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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왕궈웨이
<생애>
마지막 황제 푸이(傅儀)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 자는 정안(靜安), 정암(靜庵), 백우(伯隅) 등이고 호는 예당(禮堂)이며, 만년에는 영관당(永觀堂)이라고 했다가 관당(觀堂), 영관(永觀)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다]는 철학, 미학, 문학, 희곡사, 갑골문, 금문(金文), 고대 기물, 은주(殷周) 역사, 한대와 진대(晉代)의 목간(木簡), 한위(漢魏)의 비각(碑刻), 둔황(敦煌) 문헌, 서북지리(西北地理), 몽고사 등을 연구해 각 영역에서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
철학 방면에서는 중국 최초로 칸트와 쇼펜하우어, 니체 등을 소개하면서 중국 철학의 주요 개념과 서양 철학의 개념을 비교 분석하기도 했다. 미학 방면에서는 칸트와 쇼펜하우어, 니체, 실러 등의 미학을 받아들여 중국의 전통 미학과 융합을 시도했다. 아울러 서양 미학을 중국 문학 비평에 적용해 중서 미학이 어우러진 독특한 문학 비평 체계를 완성했으니, 소설 방면에서 <홍루몽 평론(紅樓夢評論)>, 시가 방면에서 ≪세상의 노래 비평(人間詞話)≫, 희곡 방면에서 ≪송원대의 희곡 연구(宋元戱曲考)≫ 등이 바로 대표 논저다. 또한 문학에서 역사학, 고고학으로 학문 전향을 한 뒤에는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 등을 연구해 고고학적 업적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사학과 연결해 갑골문 등의 기록에 근거해서 고대사 일부를 복원하는 작업까지 했다. 일생 동안 저서 60여 종을 남겼고, 직접 비평하고 교정한 책은 모두 192종으로 학문의 넓이, 깊이, 독창성 등에서 폭넓게 인정받아 중국 안팎의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국 근대 지식인 중에서 가장 방대한 지식 체계를 세웠다고 평가받는 왕궈웨이의 저서는 중국의 철학, 미학, 문학, 역사학, 고고학, 언어학, 갑골학, 금석학 분야에서 모두 불후의 명저로 남아 있다.
왕궈웨이는 1877년(청 광서 3년) 12월 3일(음력 10월 29일) 진시(辰時)에 저장성(浙江省) 하이닝[海寧, 지금의 하이닝시(海寧市) 옌관진(鹽官鎭)] 솽렌항(雙仁巷)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궈전(國禎)이었고, 나중에 궈웨이(國維)로 고쳤다.393) 그의 가문은 북송 장군의 후예지만 후대로 내려와서는 평범한 집안이 되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세 살 때 병사하고, 아버지는 그가 열 살이 될 때까지 객지 생활을 하는 등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첸탕강(錢唐江)이 휘감기는 그의 고향 마을은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찬사와 창작의 대상이 되었던 하이닝(海寧) 옌관진(鹽官鎭)으로 이곳에서 왕궈웨이는 역류하는 바닷물394)을 구경하며 유년기를 보낸다.
여섯 살이 되면서 왕궈웨이는 서당에 들어가 시문을 배웠다. 열 살 때(1887) 퍄오양현(漂陽縣)의 막료(幕僚)로 있던 부친이 조부의 상을 치르러 귀향했는데 이후 한동안 머물면서 매일 밤 왕궈웨이가 서당에서 돌아오면 직접 교육을 맡았다. 당시 그의 부친은 같은 마을의 천소우톈(陳壽田) 선생에게 아들의 공부를 맡겼는데 매달 변문과 산문, 고금체시 몇 수를 숙제로 받아 왔다.
1892년(광서 18년, 만 15세) 7월에 왕궈웨이는 주학(州學)395)에 들어가 하이닝주(海寧州)의 세시(歲試)에 참가해서 21등으로 합격해 수재(秀才)가 된다. 이때 왕궈웨이는 그 고을에서 이름을 떨쳐 천소우첸(陳守謙), 예이춘(葉宜春), 주자요우(褚嘉猷) 등과 함께 “하이닝의 네 재주꾼(海寧四才子)”으로 불렸다. 그런데 당시 왕궈웨이는 표면적으로는 그 시대의 보편적 희망에 따라 과거 공부를 했지만 유가의 대표 경전이라 할 수 있는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를 좋아하지 않았으며,396) 또한 과거 시험 답안용 작문을 싫어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저축한 세뱃돈으로 항저우에서 전사사[前四史,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를 구입해 평생 독서의 시작으로 삼았다.
1893년(광서 19년) 3월에 왕궈웨이는 항저우로 가서 숭문서원(崇文書院)에서 수학했다. 이해 8월에 향시(鄕試)397)에 응했지만 “다 치르지도 않고 돌아와 버렸다”.398) 1894년(광서 20년), 2월에 다시 향시를 보았지만 낙방했다. 1894년 7월 25일 청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왕궈웨이는 신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고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갈 수 없어 우울해했다.
1896년(만 19세) 11월에 왕궈웨이는 같은 하이닝 지역에 사는 상인의 집안 딸인 모씨(莫氏)와 결혼했다. 1897년(광서 23년, 만 20세) 4월에는 같은 마을의 천루전[陳汝楨, 자 매숙(梅肅)]의 집에서 훈장을 한다. 이해 9월에 왕궈웨이는 항주로 가서 다시 향시를 보았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이 시기 왕궈웨이는 ≪시무보(時務報)≫ 등의 시사 잡지를 빌려 보며 시사와 신학문에 관심이 기울었다.
1898년(광서 24년, 만 21세) 2월에 왕궈웨이는 상하이로 가서 일을 찾던 중 친구의 주선으로 시무보관(時務報館)에 취직한다. ≪시무보≫는 진보적 저널리스트인 왕캉녠(汪康年, 1860∼1911)이 주필을 맡고 있던 유명 시사 잡지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서기와 교정 일을 보았다. 당시 월급이 매우 적어 생활은 가난했다. 3월 22일에 뤄전위(羅振玉)가 세운 동문학사(東文學社)399)가 개학하자 왕궈웨이는 왕캉녠의 동의를 받아 이곳에서 매일 오후 몇 시간 동안 영어와 일어,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습득했는데, 주로 화학, 물리, 수학, 지리 등의 자연과학이었다. 그러나 시무보관의 일이 바빠 자습할 틈이 없었으므로 학업의 진전은 별로 없었다.400) 동문학사에서 왕궈웨이는 평생의 후원자인 뤄전위를 만난다. 이해 7월에 각기병에 걸려 귀향해 요양한 뒤 11월 말경에 상하이로 돌아왔는데, ≪시무보≫는 무술변법(戊戌變法)의 실패로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자 뤄전위가 그를 동문학사로 불러 서무를 맡게 하고 학비를 면제해 주어 왕궈웨이는 일을 하며 공부를 하게 된다.
