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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하젠클레버 Walter Georg Alfred Hasenclever

    발터 하젠클레버 프로필

  • 국적 독일
  • 출생-사망 1890년 7월 8일 - 1940년 6월 22일

2015.01.21.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발터 하젠클레버(Walter Georg Alfred Hasenclever)
발터 하젠클레버는 1890년 독일 중서부 도시 아헨(Aachen)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큰 기업의 딸이었고 아버지는 의사였다. 그런 부르주아 집안의 분위기는 그의 성장 과정에서부터 후에 갖게 되는 정치적 성향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당시 아헨 시민들의 생활은 말도 못하게 가난하고 비참했다. 그가 태어난 주에만 수십 명이 굶어 죽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가족은 커다란 저택에서 풍요롭게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건장했으나 병적일 만큼 고집이 세고 독특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예술이고 학문이고 모두 ‘현대’ 자(字)만 붙으면 광적으로 증오하고 멀리했다. 대신 가정에서는 매우 꼼꼼하고 인정사정없이 엄격했다. 의식적으로 아들을 억압하고 매사 간섭했다. 지나칠 정도로 아들을 엄격하게 교육했다.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 있는 자신의 상류층 가문에 어울리는 아들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하젠클레버는 숙제를 제대로 못하면 그때마다 아버지로부터 매를 맞거나 혼쭐이 났다고 회고하고 있다.
아들을 임신했을 때 어머니는 임신중독증에 걸려 정신병원 신세를 질 정도로 힘들었다. 그 결과 어머니의 손길이 자식에게 닿지 않았고 사랑은 물론 가정교육까지도 모두 가정부 아니면 아버지의 몫이 되고 말았다. 친구인 핀투스(Kurt Pinthus)에 따르면 하젠클레버는 어머니에 대한 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한다.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거의 없었다. 반대로 어머니는 일생 동안 아들을 증오했다고 가정의는 기록하고 있다. 이런 험악한 가정 분위기로 인해 하젠클레버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살을 꿈꾸게 되었는지 모른다. 열여섯 살이 된 그는 자살이란 제목의 작문을 네 편이나 쓴다. 자살이란 국가, 교회, 사회의 차원을 넘어 홀로 그 정당성이, 그 당위성이, 그럴 권한이 개인에게 있음을 열거하고 있다. 자살에 대한 이런 생각은 그의 전 작품에 골고루 스며들어 있다. 집에서 자살을 생각하다가도 할아버지 댁에 가면 사랑을 느끼곤 했다. 특히 할머니의 사랑에 그나마 위로를 받았다.
독일에서는 20세기에 접어들어서까지도 부유한 집의 아이들은 전통적으로 집에서 일정 기간 가정교사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개인 교사에게서 교육을 받던 그는 드디어 1899년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김나지움(Gymnasium)은 국가주의에 투철하고 정통 독일식 사고를 따르는 가족의 자녀들이 다니게 되어 있었다. 하젠클레버에게 전제적인 학교와 지옥 같은 집이 서로 전혀 다를 바가 없었으나 그래도 학교에서는 작문 시간에 독재를 일삼는 선생에게 항거하는 글을 쓸 수는 있었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에게 어느 정도 앙갚음은 되었다.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의 집을 방문하게 되면서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던 현대문학을 접하게 되었다. 숲에서 친구들을 만나 자신이 쓴 글을 낭독하거나 때로는 친구들에게서 칸트, 쇼펜하우어, 헤겔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피카소의 그림이나, 니체, 도스토옙스키 등의 작품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런 친구들과 사귀면서 하젠클레버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에 감동을 받고 정신없이 그 속으로 빠져들었다. 1908년 김나지움을 졸업했다. 성적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간신히 졸업한 하젠클레버는 아버지의 요구대로 영문학, 영국사, 영국의 예의범절, 관습, 전통 등을 다양하게 공부하기 위해 옥스퍼드로 갔다. 하젠클레버는 법학을 전공하게 되어 있었으나 전공에 전념하기보다는 아버지로부터 해방된 기쁨과 자유를 만끽하며 첫 번째 드라마 <열반(Nirwana)>을 쓰기 시작했다. 출판 비용을 직접 부담해서 아헨 시장의 비리를 파헤치는 이 작품을 출간까지 한다.
아들이 드라마나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아버지는 한 학기가 끝나자 아들을 스위스 로잔으로 보낸다. 아버지 못지않게 고루하고 엄격한 아버지 친구의 집에 머물게 된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과에 등록했으나 실제로는 독문학, 철학 강의를 들었다. 이 시기에 그는 공부는 제쳐 놓고 집필에 몰두했고 <제국(Das Reich)>이라는 비극을 썼다.
