선생이 옆에서 힘껏 밀어 주셨다. “서 선생, 이런 일 한번 해 보면 어떨까?” 하시며 귀한 정보와 기획거리를 내놓으시곤 했다. 뒤에 국민운동으로 번진 도시 어린이와 두메나 외딴섬 어린이의 결연인 ‘어깨동무학교’ 운동도 그 실마리를 풀어 주셨다. ‘어깨동무학교 노래’를 작사해 작곡까지 의뢰해서 만들어 주셨다. 그 악보를 주시면서 “이 노래가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도록 해야 한다”고 격려해 주셨다. 지금도 가끔 선생님과 함께 부르던 ‘거리에서 두메에서 외딴섬에서, 부르네 대답하네 어깨동무들…’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서울 어린이들과 함께 파도를 가르며 서해 외딴섬을 찾아가는 어선에서 어깨동무학교 노래를 함께 부르며 기뻐하시던 선생님 모습이 다가온다. ≪어린이 연합≫은 신문 제호가 ≪서울일일신문≫으로 바뀌고서도 계속 냈다. 매일 아침 보급부장의 ‘대단히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신문 두 부를 보는 가정이 계속 늘어난다고 했다. 우리 어린이들이 얼마나 읽을거리에 굶주리고 있는지, 그리고 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의 읽을거리에 관심이 높아 가고 있는지 분위기를 확인하며 힘든 나날을 즐겁게 보냈다.

강소천 선생은 아동문학 연구단체를 만들고자 1959년부터 골몰했다. 아직 풋내기인 내 의견을 꼭 듣고 싶어 하셨다. 처음에는 아동문학가와 초등학교 교사들이 함께 하는 연구단체를 구상했다. 최태호, 박창해, 박목월 선생과 의논 끝에 교사 참여는 보류됐다. 1960년 11월 20일 ‘한국아동문학연구회’ 이름으로 발족했다.
‘아동문학과 교육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모여 어린이 세계의 탐구와 더불어 그들이 지녀야 할 참모습을 문학과 행동으로 구현하고자 창작, 지도, 평론 부면에 활동할 것이며 어린이의 인간 형성을 돕는 인생과 사회의 교사가 될 것을 희구하며 일제의 질곡 아래에서도 민족의 자주독립을 믿던 소파 방정환 선생의 아동문화운동을 다시 상기하며, 아직 역사 오래지 않은 아동문학과 전문적인 활동에만 의존할 수 없는 아동문화의 사회실정에 비추어 많은 동지들이 의욕을 함께하여 힘차게 꾸준히 정진한다’는 요지의 설립 취지를 내걸었다. 연구회는 회장에 강소천, 부회장 겸 평론분과 상임에 최태호, 창작분과 상임과 지도분과 상임에 박목월, 총무에 서석규로 임원을 구성하고 그해 말에 제1회 월례회를 예술원 회의실에서 열었다. 최태호 선생이 예술원 사무국장 일을 보실 때였다. 월례회에서는 동시 창작이나 동화 창작에 대한 발표와 토론, 회원 작품의 합평을 했다. 1월에는 각 신문사 신춘문예 당선작들에 대한 작품별 합평회를 가졌다. 매달 열리는 연구회에서는 수시 따로 주제를 정해 연구 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회원 작품집을 내고자 작품을 수집했고 1960년 말에는 어깨동무학교 운동에 회원들의 작품을 비롯한 도서 350여 권을 기탁했다.
아동문학연구 단체가 소파 선생의 어린이 문화운동 정신을 이어 참여하고자 나선 것은 나의 ‘어깨동무학교’ 운동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 운동은 도시와 농촌의 자매결연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나의 ‘어린이 문화운동’에 대한 집착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런 일 저런 일로 선생님과 자주 만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토요일 오후 청파동 댁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밤늦도록 말씀을 들은 적도 있다. “서 선생은 술이 있어야 더 오래 함께 있을 수 있다”면서 술을 사 오라고 사모님께 일렀다.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하시는 선생님은 내가 아무리 사양해도 막무가내로 술을 권하셨다. 2층 서재에서 이야기하는 동안 접시를 가져다 재떨이로 하라면서 담배를 피우도록 하셨다. 철딱서니 없게도 선생님이 권하시는 대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선생님 돌아가신 뒤 언젠가 사모님의 “그때 서 선생 다녀가면 2∼3일 동안 창문 열어 놓고 담배 냄새 빠질 때까지 2층엘 못 올라가셨다”는 말씀을 듣고 가슴이 메었다.

