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박숙희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겠지만, 내가 동화작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그냥 우연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세월을 더듬어 보면, 내가 동화를 쓰는 작가가 되기까지는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의 도움과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1953년, 6·25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휴전이 되고 온 나라가 쓰라린 고난을 당할 무렵, 동짓달 그믐경에 우리 부모님은 4남 4녀 팔 남매 중 여섯 번째로 나를 낳으셨다. 국가적인 환란 속에서 잉태된 탓인지 나중 깐 병아리같이 허약하고 여린 무녀리 같은 아이였더란다.
일본에서 큰 목재상을 경영하시던 아버지는 해방이 되자 온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고향의 전답을 몽땅 다 사들이다시피 하고 집과 어장을 장만해 고향에 정착하셨지만, 젊은 시절에 축적한 부를 누리지도 못하고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마음이 선량해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셨다는 것, 잘생긴 미남이었다는 것 정도의 기억밖에 없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로 아버지는 인정이 많고 자비심이 많아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불쌍한 사람은 그냥 보내지 못하는 성정을 가지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병원을 개원한 이래 아버지만큼 많은 문병객이 찾아온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아버지의 도움을 입은 수많은 사람이 아버지가 병든 것을 무척 애석해했다고 한다.
반면 어머니는 몸이 약하고 정신은 강인한 분이셨다. 아버지를 하늘같이 의지하고 살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쩔 줄을 모르던 어머니는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머슴들을 데리고 농사를 짓고 집안을 꾸려 가셨다.
어머니는 그 바쁘고 힘든 중에도 틈날 때마다 책 읽기를 즐기셨다. 어머니는 책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읽은 이야기를 밤마다 마을 사람들과 가족과 집안의 일꾼들에게 들려주셨다. 아직 TV가 없던 그 시절, 마을 사람들은 비가 와서 일을 못 하거나 긴 겨울밤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밤마다 우리 집 사랑방으로 몰려들었다. 스토리텔링 기술이 뛰어나실 뿐 아니라 인정 많고 오지랖 넓은 어머니의 성품 때문에, 우리 집 사랑방에는 사시사철 어머니가 거두어 주는 친척들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딸려 앉아서 밤마다 어머니가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고, 자연히 책을 좋아하고 이야기 듣는 걸 즐기게 되었다.
가끔 큰딸 집에 다니러 오셨던 외할머니는 어머니보다 더 지독한 독서광이셨다. 장수했던 할머니는 100세로 돌아가시기 사흘 전까지 책을 읽으셨던 분이었으니까. 외할머니 역시 독서와 시조 읊기를 좋아하셨고, 딸과 마주 앉아서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곤 하셨다. 그런 할머니와 어머니의 무릎 학교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문학 공부를 한 셈이다. 두 분은 나에게 최초의 문학 선생님이 되어 주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한 번도 내게 책을 읽으라고 권하지 않았지만, 책을 읽는 것은 그 어떤 놀이보다도 재미있고 신나는 놀이라는 걸 온몸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었다. 그런 어머니와 외할머니 밑에서 두 분이 주고받는 독후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경험이 내가 후일 동화작가가 되는 데 많은 자양분이 되었던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몸이 약한 어머니를 더 많이 닮은 나는 어릴 때부터 아주 허약했다. 그래서 어릴 적 내 별명은 ‘비얄이’였다. 우리 가족은 내가 바람만 세게 불어도 날아가는 아이라, 자라서 대단한 사람이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몸으로 하는 일은 잘 못하고, 머리로 하는 일 즉 책이나 읽고 그늘에 앉아 공상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니 자연히 혼자 놀기를 좋아했다. 혼자서 숲 속의 야생화를 찾아다니며 숲 속에 숨어 피어나는 예쁜 꽃을 발견하면 신기해하고, 멀리 바다가 보이는 고향의 아름다운 풍광과 푸른 바다의 치맛주름 곁에 앉아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자연이 나의 문학 학교였던 것이다.