1899년(광서 25년, 만 22세), 가을에 동문학사는 장난제조국(江南制造局) 앞의 구이수리(桂墅里)로 이사를 갔는데, 뤄전위가 왕궈웨이에게 학감(學監)을 맡겼지만 학우들과 화합하지 못해 결국 그만둔다. 그래도 뤄전위는 여전히 월급을 주며 왕궈웨이에게 변함없는 애정과 지지를 보낸다. 이때 왕궈웨이는 일본인 선생 다오카 사요지(田岡佐代治)에게 영어를 배웠는데, 어느 날 그의 문집에서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인용된 것을 보고 속으로 매우 좋아했다. 그러나 서양어를 몰라 종신토록 두 사람의 책을 읽을 날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 시기에도 왕궈웨이는 틈틈이 시 창작을 했다. 한편 이해 허난(河南) 안양(安陽)의 샤오툰(小屯)에서 은[殷, 상(商)이라고도 한다]대의 갑골문(甲骨文)이 발견되는데, 후에 뤄전위와 함께 유명한 갑골학자가 될 왕궈웨이는 당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1900년(광서 26년, 만 23세) 여름에 팔국 연합군이 톈진과 베이징을 공격하자 동문학사는 앞당겨 졸업식을 한다. 의화단(義和團)의 봉기로 동문학사가 해산되면서 왕궈웨이는 고향으로 돌아가 독학으로 영어 공부를 한다. 왕궈웨이는 동문학사에서 2년 반을 공부했는데, 영어는 1년 반 정도 공부했고, 귀향 후에도 날마다 한두 과를 독학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동문학사에서 왕궈웨이가 접한 것은 주로 자연과학과 외국어(일어와 영어)였는데, 이 시기에 배운 것은 그가 이후에 철학과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을이 되어 왕궈웨이는 다시 상하이로 와서 뤄전위의 집에 머문다. 이때 뤄전위가 그에게 농업 관련 자료와 서적을 번역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번역 능력이 친구 선홍(沈紘)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그에게 맡겼다. 얼마 뒤에 뤄전위는 장즈둥(張之洞)의 요청에 따라 농학자 자격으로 후베이로 가서 후베이농무국(湖北農務局)의 총리(總理) 겸 학당(學堂) 감독을 맡게 된다. 이 시기에 왕궈웨이는 일본인 이케다 쇼조(池田升三)의 ≪농사회요(農事會要)≫를 번역해 ≪농학보(農學報)≫(제118, 119, 122책)에 실었다. 나중에 일본의 유명한 중국 학자가 될 가노 나오키(狩野直喜, 1868∼1947)는 이해에 중국에 유학을 와서 상하이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때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나는 여러 해 전에 왕궈웨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아마도 1901년401)이거나 그 무렵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때 나는 상하이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당시 내 친구인 후지타 박사[지금 도쿄 대학의 교수로 있는 후지타 도요하치(藤田豊八)]는 뤄전위가 경영하는 동문학사에서 일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의 학생 중에 대단히 총명한 학생이 있는데 일어 능력이 우수하고 영어도 잘하며 게다가 서양 철학을 배우는 데 굉장한 흥미를 지니고 있어서 장래가 매우 촉망된다고 했다. 당시 신학문을 추구하는 중국 젊은이들 대부분이 정치학이나 경제학에 관심을 가졌으므로 서양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매우 어려웠다. 후지타는 그의 학생을 칭찬하며 치켜세우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 여행에서) 나는 나중에 정말로 매우 유명해질 왕궈웨이라는 인물을 만나 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402)
1901년(광서 27년, 만 24세), 봄에 왕궈웨이는 친구 판빙칭(樊炳淸)과 함께 뤄전위의 요청으로 우창(武昌)의 후베이농무학당(湖北農務學堂)으로 가서 농업 관련 서적과 사건들을 번역하게 된다. 이해 5월에 뤄전위는 상하이에서 잡지 ≪교육 세계(敎育世界)≫403)를 창간해 왕궈웨이에게 주필을 맡겼다. 왕궈웨이는 이 잡지를 통해 자신의 글과 번역문을 많이 발표하게 되는데, 나중에 여기에 수록된 글의 일부를 모아 ≪정암 문집≫을 출간한다.
1902년(광서 28년, 만 25세) 1월 9일 장즈둥(張之洞)404)은 뤄전위를 일본에 파견해 학교를 견학하고 교과서를 구입해서 번역하도록 했다. 이 시기에 장즈둥은 만청교육개혁운동의 일환으로 류쿤이(劉坤一)와 함께 장쑤 후베이번역원을 설립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1월 하순에 왕궈웨이는 우창에서 상하이를 거쳐 하이닝으로 돌아갔다. 한편, 이 시기에 뤄전위는 몇 년 동안 번역한 농업 서적의 판로가 좋아 경제 상황이 대단히 좋아졌다. 그래서 그는 유학을 장려하는 당시 분위기에 따라 왕궈웨이의 일본 유학을 지원하게 된다. 마침내 왕궈웨이도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2월에 왕궈웨이는 하이닝을 떠나 상하이를 거쳐 일본으로 가게 된다. 왕궈웨이는 일본에서 스승 후지타의 권유로 이과 공부를 하게 되는데 낮에는 영어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도쿄 물리학교에 가서 수학을 공부했다. 왕궈웨이의 일본 유학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도쿄에 머문 지 4, 5개월 만에 각기병이 재발했기 때문이다. 공부에 대한 열망은 있었지만 어찌 하겠는가. 그는 뤄전위의 동의를 얻어 결국 여름에 귀국하고 말았다. 고국으로 돌아온 뒤 왕궈웨이는 상하이에 있는 뤄전위의 집에 머물며 휴양했다. 동문학사에서부터 맺어진 왕궈웨이와 뤄전위의 관계는 특별한 것이어서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왕궈웨이의 삶 역시 뤄전위와의 관계 속에서 전개된다. 그러므로 이때 뤄전위의 행적에 대해 잠깐 살펴보고 넘어가겠다.