5·16군사정변 뒤 ≪서울일일신문≫이 폐간되자 경향신문사 문화부로 옮겼다. 어깨동무학교 운동에서 확인한 두메와 외딴섬의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고생하는 ‘외로운 교육자’들이 늘 눈에 밟혔다. 민주당 정부의 ‘교육개혁’ 과제를 성안했던 성내운(成來運) 박사와 자주 만나 우리 교육에 관한 걱정을 하다가 그들을 격려하는 ‘경향 교육상’을 만들었다. 서류 심사 외에 반드시 ‘서석규의 현지 확인’이 있어야 한다는 심사위원들의 ‘심사 내규’에 따라 추천된 교사와 그 주변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다. 당시 두메와 외딴섬의 교통사정은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한 해 두 해 계속하는 동안 교육계의 큰 호응을 얻으며 ‘가장 권위 있는 교육상’이 되었다.

우주와 바다 이야기

1959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우주선 발사는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를 다루는 기사들이 부실했다. 나는 서울의 동북쪽 공릉동에 있던 서울 공대에 자주 들러 조선항공과의 항공 전공 교수인 위상규 박사와 한만년 박사를 만났다. 거기에는 항공 관련 잡지들도 있었다. 두 분이 귀찮게 여길 정도로 찾아가 우주와 항공에 관한 공부를 했다.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관련 기사를 살피면서 이해를 쌓았다. 우주에 관한 책들을 읽는 데 필요한 상식의 바탕이 조금은 다져졌다. 우주를 다녀온 우주비행사의 강연이나 관련 전시회도 찾아가 위 박사의 설명을 듣기도 했다.
그 무렵 과학 관련 외국 잡지는 광화문 골목의 노점상이 가장 빨랐다. 미군들이 보고 나서 표지를 떼고 버린 잡지가 여러 복잡한 경로를 거쳐 우편으로 받는 것보다 훨씬 빨리 거기 와 있었다. ‘자료 기근’에 시달릴 때 이 골목과 정부의 허가를 받아 외국 책을 수입하던 무교동과 충무로의 서점이 공부하는 기자들의 단골이었다. 구미의 과학 관련 신간들을 일본에서는 1∼2년 안에 번역해 내놓았다. 1959년에 나온 ≪21세기에서의 보고≫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소련의 과학자들이 각각 자기 분야에서 열어 줄 ‘21세기의 세계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를 예측한 책(일어 번역판)이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에서도 21세기를 예측한 책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1967년 미국에서 허만 칸의 ≪서기 2000년(The Year 2000)≫이 나오고 다음 해 이 책의 일어 번역본이 나왔다. 소련의 ≪21세기에서의 보고≫에 이어 미국의 ≪서기 2000년≫이 나올 때까지, 그리고 그 뒤에도 미래를 예측하는 책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눈에 띄는 대로 읽다가 1970년 일본 오사카 ‘엑스포 70’에서 우주 개발의 실상을 실감 있게 보니 낙후된 우리 실정이 암울하여 답답했다.

1960년대 후반, 해외의 우수과학자 유치를 적극 추진할 때였다. 국내에서는 낯선 ‘해양생물학자’ 한 분이 들어왔다. 일본 동경대학의 수재로서 국제 학술지를 통해 이름이 알려진 최상(崔相) 박사였다. 그가 국내에 들어오자 맨 처음 만나 인터뷰를 한 인연으로 그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 나는 바다에 대한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듣는 게 즐거웠다. 그는 나를 통해 국내 실정과 우리 문화를 아는 게 즐겁다고 했다. 2∼3일에 한 번씩 무교동 맥줏집에서 만나 즐거운 대화를 이어 갔다. 둘이서 만나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더러는 연구를 위해 바다에 나갈 때 함께 가기도 했다.
한·일 어업회담 때 일본 수산정책을 꿰뚫고 있는 최 박사는 우리가 대응할 자료를 만들어 농림부 수산국장을 찾아가곤 했다. 신문기자 동행이 좋겠다며 나를 끌고 갔다. 양보해서는 안 될 부분에 대한 이론과 국제적인 자료를 갖추어 가지고 갔다. 막판에 새로 바뀐 공병대령 출신 국장을 만났다. 새로운 자료를 내밀며 이야기를 꺼내려하자 그가 말했다. “…끝났습니다. 빨리 도장 찍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내일 갑니다.” 국장의 얼굴도 상기돼 있었다. 그날 최 박사와 나는 늦도록 울분을 토하며 술을 마셨다. 그는 방사선 관련 연구를 하다가 피폭되어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바다에 관한 무한한 가능성과 품고 있던 진한 한을 힘없는 내게 떠안기고….
이 무렵 매혹됐던 우주와 바다 이야기를 동화로 발효시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새마을운동과 동화문학회