내가 구체적으로 문학의 꿈을 가진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였다. 그때 이미 세계의 명작들을 비롯해 나이에 걸맞지 않는 책들까지 온갖 책을 닥치는 대로 탐독하던 중이었다. 독서열에 휩싸여 종이에 기록된 것은 모조리 읽어 치우는 버릇이 들어서 날아가는 휴지 한 조각도 주워 읽을 정도였다. 읽다 읽다 읽을 것이 없자 당시 서울대에 다니는 학생이던 오빠의 책꽂이에 꽂힌 책까지 몰래 뽑아 읽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김소월 시집을 대했을 때, 그의 시편들이 어린 내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옳다! 나도 이런 시를 써 봐야지’ 하고 무릎을 쳤다. 그리고 누구에게 배우거나 할 처지도 아니어서 혼자서 김소월 조의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쓴 시들은 선생님이 교실 뒤편 게시판에 붙여 환경 정리 하는 데 쓰였다.
내가 책을 읽거나 서투른 시를 쓴다고 밤을 새운다는 말을 듣고 큰오빠는 방학이 되어 서울에서 내려올 때면 가끔 내게 줄 책들을 사 들고 오셨다.(오빠가 처음으로 내게 사 준 타고르 시집과 워즈워스 시집은 지금도 골동품이 되어 내 서가에 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실해졌다. 선생님께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미래의 꿈을 이야기해 보라고 설문지를 내어 주셨을 때, 나는 서슴없이 ‘작가가 되겠다’고 썼다. 그때 헤르만 헤세, 루이제 린저, 카를 힐티, 에밀리 브론테 등의 작가들에게 푹 빠져서 그들의 작품들을 탐독하며 꼭 명작을 쓰는 작가가 되리라 마음을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작가가 되겠다고 하자 동무들은 작가가 구체적으로 뭐하는 직업인지도 채 알지 못하고 의아해했고, 국어 선생님만이 그런 나를 눈여겨보셨다. 국어 시간에 선생님은 내가 쓴 글을 듬뿍 칭찬하며 칠판에 빽빽하게 판서해 놓고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고 읽어 보게 하셨다. 특활 시간이면 문예 담당 선생님은 합동 작품 쓰는 시간을 마련하고, 자신이 시 한 구절을 읊고 학생들에게 그것에 대구 해서 한 구절을 읊도록 하셨다. 그러면 선생님의 시에 대구 하는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 특활 시간마다 그런 훈련을 받으며 글을 쓰는 일에 자신감을 얻어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무렵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국어 선생님이 자신의 방법으로 나의 창작열을 북돋워 주셨고, 나를 각종 백일장에 내보내서 상을 받게 해 작가가 되겠다는 내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게끔 이끌어 주시지 않았나 싶다.
내가 작가가 되는 데 결정적으로 약이 되어 준 사람은 내가 문학청년 때 만난 남편이었다. 시인 지망생이던 그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신춘문예 최종심까지 오른 데다 학원문학상이나, 전국 대학 문예현상공모전 등을 휩쓴 실력자였다.
(우리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편지로 풀어내곤 한 끝에 결혼까지 하게 된 문학 커플이었다.)