일본 교육을 시찰하고 돌아온 뤄전위는 현대 교육 제도 등에 관한 몇 안 되는 전문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양무파의 대표 중 하나인 성쉬안화이(盛宣懷)가 상하이에 창설한 난양공학(南洋公學)이 동문과(東文科)를 증설했을 때 뤄전위는 선쩡즈(沈曾植) 등의 지지를 받아 이 학교의 동문학당(東文學堂)의 감독으로 초빙되었다. 난양공학은 상하이 교통대학의 전신으로 1896년에 창설되었다. 처음에는 사범 학교였으나 나중에 상과를 증설해 점차 확대했는데 1902년에 동문(東文, 동양 어문) 분야를 증설하면서 뤄전위가 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뤄전위는 본래 동문학사를 운영해 본 경험이 있어서 이런 일에는 익숙했는데, 그는 곧장 훙커우(虹口)에 분교를 만들고 후지타 선생을 초빙해 총교습을 맡겼다. 이로부터 뤄전위는 문화계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왕궈웨이는 귀국한 뒤 얼마 동안 휴양을 취한 다음 자연히 난양공학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왕궈웨이는 이 학교의 집사를 맡았는데 마침 서양어와 철학에 능통한 후지타 선생이 그곳에 있었기에 여가를 이용해 그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아울러 뤄전위를 위해 ≪농학보≫와 ≪교육 세계≫를 편역했기에 저술은 나날이 많아졌다. 귀국하면서부터 왕궈웨이는 사실상 독학을 하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그의 관심은 완전히 철학으로 돌아서게 되며 후지타로부터 독서 지도를 받게 된다. 이때의 심경을 왕궈웨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도쿄에 머문 지 4, 5개월 만에 병이 생겨 마침내 귀국하게 된다. 이후로부터 마침내 독학의 시대다. 몸이 본래 쇠약한데다가 성격이 다시 우울해져 인생의 문제가 날마다 내 앞에서 오락가락했으므로 이때부터 비로소 철학에 종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때 나의 독서를 지도해 주신 분은 바로 후지타 선생이다.405)
이해에 왕궈웨이는 철학 공부를 하면서 한편으로 일본의 문학 박사 구와키 겐요쿠(桑木嚴翼)의 ≪철학 개론≫과 모토라 유지로(元良勇次郞)의 ≪심리학≫, ≪윤리학≫ 등을 번역해 ≪철학 총서 초집(哲學叢書初集)≫을 만들었다. 또한 ≪철학 소사전≫을 번역하고, ≪교육 총서(敎育叢書)≫를 간행한다. 독서와 더불어 이루어진 번역 작업은 왕궈웨이에게 학문적 깊이를 더해 주었다. 왕궈웨이는 난양공학에 오래 있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이해(1902) 10월에 뤄전위가 장쑤(江蘇) 난퉁(南通)에 있는 퉁저우(通州)사범학교에서 심리학, 철학, 윤리학 교원을 초빙한다는 얘기를 듣고 왕궈웨이를 추천해, 왕궈웨이는 1년 계약으로 이 학교에 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1903년(광서 29년, 만 26세), 3월에 왕궈웨이는 퉁저우사범학당(通州師範學堂)에 부임했다. 이 학교는 4월에 정식으로 개학했는데 중국 최초의 사범 학당이다. 왕궈웨이는 이곳에서 수업을 하는 한편 사회학, 심리학, 윤리학, 철학 등에 관한 서양 서적을 두루 읽으며 학문의 지평을 넓혀 나간다. 이해 봄에 왕궈웨이는 “페어뱅크스406)의 ≪사회학≫과 제번스407)의 ≪논리학≫을 읽고, 회프딩408)의 ≪심리학≫을 반쯤 읽었을 때 구입한 철학책이 도착해서 잠시 ≪심리학≫을 접어 두고 파울젠409)의 ≪철학 개론≫, 빈델반트410)의 ≪철학사≫를 읽었다. 당시 이 같은 책들은 그전 영어 독본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읽었는데 다행히 이미 일어를 읽을 줄 알아서 일어판 관련 도서를 참고하고서 마침내 대략을 이해했다”.411)
왕궈웨이는 일찍이 동문학사에 다니던 시절 일본인 스승이었던 다오카의 문집에서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인용한 것을 보고 대단히 흠모하면서 독일어를 알지 못해 그들의 원전을 읽을 날이 있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칸트와 쇼펜하우어에 대해 가졌던 그때의 관심은 철학에 종사하기로 마음먹으면서 곧바로 실천되었다. “≪철학 개론≫과 ≪철학사≫를 읽은 뒤 다음 해412)부터 비로소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을 읽었다.413) 그러나 ≪선험 분석론(先驗分析論)≫에 이르러서는 거의 전부 이해할 수 없어서 읽기를 그만두고 쇼펜하우어의 ≪의지(意志)와 표상(表象)으로서의 세계≫를 읽었다. 쇼펜하우어의 책은 생각이 정밀하고 필치는 예리했다. 그해에 이 책을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읽었다. 다음으로 그의 ≪충족 이유 원칙론(充足理由原則論)≫과 ≪자연 중의 의지론≫ 그리고 문집 등을 읽었는데 특히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있는 ≪칸트 철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한 편을 칸트 철학을 이해하는 관건으로 삼았다.”414)
1904년(광서 30년, 만 27세)에 장즈둥을 돕던 청조의 관리 돤팡(端方)이 장쑤 지역의 관리로 지명되었다. 이때 돤팡은 뤄전위와 함께 쑤저우에 사범 학교를 세우기로 해 1904년 말에 장쑤사범학당(江蘇師範學堂)이 문을 열게 되었다. 이때 뤄전위가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돤팡이 후지타를 교사로 초빙했다. 그리하여 뤄전위의 이력에 따라 부침하는 왕궈웨이는 1904년 12월에 뤄전위가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뤄전위가 퉁저우에서 가르치고 있던 왕궈웨이를 불렀던 것이다. 쑤저우(蘇州)로 온 왕궈웨이는 장쑤사범학당에서 심리학, 윤리학, 사회학 등을 가르쳤다. 이때 후지타 선생 역시 이 학교에 있었으므로 왕궈웨이는 틈나는 대로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04년 왕궈웨이는 <공자의 미적 교육주의(孔子之美育主義)>(3월), <인성을 논함(論性)>(4월),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교육학설(叔本華之哲學及其教育學說)>(7월), <현 왕조의 한학파 대진, 완원 두 사람의 철학학설(國朝漢學派戴阮二家之哲學說)>(7월), <홍루몽 평론(紅樓夢評論)>(7월), <쇼펜하우어 유전설 후기(書叔本華遺傳說後)>(8∼9월), <쇼펜하우어와 니체(叔本華與尼采)>(11월), <이치[理]에 대한 풀이(釋理)>(10∼12월), <교육우감 4칙(教育偶感四則)> 등의 글을 ≪교육 세계≫에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글들의 상당 부분은 다음 해에 출간하는 ≪정암 문집≫에 수록된다.
1905년(광서 31년, 만 28세) 봄과 여름 동안 왕궈웨이는 장쑤사범학당에서 가르치며, 날마다 두세 시간을 내어 다시 칸트 철학을 연구했다. 칸트 연구는 이후에도 지속되어 1907년까지 모두 네 차례 진행된다. 이해 9월에 왕궈웨이는 최근 몇 년 동안 ≪교육 세계≫에 발표한 문장들을 모아 고금체시 50수와 함께 묶어 ≪정암 문집≫을 간행한다.
왕궈웨이는 1905년 하반기까지 장쑤사범학당에 있었다. 11월에 뤄전위가 이 학교의 교장직을 사임하고 부친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쑤저우를 떠나는 바람에 왕궈웨이 역시 그를 따라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반년을 머물렀다. 사범 학교에서 왕궈웨이는 심리학을 가르치면서 회프딩의 ≪심리학 개론≫을 번역해415) 참고하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에 그는 철학 공부를 하는 틈틈이 시와 사(詞)416)를 지어 그해에 ≪정안 시고(靜安詩稿)≫ 1권을 편집 출판했다.