1966년 직장을 서울신문사로 옮기자 고정된 담당 영역 없이 여러 분야의 특집을 꾸미는 일을 맡았다. 자유롭게 교육문제, 산업문제 등을 다루었다. 전문적이면서 쉽게 풀며 전문가들의 진단과 대책까지 싣는 시리즈였다. 첫 과제로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시험지옥에서 풀어 주고자 하는 ‘한국의 교육’을 택했다. 정부가 이를 바탕으로 교육개혁을 단행했다. 기획 시리즈 ‘명산의 새 고장’은 지방 곳곳에서 싹트는 산업의 새로운 전환에 활력을 심어 주었다. 이 기사는 그해 독립신문 기념 언론상(지역사회부문)을 받게 했다.
이 무렵 언론계의 ‘촌지’ 문제를 뿌리 뽑겠다고 대통령이 나섰다. 특히 경제부 기자들의 비행이 크게 부각된 자료를 놓고 전국의 언론사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설명했다. 그리고 ‘당신들 힘으로 스스로 정화하겠는가, 내가 직접 나설까?’를 물었다. 발행인협회 대표였던 서울신문 사장이 ‘우리 힘으로 하겠습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돌아와 숙의하던 사장과 국장단이 내놓은 방안이 ‘서석규에게 맡기는 길’이었다. 반강제로 경제부장 자리를 떠맡겼다. 어쩔 수 없이 맡았다. 생소한 현장을 확인하기 위하여 경제부처를 골고루 순환 출입하며 또 다른 세상을 확인했다.
경제기획원의 대통령 연두보고에서 싹튼 아주 작은 불씨 하나를 일으켜 ‘새마을 운동’ 바람이 번지게 하다가 그 속에 빠지고 말았다. ‘새마을 사업’을 국민운동으로 끌고 갈 방향을 잡는 시리즈를 썼다. 대통령이 국무위원들에게 매일 읽도록 했다. 관가 근처에서는 ‘새마을 교과서’라고 했다. 대전 시절부터 알던 김윤환 농협중앙회장이 만나자고 했다. 다짜고짜 ‘당신이 쓴 교과서대로 나와 함께 새마을 운동을 하자’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발령을 내놓고 공표를 해 버렸다. 신문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를 꼭 필요로 하는 곳이면 뛰어드는 내 방식’대로 생소한 곳에 불쑥 뛰어들었다. 1972년이었다. 월간 잡지 ≪새농민≫과 주간신문 ≪농협신문≫의 편집인을 겸한 홍보국장을 맡았다. 이때 농촌 어린이 잡지 ≪어린이 새농민≫을 만들어 무상으로 보급했다. 국내 어린이 잡지사들이 ‘무상 공급하는 잡지’의 발간 중지를 문공부에 건의하여 난관에 부닥쳤으나 이를 극복했다. ‘어린이 공부방’, ‘농촌의 전통문화 지키기’ 등 농촌문화사업을 농협의 새마을 운동으로 펼쳤다. 그리고 농촌 새마을 지도자 교육 때 ‘농촌의 문화사업’을 필수과목의 하나로 넣어 수원의 연수원으로 매주 강의를 다녔다.
≪어린이 새농민≫(뒤에 ≪어린이 동산≫으로 제호 바꿈) 편집은 박홍근 선생이 많이 도와주셨다. 시간에 구애 받지 않던 박 선생은 편집실의 한 식구처럼 자주 들러 도와주셨다.