그런데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등단의 관문을 뚫으려 칠전팔기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신춘문예 기간이면 온 가족을 곁에 오지 못하게 밀어내고 혼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시를 쓴다며 밤샘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보낸 작품들이 최종심에서 머무르거나 번번이 낙방해 남편이 실망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쯔쯔… 나 같으면 단번에 당선하겠다. 뭐’ 하고 속으로 비웃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나는 등단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등단도 하기 전에 결혼부터 하고 보니 아이는 줄줄이 태어나고,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일 없는 사고뭉치 개구쟁이 세 아들과 치매를 앓는 시할머니를 뒷바라지하는 일로만도 늘 혼비백산했다. 게다가 걸핏하면 몸살을 앓곤 하는 체력으로 창작의 노고까지 짊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비록 글을 쓰지는 못해도 책을 읽거나 간단한 습작을 하거나 일기를 계속 쓰면서 괴로운 세월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죽지 못해 살아온 세월도 어느덧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집살이 10년 만에 시할머니가 여든여섯으로 생을 마감하신 것이다. 남편은 그동안 칠전팔기 정신으로 마침내 ≪중앙일보≫에 시조, ≪조선일보≫에 동시가 당선되었다. 그러자 점점 기고만장해 갔다. 몇 년 뒤엔 시까지 통과해 신춘문예 3관왕이 되었다고 으스대며 대놓고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기가 생겼다.
‘오냐! 나도 신춘문예에 당선해 실력을 보여 주마. 당신의 콧대를 꺾어 놓으리라’ 하며 이를 뽀드득 갈았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서른여섯 해가 지나고 있었다.
‘아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갑자기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막내를 학교에 넣어 놓고 얼른 책상 앞으로 다가앉았다. 그러나 막상 나서고 보니 내가 택해야 할 장르는 한정되어 있었다. 남편이 이미 시, 시조, 동시로 신춘문예 3관왕이 되었으니 뒤에 출발하는 나는 여건이 여러 가지로 불리했다. 남편이 작품을 써 주었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다른 장르를 택해야 했고, 남은 장르는 소설과 아동문학과 평론뿐이었다.
평론이나 소설은 체력이나 기질, 성격상 내게 적절한 장르가 아니었다는 걸 학창 시절에 이미 체득하고 포기했던 터라, 남는 장르는 동화였다. 한 번도 동화작가가 되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그래도 동화밖에 없었다. 동화에 도전해 보자 하고 신춘문예 마감을 일주일 남겨 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난생처음으로 써 본 동화였지만 이미 학생 시절에 시나 소설을 습작하면서 습작 노트 여러 권을 갖고 있던 터라 그리 어렵지 않고 재미있었다. 시의 간결성과 신비감, 소설의 재미를 곁들여야 하는 동화가 뜻밖에도 나에게 잘 맞는 장르라는 것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내가 어떤 장르의 글을 잘 쓸 수 있는지도 모르고, 시를 쓰다가 소설을 쓰다가 했지만 딱히 즐겁지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주일 동안 세 편의 동화를 써 내는 데도 그것이 즐겁고 재미있었던 걸 보아 나는 동화를 쓰는 것이 적격이었던 모양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잘 안 되는 소설 원고를 끌어안고 입술이 부르트고 몸살을 앓곤 하다가, 우선 분량이 적은 글을 쓰니 몸살이 나지 않고 글 쓰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난생처음으로 동화 몇 편을 쓰는 데도 일필휘지로 아무 어려움 없이 휙 써서 남편 몰래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쓴 동화 <꿈 마차 황금 마차>가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88년 1월 1일, ≪매일신문≫에 까만 뿔테안경을 쓴 내 얼굴이 실렸다. ≪서울신문≫, ≪경향신문≫ 등 ‘박아지’라는 가명으로 응모했던 중앙지에는 모두 최종심에 머물렀고, ≪매일신문≫에만 당선이 되었던 것이다. 솔직히 평이나 받아 보자는 생각으로 출품했던 것이었지만 맨 처음 써 본 동화가 그해 신춘문예 출품작 중 가장 뛰어났다는 칭찬을 받으며 덜컥 당선되자, ‘이거 큰일 났다!’ 싶었다. 동화 공부도 전혀 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도마 위에 놓였으니 말이다. 당황한 나는 그때부터 구체적으로 동화 공부를 시작했다.