1906년(광서 32년, 만 29세) 봄에 청 정부는 학부(學部)417)를 신설한다. 이때 뤄전위는 돤팡의 추천으로 학부에서 일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정식으로 참사관(參事官)이 되었다. 이에 왕궈웨이 역시 뤄전위를 따라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왕궈웨이는 뤄전위의 집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교육 세계≫의 원고를 집필했다. 1906년 8월 여름에 부친상을 당해 왕궈웨이는 한 차례 귀향했다.
1907년(광서 33년, 만 30세) 봄에 왕궈웨이는 뤄전위의 추천을 받아 학부총무사행주(學部總務司行走)가 되었고, 학부 도서관에서 편집과 교과서 등을 편역하고 심의하는 일을 맡는다. 학부에서 일하던 이해 7월에 아내가 몹시 위독해 16일에 하이닝으로 돌아왔는데, 왕궈웨이가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26일에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왕궈웨이는 만 열아홉에 모씨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왕궈웨이의 나이 만 서른 살에 어린 자식[장남 첸밍(潛明)은 1899년에, 차남 가오밍(高明)은 1902년에, 삼남 전밍(貞明)은 1905년에 출생] 셋을 남겨 두고 요절하고 말았다. 왕궈웨이는 비록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주변의 권유와 현실적 필요에 따라 다음 해에 곧장 재혼했지만 첫 아내에 대한 사랑은 여러 편의 애도시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아내의 상을 치르고 8월에 베이징으로 돌아온 왕궈웨이는 학부에서 다음 반년 동안 일했다.
베이징에 온 이후 대략 이 시기부터 왕궈웨이는 철학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되는데, 대략 2, 3년 전, 즉 1904년경부터 이미 철학에 대해 번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형이상학적 염세주의의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체계가 자기 자신의 견식 있는 직관적 지식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1904년에서 1905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왕궈웨이는 이미 쇼펜하우어의 원리는 그 자신의 주관적 성격에 기인한 것이며 객관적 지식과는 관련이 없다고 느꼈고 이러한 인식이 그를 무료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그토록 찬미하고 경도되었던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실망하게 된 것은 너무나 큰 상처였다.
철학에 대한 이와 같은 회의가 지속된 결과 1907년경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문학으로 전향하게 된다. 왕궈웨이는 애초에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 공부를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도리어 자신의 감성과 이성 사이에서 심각한 자아 모순을 겪게 되며, 결국에는 철학에 대한 심각한 권태를 느끼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추상적 철학에 대한 대안으로 왕궈웨이는 ‘구체성’을 지닌 예술과 문예에서 직접적인 위로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말한바 “오직 예술의 특질은 구체를 귀하게 여기고, 추상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418) 때문이다. 그가 이미 1904년경에 <홍루몽 평론>에서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적 해탈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예술 특히 문학을 통한 감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철학에서 문학으로 전향한 것은 왕궈웨이가 두 번째로 스스로 학문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사(詞)와 희곡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한편 이 시기 왕궈웨이는 사 창작의 결과물로 ≪세상의 노래(人間詞)≫(1906∼1907)를 발표하기도 했다.
1908년(광서 34년, 만 31세) 초에 왕궈웨이는 다시 급히 하이닝으로 돌아간다. 그의 계모가 1월 23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때 장모를 포함한 친인척들이 그에게 재혼을 권유해 이해 3월 1일에 그는 여러 대 동안 학자 집안이었던 판씨(潘氏) 집안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 당시 왕궈웨이는 연이어 상을 당한 데다 셋째 아들 전밍이 너무 어려 돌봐 줄 사람이 필요했으므로 친족들이 모두 재혼을 권했지만 감히 결정을 하지 못하던 터에 장모가 강력하게 주장해 마침내 혼사가 이루어졌다. 그는 세 번의 장례와 재혼으로 1908년 초에는 거의 학문에 손을 대지 못했으며 4월에 가족을 데리고 무사히 베이징에 도착해 쉬안우먼(宣武門) 내 신롄쯔(新帘子) 골목에 정착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왕궈웨이는 사 창작의 성공으로 문학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철학에서 문학으로 전향을 꾀했다. 그는 사를 지어 본 경험을 곧바로 이론적 탐색으로 연결해 사학(詞學)에서 자신의 견해를 갖추게 되었다. 그의 유명한 논저 ≪세상의 노래 비평(人間詞話)≫(1908∼1909)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탄생했다. 1908년 말에 왕궈웨이는 ≪세상의 노래 비평≫을 마무리해 ≪국수학보(國粹學報)≫(47기, 49기, 50기)에 발표했고, 1908년 말에는 ≪희곡의 근원 고찰(戱曲考原)≫을 완성해 ≪국수학보≫(48기, 50기)에 발표했는데, 이때 그의 흥미는 사에서 희곡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왕궈웨이는 1907년 이후부터 줄곧 베이징에 머물면서 편집자, 번역자, 행정가로 일했지만 그런 직책이 지나치게 부담이 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오히려 틈틈이 자신의 학자적 흥미를 추구해 나갔는데, 그 흥미는 사 연구에서 희곡 연구로 옮아갔다. 왕궈웨이가 희곡을 연구한 시기는 1907년에서 1912년 사이인데, 1907년은 왕궈웨이가 철학에 대한 사상적 번민을 거친 뒤 문학을 통해 ‘직접적 위로’를 얻기 위해 사와 희곡 연구로 학술 방향을 전환한 시기다. 왕궈웨이는 자신이 희곡에 뜻을 둔 것은 희곡 사업을 진흥하고, 희곡 창작을 번영시키며 나아가 중국 희곡의 불합리한 상황을 타개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희곡의 근원 고찰(戱曲考原)≫ 이외에 ≪악곡 기록(曲錄)≫(1908), ≪귀신 기록부에 대한 교주(錄鬼簿校注)≫419)(1909), ≪배우의 말에 대한 기록(優語錄)≫(1909), ≪당송대의 대곡 연구(唐宋大曲考)≫420)(1909), ≪악곡 기록 여담(錄曲餘談)≫(1910), ≪고전극의 각색 연구(古劇脚色考)≫(1911) 등을 비롯한 일련의 글들을 발표한다. 왕궈웨이의 희곡 연구 대부분은 ≪세상의 노래 비평≫과 마찬가지로 ≪국수학보≫에 발표되었다.421) 희곡 연구의 총결인 ≪송원대의 희곡 연구(宋元戱曲考)≫는 1912년에 완성해, 1913년 초에 상무인서관에서 출판되었다. 이것은 그동안의 희곡 연구 종합판으로 그 자신이 이 책의 서문에서 “(희곡 연구에) 종사한 지 이미 오래되어 계속해서 얻은 바가 있었고, 옛사람의 설이 나의 책과 어긋나는 부분이 나날이 많아지고 있다고 느꼈으며, 내가 메모하고 마음으로 깨달은 것 또한 나날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임자년(壬子年, 1912) 세모에 한가하게 있으면서 여가가 많아 3개월의 공력을 들여 단숨에 써 내려갔다”422)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4년여의 견실한 기초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조 마지막 5년(1907∼1911) 동안 왕궈웨이는 학부(學部) 총무국에서 일한다. 한동안은 편역 도서처에서 번역과 편집일을 돕기도 했다. 그는 당시 광범위하게 사용했던 교재인 제번스의 ≪논리학 기초 교본≫을 번역하기도 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이해 12월에 왕궈웨이는 뤄전위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다. 왕궈웨이는 교토(京都) 다나카 촌(田中村)에 정착했는데, 처음에는 뤄전위와 같은 집에서 살았지만 사람은 많고 집은 비좁아 부근에 따로 집을 얻었다. 그가 살던 집은 교토대학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으며 도착하자마자 뤄전위의 장서는 교토대학에 기증되었다. 왕궈웨이는 뤄전위를 도와 매일 교토대학으로 가서 그의 장서를 정리했다. 이 일은 그가 1915년 잠시 성묘차 귀국한 때를 제외하고는 1916년 초 완전히 귀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생활비는 뤄전위의 원조를 받았다.