서울신문 재직 중 동화는 쓰지 못하면서 ‘한국동화문학회’ 창립에 끼었다. 1968년…, 그 무렵 일하는 신문사가 광화문 근처에 있었으므로 오다가다 들르는 문우들이 가끔 있었다. 동화 쓰는 신인작가들끼리 무엇인가 변화를 찾아보자는 의욕들이 뭉쳤다. 유영희, 이관, 이주훈, 장욱순, 최인학 선생과 내가 끼어 여섯 사람이 발기인이 되어 ‘한국동화문학회’를 창립했다. ‘바빠서 안 된다는 애원’도 끝내 먹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회장 자리에 얹혔다. 발기 취지문에서 거창한 ‘동화 선언’을 했다. 1968년 10월이었다. 24명의 동화작가가 참여했다.
‘동화는 인간의 참모습을 찾는 참다운 문학이어야 한다.’ ‘빛나는 전통문화 속에서 이어 온 전래동화를 정리할 절실한 책무를 느낀다.’ ‘우리 동화가 전근대적인 구각(舊殼)에서 탈피해야 함을 엄숙히 선언한다.’ ‘우리 어린이들의 건전한 성장을 지키며 꾸준히 연구하고 토론하는 전진의 자세를 다짐한다.’ 등 ‘엄숙한 마음’으로 우리 동화의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자는 열의가 대단했다. 이 모임은 2년가량 활동하다가 흩어졌다. 두고두고 빚진 마음으로 아쉬움이 남았다.

1980년대 초 새 군부에 의해 언론계에서 쫓겨난 몇 친구들이 만드는 주간 ≪과학신문≫의 창간 멤버로 끌려 들어갔다. 과학과는 관련이 없는 사회부 출신들이 시작한 사업이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편집을 맡았다. 주변 여건이 빈약한 이때 ≪과학신문≫을 만드는 일은 험악한 ‘가시밭길’이었다. 과학자들에게는 해외의 과학을 알리고 학생이나 일반 시민들에게는 과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안내하는 신문을 만들고자 분주하게 지냈다. 신문의 성과는 대단치 않았으나 정부 쪽이나 방송 쪽의 관심은 높았다.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방송의 라디오 프로에도 나갔다. KBS에서는 처음에 인기 없는 깊은 밤에 ‘쉬운 과학이야기’를 시키더니 얼마 뒤에는 낮 시간에 매일 5분씩의 ‘서석규 칼럼’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과학 이야기 밑천이 달랑거려 전통문화 이야기로 돌려 진행했다. 동양방송에서는 몇 달 동안 ‘농촌과 농촌문화’ 이야기를 했다. 당시에는 라디오 듣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전화로 문의하거나 직접 찾아오는 사람이 가끔 나타났다.
≪과학신문≫은 적자를 내다가 몇 해 못 가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손을 털었다.