내가 동화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높은 산꼭대기를 올라가 보는 것이었다. 세 아들을 키우고 매운 시집살이를 한 10년 동안 절망하고, 좌절하고, 주눅 들고, 지치고… 형편없이 위축된 내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시집살이와 육아로 약해질 대로 약해지고, 죽을 고비도 수차례나 넘겨 피골이 상접한 나를 데리고 설악산으로 갔다. 처음엔 산을 오르는 일이 죽을 듯 힘들고, 그 산이 도저히 오르지 못할 태산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다음은 토함산, 소백산, 한라산, 가지산, 지리산… 우리나라에서 높다 하는 산들을 차례로 올라갔다. 산꼭대기 오르기를 수없이 반복한 끝에 차츰 기진했던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무너진 자신감을 세울 수 있었다. 산을 오르면서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절대로 오를 수 없을 것 같던 높은 산 정상에 앉아 까마득한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며 아무리 어려운 일도 등산의 어려움에 비하면 모든 일이 쉬워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코앞의 조그만 괴로움과 아등바등 싸우며 나약하게 살아온 지난날이 부끄러웠다.
‘노력하면 되겠구나!’ 하는 평범한 진리를 터득했다.
산꼭대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진액을 짜듯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험한 골짜기를 괴롭게 헤쳐야 하고, 산 정상이 땀을 비 오듯 흘리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자리라는 걸 온몸으로 터득할 즈음 조금씩 마음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진즉 체험했더라면 인생을 좀 더 여유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었을 텐데, 너무 늦은 나이에 그런 사실을 공부한 것이 억울했다.
수없이 극기 훈련을 하고 나니 내가 당한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산처럼 의연히 서서 온갖 것을 포용하며 용서하고, 꽃과 나무와 산새와 동식물과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자애로운 마음 자세로 동화를 써야겠다는 각오가 섰다.
그다음 공부는 바다, 바다를 읽고 듣는 일이었다. 바다의 넓고 시원한 심성을 배우고 푸른 파도의 기상을 닮아 보기로 한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바다를 무척 좋아했다. 바다의 변함없는 푸른 열정과, 포효와 격랑과, 잔잔함, 혹은 절규를…. 그래서 기회가 닿는 대로 바다를 찾아갔다. 원고를 쓸 땐 대부분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가서 바다를 마주했다. 그러면 피로한 눈을 보호할 수 있어 좋았다. 떠오르는 태양을 가슴으로 받아 안고 일출 광경을 바라보면서 글을 쓸 때면 웅혼한 바다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렸다. 그러면서 바다 같은 글을 써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다음으로 여유가 생길 때면 세계의 여러 나라를 살펴보는 데 힘썼다.
낯선 이방인들을 만나고, 낯선 거리와 낯선 문화를 접하면서 내 인생의 높이·넓이·깊이의 면적을 조금씩 키워 나갔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어느 한 장소에서만 아옹다옹하고 살면서 어찌 인생이 어떻다고 이야기할 수 있으랴!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도 보고, 험난한 산꼭대기를 올라도 보고, 절해고도에 떨어진 듯 극명한 외로움에 처해도 보고, 기이한 꽃들이 만발한 꽃밭을 마주하거나 인생의 진면목을 온몸으로 체득해 본 작가라야만 독자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내가 경험하고 만져 본 것이 아닌 것을 그렇다고 거짓말하거나 머리로만 글을 쓰지 않기 위해서, 틈나는 대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하여 좀 더 스케일이 큰 그림을 그리기에 힘썼다.
그리고 인생을 좀 더 깊이 천착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신학대학에 입학해서 성경 한 권을 통째로 공부하며 신학을 익혔다. 그리하여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인간은 어떤 본질을 가졌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사실들을 깨우쳤다. 그러고 나니 내 속에 동화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동화 쓰는 기법들을 공부했다. 선배들의 작품을 정독해 읽고, 그 밖의 필독서를 읽는 데 힘썼다. 그러지 않고는 독자들에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발길이 닿고, 내가 피부로 느끼고 온몸으로 감동했던 온갖 이야기들이 실꾸리처럼 솔솔 풀려나왔다. 주변의 지인들이 내 동화를 읽으며 신기해했다.