왕궈웨이는 일본에 도착한 얼마 뒤에 ≪이화원(頤和園)≫을 지었다. 이 작품은 청조에 대한 비가이며, 서 태후에 대한 찬미다. 왕궈웨이가 1910년대와 1920년대에 보여 준 청조에 대한 충성은 ≪이화원≫에서 예견된다. 그는 이 작품에서 청조의 몰락 속에 물러나는 관료들의 운명과 청조의 비극을 묘사하고 청조의 후은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면서 동시에 위안스카이(袁世凱)에 대한 분개심을 드러냈다. 또한 왕궈웨이는 만청에 대해 도덕적 의무를 강조하고 이것을 자신의 조상과 가문의 정신과 연관시키고 있다. 왕궈웨이는 이 작품을 통해 군주제의 원칙을 고수할 것을 주장하고 위안스카이에게 대항했으며 그 스스로도 변발을 유지하고 서 태후를 찬미했다. ≪이화원≫은 왕궈웨이의 일본인 동료들로부터 대단한 찬사를 받았으며, 열렬한 군주제 옹호자인 뤄전위 역시 열광적으로 ≪이화원≫을 찬미했다.
1911년 혁명 이후 문화적 위기 속에서 왕궈웨이는 정치적으로 보수적 경향을 취하면서 학문 분야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이 같은 변화에는 뤄전위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궈웨이는 일본에 정착하면서부터 뤄전위의 지원을 받으면서 한편으로 그의 장서를 정리해 주는 일을 했다. 더구나 1년 뒤에 뤄전위는 조도사(淨土寺)에 시골 별장 식의 새집을 짓고 장서실도 갖추었다. 장서실이 완공되던 날 그는 마침 여행 짐에서 북위(北魏) 초기의 ≪대운무상경(大雲無想經)≫ 사본을 찾아낸 걸 기념해 장서실을 ‘대운서고’라고 명명했다. 서고는 고대 전적, 비첩(碑帖), 갑골, 종정이기(鐘鼎彛器), 봉니(封泥) 등으로 분류해 사방 벽이 빈틈이 없을 정도였으므로 소형 도서관 겸 박물관과도 같았다.
1911년 이후부터 뤄전위가 왕궈웨이의 학문에 끼친 영향은 특별하다. 그 이전에 뤄전위와 왕궈웨이의 관계는 학문에서는 직접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그 상황이 달라졌다. 1911년과 1912년 사이 암흑의 겨울 동안 뤄전위는 중국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회의주의와 서양 관념의 영향으로 청조가 몰락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이 줄곧 인정하고 지원했던 왕궈웨이와 같은 사람이 학자적 의무로서 국학을 하기를 희망했다. 뤄전위는 왕궈웨이에게 국학 연구에 최선을 다해 보자고 권유했는데, 이것은 왕궈웨이에게 일종의 계시를 준 것 같았다. 왕궈웨이가 고증적 사유와 훈련이 필요한 전통 역사학으로 전향한 데는 뤄전위의 권유도 있었지만 달리 그럴 만한 배경이 있었다. 무엇보다 왕궈웨이는 이미 일본에 오기 전후 몇 년 동안 중국 희곡을 연구하면서 건가학파(乾嘉學派)의 고증학적 역사 연구 방법을 취한 바 있으며, 유년 시절부터 역사서에 관심을 가져 역사학자로서 기본 소양을 쌓아 놓았던 터였다. 이 밖에 당시 시대적 환경도 왕궈웨이의 학문 전향에 영향을 주었다. 이를테면 당시는 고고학적 유물이 많이 발견되던 시기였다.
그의 많은 일본 동료들은 서양 철학을 공부하던 학생이면서 중국 속문학의 권위자였던 왕궈웨이가 1911년에서 1912년 사이의 겨울 동안에 국학으로 전향한 데 당황과 놀라움을 표시했다. 어찌 됐든 왕궈웨이는 이때부터 “이전의 학문을 다 버리고 오로지 경학과 역사학을 연구했다”.423) 일본에는 한학자가 많아 중국의 학술 문화를 대단히 경모했으므로 이것 역시 왕궈웨이가 종래와는 다른 새로운 학문 세계로 전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리하여 1912년경 왕궈웨이는 일본에 살면서 그동안 배운 것을 모두 버리고 지난날 뤄전위가 주었던 제가(諸家)의 책으로 침식하며 국학 연구를 시작했다. 뤄전위는 왕궈웨이에게 자신의 개인 도서관에서 5만 권을 활용하게 하고 수천 편의 비문과 골동품 등을 마음껏 이용하게 했다. 이때부터 왕궈웨이는 고대 중국사 방면에서 세계적이고 선도적인 권위자를 향한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1914년에 뤄전위는 ≪국학 총간(國學叢刊)≫을 복원하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왕궈웨이에게 주편을 맡기고 매월 200원의 보수를 지급했다. 이렇게 해서 왕궈웨이는 마음 편히 학술 연구에 종사하게 된다. 애초에 철학을 버리고 문학을 전공하다가 이때는 문학조차도 완전히 버리고 일심으로 국학 연구에 몰두했다. 왕궈웨이는 1915년에 ≪은허문자에 나타난 지명 고찰(殷墟卜辭中所見地名考)≫, ≪삼대의 지리 소고(三代地理小記)≫, ≪귀방, 곤이, 험윤 고찰(鬼方昆夷獫狁考)≫ 등을 집필해 고대사와 역사 지리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작성 시기로 본다면 왕궈웨이는 일본에 머문 지 2, 3년째 되던 해에 둔황 모가오굴(莫高窟)에서 발견한 당대인의 사본(唐人寫本)을 연구하는 데 진력했다. 