먼저 가신 내 문학의 스승님들께

나를 이끌어 주시던 잊을 수 없는 스승과 선배들은 거의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좀 더 계셨더라면…. 아쉽고 원망스러운 때도 있었다. 나의 지난날을 좀 알고 있는 동료 한 친구는 ‘독(獨) 선생’ 모신 왕자처럼 항상 선생 복이 따라다닌 행운아라며 부러워했다. 고마운 생각을 잊은 적은 없다. 그러나 한 일이 별로 없다. 머지않아 내가 그분들을 만났을 때 작더라도 내 보은(報恩)의 마음을 알아주실 일이 있었는가를 되돌아보고 후회하면서 뒤늦게 그런 이야기를 생각해 보았다.
한성기 선생은 1984년 62세로 떠나셨다. 산에 가서 병고에 무척 시달리실 때 달려가 위로드리지 못했다. 첫 시집 ≪산에서≫를 서울의 동문들과 함께 출판해 놓고 보니 대단히 빈약했다. 그럼에도 시집 발문에 내 이름을 거명하셔서 더 송구스러웠다. 추모의 마음에 울적할 때 2007년 ‘문학의 집·서울’의 도움을 통해 ‘음악이 있는 문학마당’ 기획으로 선생님을 모셨다. 생전에 매우 가까이 지내시던 김윤성 시인이 자리를 함께해 주신 가운데 제자들은 그리운 마음에 가슴이 뜨거웠었다.
강소천 선생은 1963년 49세로 떠나셨다. 다음 해 묘소 앞에 문학비를 세웠다. 박경종 선생과 함께 성금을 거두고 글씨를 부탁하러 다니고…. 제막식 때 배영사에서 낸 여섯 권의 전집을 헌정하던 날 각계각층의 뜨거운 참여에 놀랐었다. 1965년 조석기, 박종화, 김동리, 조지훈, 최태호, 박목월… 선생이 발기하여 제정한 ‘소천아동문학상’이 올해로 45회째를 맞았다. 현재 이 상의 운영위원장을 맡아 상 운영에 참여하면서 지금도 가까이 모시고 있는 기분이다. 1987년 어린이 대공원에 문학비를 세울 때 동분서주하시는 사모님을 옆에서 도우며 어렵고 힘든 고비를 넘길 때마다 신기하게 매듭이 풀리는 걸 보고 하늘 나라에서 선생님이 직접 챙겨 주시는 것 같았다.
추식 선생은 1987년 68세로 떠나셨다. 6·25전란에 찢긴 우리 사회의 밑바닥을 가장 리얼하게 쓴 소설가로 손꼽히나 일이 곧잘 꼬여 제대로 된 추모행사 한 번 못 해 늘 죄스러웠다. 최근 현대문학사에서 잘 정리된 ‘선집’을 내서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임희재 선생은 1971년 53세로 떠나셨다. 고향 금산에서 군민 공원에 문학비를 세우고 문학인들 중심으로 추모강연 등 행사를 열고 있다. 말없이 작품만 쓰던 희곡작가로, 국산영화의 격을 높인 시나리오 작가로, TV 드라마 <아씨>로 영상문화의 새 장을 연 작가로 그를 곳곳에서 주목하게 되었다. 금산에서 추진하는 임희재 문학관 건립 계획을 옆에서 조언하고 있다. 한 직장에서 일하다가 서먹하게 갈라섰던 일을 생각하면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이 그저 고맙다.
박홍근 선생은 2006년 87세로 떠나셨다. 북한 땅이 고향인 선생은 노후에 몹시 외로워하셨다. 슬하에 자녀가 없는 내외분은 세상일, 집안일을 자주 상의하셨다. 생전에 정해서 시행해 온 ‘박홍근아동문학상’도 내게 맡겨 그 운영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문학상은 집사람이 잘할 거야. 서 선생이 많이 도와줘.” 가끔 말씀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결국 전 재산을 천주교 재단에 기부하고 가톨릭 출판사에서 상을 운영하게 되기까지 여러 곡절을 겪었다. 지금도 상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되돌아보면, 홀로 남아 더욱 외로운 사모님(김미사 교수)이 노환으로 힘들어하실 때 가장 당황스러웠다. 홍테오필라 수녀님, 이정옥 선생(이원수 선생 따님), 한윤이 선생(아동문학가) 세 분의 친따님보다 더 진한 희생적인 봉사는 저세상에 가서 박 선생 만나면 자세히 말씀드릴 것이다.