“야, 넌 거미가 실을 풀어내듯 동화를 쓰는구나.”
그랬다. 처음 6개월간은 거미가 실을 풀어내듯 내가 경험했던 일을 이야기로 꾸미는 작업을 많이 했다. 참말을 거짓말처럼 쓰는 단편동화를 주로 썼던 것이다. 그렇게 쓴 동화들을 모아 처음으로 단편동화집 ≪진주가 된 가리비≫를 펴냈다. 그해 그 책이 우수 작품에 선정되어 문예창작지원금 150만원을 받았다. 생각지도 않은 선물은 정말 감격적이었다. 동해안의 한 귀퉁이 경주에 사는 무명작가에게 하나님이 보낸 선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작품은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초등학교 6학년 읽기 교과서에 실려 아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첫 책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자, 그때부터 자신감과 함께 수많은 동화가 나를 찾아왔다.
쉴 새 없이 원고 청탁이 이어지고 온갖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내 인생의 고난은 모두 끝난 듯 모든 것이 밝고 찬란한 동화의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부터 완전히 동화작가로 변신해 동화 속 주인공처럼 밝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살았다.
예전에 인생의 답을 알지 못해서 방황하던 나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동화작가 박숙희만 존재했다. 내 앞에 닥치는 모든 희로애락을 제3의 관찰자적 시점에서 바라보니,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동화의 소재로 다가왔다. 나는 그 동화 속 주인공이 되어 울고 웃으며 신나게 동화를 썼다.
나의 생애에서 맘껏 웃을 수 있었던 순간들을 꼽으라면 동화작가로 살아갈 때인 것 같다. 동화는 내게 많은 기쁨을 주었다.
≪새를 기다리는 나무≫란 첫 장편을 펴냈을 때, 그해 그 책 역시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면서 세종아동문학상을 안겨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북 매거진≫이란 잡지에 오규원 선생님의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와 나란히 그해 ‘최고의 책’으로 뽑혔으며 ‘청소년 권장도서’로 선정되었다. 그때 나는 진심 어린 웃음을 지었다.
‘하면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 시절의 가냘픈 내 꿈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작가가 되는 것인지도 몰랐던 시절에, 그저 혼자 읽고 생각하고 열심히 쓰면서 막연히 작가가 되리라고 꿈꾸어 오던 것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따뜻한 손≫(지식산업사)과 ≪자연이 들려주는 지혜동화≫(눈높이 대교)를 동시에 펴냈을 때도 이 책들 역시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저학년 장편동화 ≪삐쥬리아공주≫(효리원)가 10년 동안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진열될 수 있었던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 후 ≪가시복 탁탁이≫, ≪나는 누구인가?≫, ≪난 이제 울지 않을 거예요≫, ≪아기송아지 움머≫, ≪스스의 모험≫ 등 한동안 그림 동화책 쓰는 재미에 푹 빠졌다. ≪난 두목이 될 거야≫(효리원)와 ≪숲 속의 궁전≫(기댄 돌) 등을 펴내어 권장도서·우수도서로 선정되고 평단의 주목을 받으면서, 동화는 내 인생을 화려하게 빛내 주었다. 그리고 동화를 쓰는 동안 나는 그지없이 즐거웠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참 잘한 일은 동화작가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요즈음 나는 내 동화가 보다 더 새로워지고 깊어지고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잠시 창작 동화는 제쳐 두고 성경 동화 전집을 쓰고 있다. 나의 사상과 가치관이 보다 새로운 터닝 포인트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제 한층 더 새롭고 차원 높은 동화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연필을 새로 깎는다.
작품 및 수상 연보
1988년 1월 <꿈 마차 황금 마차>로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1990년 1월 <애벌레의 꿈>으로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2월 <진주가 된 가리비>로 ‘계몽사’ 어린이문학상 당선.