이것은 그가 말한 “새로 발견된 학문” 가운데 목간과 갑골문에 이어 셋째 항목이다. 왕궈웨이는 이렇게 교토에 4년 정도 머물면서 발견한 지 얼마 안 된 신학문에 전념했다. 일본에 머물면서부터 왕궈웨이는 이와 같은 일련의 중국 고대 사료(史料), 기물(器物), 문자, 음운 등의 고증 작업에 종사했는데, 다만 이 시기에도 시와 사 창작만은 계속했다. 시와 사를 짓는다는 것은 과거 중국의 지식인에게 일기와 같은 것이었으므로 그는 시와 사를 지으며 향수를 달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6년 1월 2일 왕궈웨이는 4년 동안 머물던 일본을 떠나 닷새 걸려 상하이로 돌아왔다. 사실은 1년 전 왕궈웨이는 가족과 한 차례 귀국해서 뤄전위와 함께 갑골이 출토된 허난(河南) 안양(安陽)에 가 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눈병이 나서 겨우 한 달 정도 머물다가 가솔을 하이닝으로 보내고 자신은 서둘러 일본으로 갔다. 그런데 1916년에 귀국할 때는 사전에 계획을 했다. 사실상 교토에 4년이나 머물면서 왕궈웨이는 생활고에 시달렸으므로 귀국해서 출로를 찾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15년경 뤄전위가 대규모 출판 활동을 벌이면서 상당한 자금이 소요되었기에 왕궈웨이는 더 이상 뤄전위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때 마침 전해 겨울에 동향의 쩌우안(鄒安)이 편지를 보내와 유태인 거상(巨商) 하둔(Silas A. Hardoon)과 학술 잡지를 편집하자고 제안했기에 귀국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뤄전위와 왕궈웨이는 헤어지게 되는데, 이때 뤄전위는 작별 선물로 자신의 소장 도서의 약 10분의 1을 주면서 “덕을 추구하는 부지런함과 용기로 당신은 언젠가는 또 하나의 고염무(顧炎武)가 될 것이다”라고 하며 그를 격려했다.424) 이때 그의 나이 이미 마흔이었으며 귀국 후 상하이에서 7년을 머물렀다
왕궈웨이는 1916년 초에 하둔이 새로 만든 잡지 ≪학술 총편(學術總編)≫의 편집인으로 고용되어 학술 잡지를 편집하면서 교토에서와 마찬가지로 학술 연구에 매진했다. 그 후 1918년부터 창성밍즈대학(倉聖明智大學) 교수를 겸임했다.
일본에서 돌아와 상하이에서 머물던 이 시기에 왕궈웨이는 당시 학계의 중요 인사들과 교류했다. 보수주의적 성격 때문에 그가 사귄 친구들은 주로 청 왕조에서 유명한 인물이었고, 전통적 타입의 탁월한 학자들이었다. 이때 사귄 대표적 인물들로는 선쩡즈(沈曾植), 모우취안쑨(繆荃孫), 장루짜오(蔣汝藻), 류청간(劉承干), 쾅저우이(況周頤) 등을 들 수 있다.
1919년 봄에 뤄전위는 가솔을 데리고 일본에서 귀국해 상하이에 머물며 왕궈웨이와 만난다. 5월에는 상하이에서 왕궈웨이의 장남 첸밍과 뤄전위의 셋째 딸 샤오춘(孝純)이 결혼하면서 왕궈웨이와 뤄전위는 사돈이 되었다. 뤄전위는 그 후 톈진으로 가서 그곳에서 일을 보게 된다.
왕궈웨이가 상하이에서 죽은 사람들의 기록 더미 속을 헤매는 동안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는 청년 학생들이 일어나 민주와 과학을 고취하는 5·4 운동이 일어났다. 혁명의 물결은 북에서 남으로 진행되어 그 기세가 거세어졌다.
시대의 분위기가 급격해져 가던 이해 9월 하순에 왕궈웨이는 각기병이 재발해 한동안 고생했다. 10월에는 장남 첸밍이 세관 직원으로 취직해, 각기병으로 고생하던 그에게 작은 기쁨을 안겨 주었다. 이때 오랫동안 병의 차도가 없자 왕궈웨이는 뤄전위가 있는 톈진으로 가서 치료했는데 그곳에서 약 한 달 정도를 머문 뒤에 약간 차도가 있어서 상하이로 돌아왔다. 상하이로 돌아온 그달에 여섯째 자식 덩밍(登明)이 태어났다.
왕궈웨이는 상하이에서 약 7, 8년간을 머물렀다.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했지만 학술상의 업적은 풍요로웠으니 그의 유명한 논저는 모두 이 시기에 쓰였고, 명성도 점점 높아만 갔다.
1919년 5·4 운동이 지나면서 후쓰(胡適)가 주장한 국학 운동에 따라 그 후 몇 년 동안 국립대학, 사립대학 할 것 없이 국학원(國學院)을 설치했다. 왕궈웨이는 1919년에 후쓰의 교수 초빙을 거듭 사양한 적이 있는데, 1922년에 베이징대에서 그를 국학문(國學門) 교수로 초빙했다. 베이징대 행정가인 마헝(馬衡)은 1919년 후반 친구인 왕궈웨이에게 대학 학부의 한 자리를 제의했다가 거절당했고, 다음 해에 다시 제의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그러나 마헝과 그와 관련된 인물들은 끈질겼다. 그리하여 1922년에 마헝은 왕궈웨이에게 얼마의 돈을 보내고 대학에 새로 설립하는 국학문연구소의 한 자리를 맡아 달라고 했다. 왕궈웨이는 돈도 돌려보내고 그 제의도 거절했다. 그러나 한 달 뒤에 마헝은 다시 그 돈을 보내고 재고를 요구했는데 결국 왕궈웨이는 하는 수 없이 통신도사(通訊導師)를 맡기로 승낙한다. 마헝은 왕궈웨이와는 도쿄물리학교 동창이며, 이때 국학문 강사를 하고 있었다.