1909년 그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한밤중에 라이프치히로 도주한 것이다. 이곳에서도 아버지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기 위해 법학을 전공한다. 하지만 독문학, 철학, 예술사에 관심을 두었다. 그나마도 공부에 열심히 덤벼들지는 않았다. 이를 눈치챈 아버지는 학비 원조를 일절 끊어 버렸고 부모와의 인연은 완전히 끝나고 만다. 하젠클레버는 그 후 할머니의 도움을 받게 된다.
라이프치히에서 시인이며 비평가인 핀투스와 어울린다. 출판인 로볼트(Rowohlt) 주위에 몰려든 여러 예술가들과도 친분을 쌓았다. 이 모임은 표현주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예술가 단체였다. 무절제한 생활이 이루어졌다. 시를 마구 썼다. 1913년 시집 ≪젊은이(Der Jüngling)≫가 출간되었다. 이 시집에는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한 젊은이의 체험담을 담고 있다. <끝없는 대화(Das unendliche Gespräch)>, <첫날 밤(Die Hochzeitsnacht)> 등 단막극 몇 개가 이 시기에 발표된다.
1914년 하젠클레버의 가장 성공한 작품 <아들(Der Sohn)>이 완성된다. 표현주의 색채가 강한 이 비극은 작가가 겪은 어린 시절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아들로 태어난 젊은이들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엄격한 아버지 세대에 반기를 든 작품이다. 아들도 아버지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가 있음을 과시하고 있다.
그해 7월에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자원입대한다. 그다음 해 포병대대에 배속되었으나 일주일 만에 실전 배치에서 배제된다. 지원병이었던 그가 몇 주 만에 반전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과 달리 군 복무를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벨기에, 그 후 동부전선에 투입되어 행정관으로 근무하게 된다. 1916년 반전 드라마 <구원자(Der Retter)>를 써서 힐러 등 몇몇 문인들에게 보내지만 검열 당국의 개입으로 출판이나 그에 상응하는 어떤 발표도 무산된다. 군 복무를 벗어나기 위해 그는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떠들어 댄다.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는다. 이 기간 동안 외부와 격리된 채 여유를 가지고 작품을 구상한다. 이때 탄생한 비극이 전쟁과 폭력, 강간 등을 다룬 <안티고네(Antigone)>(1917)다. 소포클레스의 주제를 새롭게 담은 이 비극에서 그는 비명과 고함으로 대화를 채웠고 과격한 표정과 동작으로 효과를 살려 많은 관객을 끌어들였다. 이 작품으로 그는 젊은 극작가에게는 최고의 영예인 ‘클라이스트 상(Kleist-Preis)’을 받는다.
1919년 일련의 정치적 주제를 다룬 창작 작업에 몰두하고 시집 ≪정치 시인(Der politische Dichter)≫(1919), 드라마 <전환(Die Umkehr)>(1919) 등을 발표한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연극을 통해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가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정치에서 등을 돌리려 새로운 연극을 모색한다. 언어, 동작, 형상, 짧은 대사 등을 담은 새로운 작품으로 연극 자체만을 위한 연극을 생각한다. 춤극, 팬터마임, 영화, 마술 공연에 정신없이 빨려 들어간다. 언어에 예속되는 연극이 아닌 동작 위주의 무대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표현주의 시대상에 걸맞은 사회문제를 주제로 다룬 <인간들(Die Menschen)>(1918)에서 하젠클레버는 지나칠 정도로 간결한 대화체를 사용해 아주 색다른 무대를 만들었다. 관객으로부터는 외면당했지만 개의치 않고 그 길을 고수하기로 마음먹는다. 예를 들면 <페스트(Die Pest)>(1920), <저세상(Jenseits)>(1920) 등에는 5막인데도 두 사람만이 등장한다. 현실과 비현실, 죽음과 삶이 뒤엉켜 있어 작품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하젠클레버는 1920년 중반 불교와 신비주의에 빠져든다. 신비주의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듯했다. 다른 작가들에게도 유행처럼 번진 이런 입장은 1차세계대전의 후유증이기도 했다. 이제 자신의 영혼에만 관심을 두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작이 필요했다. 그의 시는 릴케 혹은 신낭만주의 형식을 따르고 있고 드라마의 경우 입센과 같은 노선이라 할 수 있다. 핀투스의 주선으로 1924년 베를린 ≪8시 석간신문(8-Uhr-Abendblatt)≫의 특파원이 되어 파리로 간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1925년 <살인(Mord)>이라는 비극으로 표현주의와 결별하고 그곳에서 정신없이 수필, 문예평론 등을 쓰며 한편으로는 투홀스키(Kurt Tucholsky)와 같은 작가 겸 언론인과의 친분을 쌓는다. 파리에 머물며 프랑스 연극에 자극받아 자신의 작품 세계를 비극에서 희극으로 전환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희극작가로 변신한다. 이런 전환은 1926년 <멋쟁이 신사>가 크게 성공함으로써 기가 막히게 이루어졌다. 이 희극은 베를린에서 초연이 있고 나서 1년에 100여 곳 이상의 무대에서 막이 오른 성공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 작품에 이어 연달아 두 개의 희극이 발표된다. <사랑은 천국에서 맺어지리라>(1928), <나폴레옹 끼어들다(Napoleon greift ein)>(1929). 