4월 단편 창작 동화집 ≪진주가 된 가리비≫(문진당) 출간, 우수도서 선정으로 문예창작기금 수혜.
공저 ≪선생님은 내가 미운가 봐≫(문진당) 출간.
1995년 그림책 동화집 ≪가시복 탁탁이≫(교수문화) 출간.
3월 장편 창작 동화집 ≪새를 기다리는 나무≫(도서출판 이두) 출간.
≪재미있는 성경 동화 시리즈 1≫(도서출판 이두) 출간.
4월 ≪우두커니 아저씨≫, ≪진주가 된 가리비≫(문원) 재출간
10월 ≪새를 기다리는 나무≫가 ≪소년한국일보≫ 제정 세종 아동문학상 수상, ≪북 매거진≫ ‘95 최고의 책’에 선정, ‘청소년 권장도서’에 선정.
1999년 12월 단편동화집 ≪따뜻한 손≫(지식산업사) 출간, 문광부 ‘우수도서’에 선정.
단편동화집 ≪자연이 들려주는 지혜동화≫(눈높이 대교) 출간.
2001년 1월 장편 창작 동화집 ≪삐쥬리아공주≫(효리원) 출간, ‘책교실’·‘어린이 문화진흥회’에서 좋은 어린이 책 선정, 교보·영풍문고에서 베스트셀러, 문학 부문 경주시 문화상 수상.
<진주가 된 가리비>(‘가리비와 소녀’로 제목 개작)가 초등 6-1학기 읽기교과서에 10년간 수록.
11월 창작 그림책 동화집 ≪아기송아지 움머≫(계몽사) 출간.
창작 그림책 동화집 ≪스스의 모험≫(계몽사) 출간.
2003년 3월 장편 ≪새를 기다리는 나무≫(생활성서) 재출간.
2005년 4월 장편 창작 동화집 ≪난 두목이 될 거야≫(효리원) 출간.
2007년 창작 그림책 동화집 ≪나는 누구인가≫(헤밍웨이) 출간.
5월 창작 그림책 동화집 ≪난 이제 울지 않을 거예요≫(복음서원) 출간.
8월 편저 ≪피터팬≫(효리원) 출간.
2008년 11월 장편 창작 동화집 ≪숲 속의 궁전≫(기댄 돌) 출간.
5월 3인 공저 ≪연필동화≫(을파소) 출간.
4월 편저 ≪한석봉≫(효리원) 출간.
5월 편저 ≪별주부전≫(예림당) 출간.
2009년 10월 편저 ≪아라비안나이트≫(예림당) 출간.
2010년 편저 ≪트로이전쟁≫(교원) 출간.
2011년 11월 편저 ≪소공자≫·≪소공녀≫(예림당) 출간.
해설 - 원유순
1957년 강원도 횡성에서 출생해 원주에서 자랐다. 인천교육대학을 졸업하고 29년 6개월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아동문학을 전공해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90년 계간 ≪아동문학평론≫에 등단해서 동화작가가 되었다. 그 후 1993년 장편동화 ≪둥근 하늘 둥근 땅≫으로 계몽사 아동문학상을 받았으며 같은 해 MBC창작동화 대상에 단편동화 <할아버지는 여름지기>가 가작 당선되었다.
≪까막눈 삼디기≫, ≪열평 아이들≫, ≪색깔을 먹는 나무≫, ≪김찰턴순자를 찾아줘유≫, ≪모하메드의 운동화≫, ≪하이퐁세탁소≫ 등 다수의 작품집이 있다. 장편 아동 소설 ≪색깔을 먹는 나무≫로 한국아동문학상을, ≪김찰턴순자를 찾아줘유≫로 소천아동문학상을 받았다.
오랫동안 근무하던 초등학교를 떠나 2007년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 중이며 대학과 대학원에서 아동문학창작을 강의하고 있다.
<박숙희 동화선집> 저자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