1922년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16세가 되어 혼례를 치르고 성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학식 있는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해 다음 해 1923년 음력 3월 1일에 “양종시(楊鍾羲), 징팡창(景方昶), 원쑤(溫肅), 왕궈웨이를 모두 남서방 행주로 임명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남서방은 황제가 독서하던 곳으로 남재(南齋)라고도 하며, 고궁(故宮) 건청문(乾淸門) 서남쪽에 있다. 이곳은 동시에 황제의 개인 비서실 성격도 있었다. ‘행주’는 당직 근무를 한다는 뜻이다. 남서방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모두 진사나 한림(翰林) 출신이며 학문으로 저명한 인물이었다. 그들의 직무는 학문 강론, 서적 조사, 시 낭송, 그림 그리기, 골동품 감상 등으로 청반(淸班), 즉 소위 문학(文學) 시종지신(侍從之臣)에 속했다. 그러나 황제의 신임을 얻어 초안 작성을 돕거나 정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마지막 황제 푸이가 문인 학사들을 대거 초빙한 것은 궁내의 생활이 너무나 무료해서 독서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였다. 남서방 행주는 일종의 관직이며, 왕궈웨이는 평민에서 일약 황제 신변의 ‘근신’이 되었다. 이것은 어쨌든 대단히 영예로운 일로 왕궈웨이 본인도 매우 놀랐으며 상하이에서 그와 왕래하던 유신들도 모두들 기뻐해 주었다. 1년 뒤에 뤄전위도 입궁해 남서방 행주가 되었다. 왕궈웨이는 3월에 교지를 받자 4월 초에 행장을 차려 베이징으로 올라갔다. 선쩡즈가 최근에 죽은 데다가 그동안 해 오던 장루짜오의 장서 목록 작업을 끝냈기 때문에 이때 상하이를 떠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덜 느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남서방 행주의 직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는데 관직에 대한 욕망보다는 이 기회에 극비 서적을 읽을 수 있고, 내부 소장 기물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컸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경양궁(景陽宮)의 서적을 모두 조사하고, 양심전(養心殿)의 이기(彛器)를 감정했다. 그러나 남서방 행주라는 직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924년 펑위샹(馮玉祥)의 국민군이 베이징을 침략해 새로운 내각을 만들고 푸이를 자금성에서 내쫓았다. 11월 5일 황제가 궁전에서 빠져나갈 때 왕궈웨이는 어쩔 수 없이 황상을 동반해 총알과 폭탄이 빗발치는 한복판을 지나 북쪽 저택으로 갔다. 몰락의 날 베이징 거리를 통과하는 두려운 여정에 왕궈웨이는 청 후손의 개인적 안전에 대한 우려로 시달렸을 것이다. 왕궈웨이는 마지막 황제의 편에 충성스럽게 서서 수행원이 없는 그를 차마 떠나지 못했다.
황제가 일본 영사관으로 피신한 뒤에 왕궈웨이는 후쓰의 추천을 받아들여 1925년부터 칭화대(淸華大) 국학연구원의 교수가 되었다. 칭화대는 1925년 하반기에 칭화학교에서 대학으로 개칭하고 이와 동시에 국학연구원도 정식으로 성립되어 개학했는데, 이 일이 있기 전인 1924년 10월에 왕궈웨이는 후쓰의 추천으로 원장 초빙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왕궈웨이는 푸이의 출궁으로 남서방 행주직을 그만둔 데다 겸직하고 있던 베이징대 연구소의 국학문 통신도사 역시 사직했기 때문에 달리 먹고살 길이 없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왕궈웨이를 존경해 오던 구셰강(顧頡剛)이 그의 은사인 후쓰에게 왕궈웨이의 생계 문제를 상의했던 것이다. 왕궈웨이는 처음에는 후쓰의 제의를 거절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긴박한 때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영사관으로 황제가 피신한 뒤에 왕궈웨이는 그가 믿을 만한 곳에 있다고 생각했고, 더구나 경제적 궁핍으로 괴로워했기 때문에 후쓰의 제의를 재고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런 순간에 조총장이 존스톤에게 대학의 입장을 황상에게 전달해 달라고 요구했고, 후쓰도 황제를 만났다.425) 존스톤과 후쓰의 노력으로 왕궈웨이는 1925년 정월 어느 날 일본 영사관으로 불려갔고 황상은 왕궈웨이에게 칭화대학에 새로 세워진 국학연구원의 역사학과 교수직을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당시 왕궈웨이는 자신의 상황이 너무나 비참했기 때문에 결국 칭화대학의 교수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1925년 3월에 왕궈웨이는 청화원(淸華院) 서원(西院)으로 옮겨 원장직은 사양하고 교수직만을 맡았다.
당시 왕궈웨이가 원장직을 사양했기 때문에 연구원주위회(硏究院籌委會) 주임인 우미(吳宓)가 연구원의 주임을 맡았고, 이어서 량치차오(梁啓超), 자오위안렌(趙元任), 천인커(陳寅恪) 등이 교수로 초빙되었다. 이때 리지(李濟)가 강사를 하고 있었고 푸장칭(浦江淸), 자오완리(趙萬里) 등은 조교를 했다. 량치차오, 왕궈웨이, 천인커는 명성이 높아 ‘삼거두(三巨頭)’로 불렀다. 청화연구원에서는 량치차오, 왕궈웨이, 천인커, 자오위안렌의 직함을 지도스승(導師)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학술상의 지위가 보통 대학교수보다 높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의도였다.
칭화대학에서 왕궈웨이의 생활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무엇보다 연구소에서 그는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둘러싸였으며 그들은 모두 그를 학자로서 인간으로서 존경해 주었다. 왕궈웨이는 이곳에서 그 자신의 지적 흥미를 추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후에 그는 초기 몽골 시기의 역사와 지리 연구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학기가 시작되기 여러 달 전에 청화 교정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에 왕궈웨이는 안정된 환경 속에서 1925년 여름 내내 칭기즈 칸의 비서인 야율초재(耶律楚材)의 연보를 완성하고 ≪원조 비사 지명 색인(元朝秘史地名索引)≫ 등을 썼다. 왕궈웨이는 이해 8월에 뤄전위의 회갑연을 축하하러 톈진으로 가기도 했다. 가을 학기에 그는 일주일에 서너 시간 그에게 매우 친숙한 주제[예를 들어 ≪상서(尙書)≫, ≪설문해자(說文解字)≫ 등]에 대해 가르쳤다. 맡은 수업이 가벼웠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연구를 수행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왕궈웨이는 또한 국가적 사업으로 서북 변경 지리(西北邊疆地理)와 요(遼), 금(金), 원(元)의 역사를 연구했다. 당시 그는 학계의 거두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이 되었는데, 거의 쉰이 다 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와 고대 소수 민족 문자에 정통한 소장학자 뤄쥔추(羅君楚, 당시 20여 세)와 천인커(陳寅恪, 당시 30여 세)에게 찾아가 배움을 청할 정도로 학문에 정열을 쏟았다.
청화원에서 조용한 생활을 보내던 그는 1926년 말엽 일련의 심각한 사건을 겪으면서 우울해졌다. 1926년에 그의 장남이 사망한 데다 장례 문제로 그의 아내와 며느리(뤄전위의 딸)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오랜 후원자인 뤄전위와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하게 된다. 게다가 1927년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시대의 불안감은 극대화되었고 그는 나라의 미래와 황제의 안전에 대해 낙담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해 대단히 비관적이었고 자살하기 바로 전날인 1927년 6월 1일에 삶의 허무와 체념을 드러낸 글을 남기고, 다음 날 오전 이허위안(頤和園) 쿤밍호(昆明湖)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의 몸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이 세상의 변화를 겪게 되었으니, 옳음으로 다시는 욕되지 않으리라”라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 황제 푸이는 왕궈웨이에게 “충각(忠悫)”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왕궈웨이는 한족 출신이면서도 변발을 고집했고426)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스승으로 지내며 장제스(蔣介石)의 북벌군이 베이징 점령에 나서던 무렵에 베이징 이허위안의 연못에 투신자살했다는 점에서 구체제에 집착한 보수주의자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동서고금 문화의 접점에 있던 학자로서 그 접점을 가장 넓고 깊게 그리고 독창적으로 개척한 지식인이었다.