노년의 즐거움

나는 한 가지 일에 매달려 집착하지 못했다. 어느 기간이 지나면 나를 찾는 사람이 나타났다. 내가 원한 일도 있었으나 원하지 않은 일에도 곧잘 빠졌다.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면 새로운 에너지가 폭발하여 신명나는 경우가 많았다. 직업적인 일 말고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뛰어든 일도 있다. 1950년대 말 ‘외화 획득’이라는 미명으로 우리나라에 온 철새를 잡아 일본에 파는 것을 보고 황당하여 ‘한국애조회’를, 1960년대 말에는 새로운 형태의 농촌 협업운동을 펼치는 젊은 농학도들이 대견하여 ‘새길농업연구회’를 만들어 지원했다. 1990년대에는 최기철 박사의 민물고기보존협회에 끌려 홍보 출판 업무를 돕다가 최 박사 작고 후엔 그 단체 회장이 되어 일했다. ‘돈 안 생기는 일만 골라 다닌 무능한 가장’이라는 아내의 늘그막 구박에 할 말이 없다.
나는 ‘언론’과 ‘공기업’, ‘사기업’의 일터를 오가며 살았다. 직장은 자주 옮겼으나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던 60년대 초부터 이대 뒤 신촌동에서 10여 년, 그리고 현재의 남가좌동 작은 집(오두막)에서 40년째 그대로 살고 있다. 교육환경이 열악한 그때 아이들에게 ‘전학의 짐’을 지우기 싫었다. 그 뒤에도 이사의 유혹이 있을 때마다 나무와 꽃과 열매 등 집에서 싹터 자란 생명들이 놓아 주지 않았다.
산골 소년은 늙어서도 산에 가면 늘 마음이 편하고 생기가 일었다. 산과 강의 새와 물고기와 꽃에 이끌렸고 ‘교육’과 ‘전통문화’와 ‘환경’에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젊은 날 처음 발 들여 놓았던 ‘아동문학’은 향수처럼 신앙처럼 언제나 나를 감싸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 선집을 정리하면서 처음으로 내 삶을 찬찬히 되돌아보게 되었다.
‘처음엔 남의 법도를 따라 시작하고(入於外法) 이것저것 법도 없는 서법에서 벗어나(出於無法) 나만의 법도로 쓴다(我用我法)’는 추사 선생 노년의 말씀을 생각하면 감히 글을 쓰고 그걸 남긴다는 것이 부끄럽다.
그래도 내 동화들은 다 소중한 내 삶의 편린들이다. 내 삶의 일부가 거기 구석구석에 담겨 있다. 이미 내 품에서 떠난 작품들은 독자들이 임의로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내가 중언부언 부연할 말이 없다.
나이 들어 되돌아보니 동화를 생각할 때, 동화를 읽을 때, 동화를 쓸 때 나는 늘 행복했다. 지금도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동화의 주제 몇 가지가 있다. 떠나기 전에 나오면 좋고 안 나와도 아쉽지 않을 것이다. 시들해진 이 땅의 ‘어린이 문화운동’도 걱정하며 살고 있다.
내가 살던 시절, 금과 권이 찰싹 붙어 졸부 전성시대를 만들던 이야기와 외국의 문화침략 전략에 놀아나 우리 전통문화 대신 저질문화를 확산시킨 무지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이제 내 짐 더미에서 내려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내가 살아온 삶처럼 세상은 반드시 내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논어≫ 맨 첫머리 노년의 공자님 말씀을 외운다. 그 제목 <학이(學而)>를 나는 ‘배운다’가 아니라 ‘읽는다’로 멋대로 풀이한다. ‘읽고 때때로 다시 읽으니 이 얼마나 기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먼 곳의 옛 벗이 찾아오니 이 얼마나 즐거운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나지 않으니 이게 바로 군자다운 삶이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자연을 벗 삼아 거닐며, 책을 읽고 옛날 읽은 책을 다시 꺼내 읽는 맛, 문득문득 생각나는 옛 친구를 만나는 즐거움…. 나의 이런 엉뚱한 해석이 왜 진작 보이지 않았을까? 여든한 살 나이에라도 이나마 살짝 보인 것이 그저 고맙다.

작품 및 수상 연보

1959년 동화 ≪수평선 저쪽≫(연합어린이) 연재.
1960년 독립신문기념 언론상 ‘지역사회부문’ 수상. 동화 ≪소공자≫(계몽사) 번역.
1962년 동화 ≪소공녀≫(계몽사) 번역.
1980년 동화 ≪장날≫(교학사) 출간.
1985년 동화 ≪금붕어와 가재≫(공저, 금성출판사) 출간. 동화 ≪비밀의 꽃동산(비밀의 화원)≫(동아일보사) 번역.
1993년 박홍근아동문학상 수상.

해설 - 노경수
1960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했다.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아동문학을 전공하여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 MBC 창작동화 <동생과 색종이>로 대상, 2009년 <윤석중 연구>로 범정 학술논문 우수상, 2011년 <오리부부의 숨바꼭질>로 단국문학상 수상했다. 저서로 ≪괭이의 꿈≫, ≪옹고집전≫, ≪엄마를 키우는 아이들≫, ≪윤석중 연구≫, ≪오리부부의 숨바꼭질≫, ≪집으로 가는 길≫ 외 다수가 있다. 현재 한경대학교 겸임교수로, 한서대학교, 우석대학교에서 강사로 아동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서석규 동화선집>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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