그의 자살을 두고 현실 감각의 결여를 말하지만 그것은 다만 말하기 쉬운 타인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스스로는 삶과 화해할 수 없는 불편한 마음의 극단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개인적 측면과 시대적 측면 모두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자살을 즈음해서 장남의 죽음을 맞이해 몹시 우울했던 데다 이 사건과 더불어 오랫동안 절대적 후원자였던 뤄전위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사생활에서 이러한 심리적 고통을 받은 데다 신체상으로도 질병이 많아 죽기 몇 개월 전까지도 각혈을 할 정도로 병고에 시달렸다. 이와 같이 개인적으로 심신의 고난을 겪으면서 본래 늘 가슴 깊이 자리 잡았던 삶에 대한 비관주의는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또한 시대적으로도 동요의 시대라 이미 두려움을 당한 바 있는 황상의 안전을 염려하고 전통문화의 붕괴를 걱정하던 왕궈웨이로서는 안팎으로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결국 왕궈웨이의 죽음은 그 자신의 인생 역정 모순의 총화로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죽음의 순간 그의 삶은 엉킨 실타래처럼 모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의 자살은 자아와 세계의 지속적인 모순이 극단에 이르러 더 이상 현실에서 비상구를 찾지 못했을 때 이루어진 마지막 선택으로 보인다.
<사상과 업적>
왕궈웨이는 철학과 예술은 우주와 인생의 만고불변한 진리를 탐색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이에 근거해서 중국의 전통 학술에는 순수 학문이 없으며, 순수 철학, 순수 예술, 순수 문학이 결여되었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근대 중국 학문의 실용주의와 정치적 수단화, 서양 추종의 경향에 대해 비판했다. 이와 같은 비판 의식에 근거해 왕궈웨이는 학문 방법론으로 세계 순수 학문을 두루 통달해야 한다고 했다. 즉, 학문의 이념이 우주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으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국학이니 서구학이니 하는 것을 따질 필요는 없으며, 중국 것과 서양 것의 비교를 통해 각각의 장점을 자유롭게 취해야 한다고 했다.
왕궈웨이는 철학 방면에서는 중국 최초로 칸트와 쇼펜하우어, 니체 등을 소개하면서, 중국 철학의 주요 개념과 서양 철학의 개념을 비교 분석했다. 그는 칸트의 비판 철학과 순수 미학을 공부하고 칸트 철학보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과 해탈의 미학에 경도되었다. 그는 순수 철학과 순수 미학을 주장하며 ‘미’의 성질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보았다.
교육 비평가로서 왕궈웨이는 전인 교육, 소수 엘리트 교육을 주장하고 덕성 교육, 지성 교육, 체력 교육과 함께 미적 교육을 통해서 ‘완전한 인간(全人)’ 교육을 실현할 수 있으며, 미적 교육 가운데 특히 문학이 인간의 정서를 함양하고 마음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백 명의 정치가를 탄생시키는 것은 한 명의 대문호를 탄생시키는 것만 못하다”라고 주장해 문학 연구자의 자부심을 부추기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왕궈웨이는 문학의 성질을 실러의 미학관에 따라 ‘유희성’으로 규정하고 문학의 표현 대상으로서 감정과 경물, 상상에 대해 그리고 인식 방법으로서 직관과 개념에 대해서 논하며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無用之用)’이라는 순수 문예관을 정립했다.
왕궈웨이는 평생 학문을 연마해 광범하고 깊은 학문 세계를 구축해 학술상 지대한 공헌을 했다. 젊은 시절에는 철학과 문학 연구에 종사해 그 성과물을 ≪정암 문집≫으로 묶어 냈다.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의 철학 사상을 소개하고 이를 근거로 정주이학(程朱理學)을 비판했을 뿐 아니라 근대 중국 최초로 서양의 철학과 미학 그리고 문학 관점과 방법을 운용해 중국 고전 문학을 평론해 새로운 기풍을 창도했다. 작가로서는 ≪세상의 노래(人間詞)≫라는 작품집을 냈는데 100여 수의 사(詞)를 묶은 것으로 인생에 대한 철학적 의문을 언어 예술로 형상화했다. 시학 방면에서는 중국 고전 시학의 집대성으로 평가받는 ≪세상의 노래 비평(人間詞話)≫이 있는데, 그 핵심 이론은 “경계설(境界說)”이다. 그는 ‘경계’의 조건으로 ‘참된 감정’과 ‘참된 경물’을 제시했는데 ‘경계’의 창조 과정은 첫째, 인격과 학문의 수양, 둘째, 현실 체험과 미적 정관, 셋째, 현실 모사와 이상화의 통일, 넷째, 선명성, 생동성, 함축성 있는 형상화로 설명할 수 있다. 다음으로 경계의 범주로서 첫째, 유아지경과 무아지경, 둘째, 만든 경계와 그린 경계, 셋째, 큰 경계와 작은 경계 등을 제시했다. 희곡 방면에서는 ≪송원대의 희곡 연구(宋元戱曲考)≫가 있는데 이는 희곡 연구사의 새로운 기풍을 창조해 중국 희곡 연구의 경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에서 왕궈웨이는 원대 잡극의 문학사적 지위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리고 원대 잡극의 우수성은 ‘자연스러움’과 ‘의경’이라 평하며, 비극 이론에 근거해 원대 비극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렸다. 만년에는 사학(史學), 고기물학(古器物學), 고문자학(古文字學), 음운학(音韻學) 특히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과 한진간독(漢晉簡牘) 연구에 전력을 다해 사학계(史學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중국 사학사에서 역사학과 고고학을 결합한 연구를 처음으로 시작하고 체계적인 표준과 방법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방대한 유서들은 철학, 문학, 미학뿐만이 아니라 사학, 고고학, 고문자학, 음운학, 판본 목록학, 둔황학, 서북 변경 지리 등 다양한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왕궈웨이는 국제적 명성을 지닌 저명한 학자로 문학가이자 사학자, 고고학자, 금석학자, 번역 이론가로 평생의 저술은 62종에 달하며 문학, 미학, 사학, 철학, 고문자학, 고고학 등 방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세운 학술 거인이자 국학대사(國學大師)로 중국 학술사에 군림하고 있다.
역자 - 류창교
류창교는 안동 하회에서 태어나 한국고등 교육재단에서 한학연수 장학생으로 사서삼경을 수학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왕국유(王國維) 문예 비평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동아시아어문과 특별연구원, 중국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방문학자, 숙명여자대학교 인문학부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미국(美國)의 중국 문학(中國文學) 연구(硏究)≫(2003), ≪세상의 노래 비평, 인간사화(人間詞話)≫(역주서, 2004),≪왕국유 평전≫(2005), ≪완역 설도 시집≫(2012), ≪완역 어현기 시집≫(2013) 등이 있고, 중국 고전 문학과 중국 여성 문학에 대한 논문이 여럿 있다.
<정암 문집>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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