인간을 혼란에 빠트릴 정도로 무기력한 하나님과 돈의 힘에 꼼짝 못하는 군사력을 희화적으로 그리고 있는 두 작품은 모두 성공했으나 교회 측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하젠클레버의 희극은 이야기의 전개보다는 인물들의 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로써 예술성이 살아난다. 후반기에 하젠클레버는 드라마보다는 자서전적 산문 형식을 더 선호했는데 이는 자신의 고통을 더욱 상세히 기록해 두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1929년 하젠클레버는 특파원을 그만두고 베를린으로 돌아간다. 이 시기에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한편 엠지엠 영화사(MGM Studio)와 시나리오 작업을 하게 된다. 1933년 독일의 보수적인 유권자들은 히틀러를 선택한다. 나치가 집권하면서 하젠클레버의 책은 모두 불태워졌고 그의 시민권도 박탈된다. 이제 독일은 하젠클레버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곳이 된다. 1934년 프랑스 니스에서 에디트 셰퍼(Edith Schäfer)를 만나 결혼한다. 여기에서 <뮌히하우젠 남작(Münchhausen)>(1934)을 쓴다. 런던, 파리, 니스 등 여러 도시를 정신없이 떠돌아다니다가 1937년부터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에 정착한다. 1938년 히틀러가 이탈리아를 방문해 무솔리니와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때 하젠클레버는 히틀러를 반대하는 요주의 인물로 간주되어 안전상의 이유로 열흘간 감금된다. 이탈리아 당국이 하젠클레버가 토스카나에 정착한 이후 그를 500여 명에 달하는 위험한 망명객 명단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게슈타포에 연행될까 두려웠던 나머지 그는 가짜 여권을 만들어 이탈리아를 탈출해 프랑스 칸에 잠입한다. 1939년 두 번이나 체포되지만 친구인 장 지로두(Jean Giraudoux)의 도움으로 석방된다. 1939년 자서전적 소설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 (Die Rechtlosen)≫은 하젠클레버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서 폭력으로 삶의 공간이 사라짐을 폭로하고 수용소 생활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정원에 앉아 있었다. 아마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전쟁이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시골 풍경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구제의 길도 보이지 않았다. 추방당한 우리들, 고향을 빼앗긴 우리들, 저주받은 우리들, 우리에게 살아야 할 무슨 권리가 남아 있을까? 다른 사람들도 죽을 수밖에 없다. (…) 자신의 시인들을 이해해 주지 않은 국민들, 이들의 일원으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던 것, 우리가 쓴 것을 모두 널리 알렸다고 믿었다. (…) 독일은 악마의 가면에 가린 채 악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런 세상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이 완성된 직후 다시 체포되어 엑상프로방스(Aix- en-Provence) 근방의 수용소(Les Milles)에 감금된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엮은 자서전적 소설 ≪착각과 열정(Irrtum und Leidenschaften)≫(1934∼1939)에서 자신의 삶을 참회하고 회고한다. 이 유작은 1969년 친구 핀투스의 손으로 발간되었다.
1940년 독일 군대가 밀어닥치자 하젠클레버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죽음 이외에 더 이상 어떤 다른 삶의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하젠클레버는 의사 집안의 아들이었다. 덕분에 죽으려면 어떤 약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정도의 짧은 상식은 있었을 것이다. 죽는 순간에 의사 가문임이 이렇게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하니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당시에 이미 수면제는 의사 처방 없이는 살 수 없었으나 하젠클레버는 어느새 충분할 만큼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독일 군대가 프랑스로 진격해 들어오자 많은 망명객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다른 나라로 계속 도망치거나 아니면 숨어 버리거나 아니면 체포되는 수밖에 없었다. 체포되면 나치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나치 군대에 붙들려 수용소에 끌려가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하젠클레버는 결심한다. 프랑스 수용소에서 스스로 택한 죽음은 사실은 순간적인 결단이 아니라 몇 십 년 동안 지속된 고난의 종착역이었을 뿐이다. 제삼제국의 언론은 하젠클레버의 자살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바이마르를 대표하는 작가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실은 바로 나치가 벌인 문화 투쟁의 성공을 대신 확인해 주는 것이다.” 6월 21일 밤 수면제(Veronal)를 다량 복용한다. 그 이튿날까지는 살아 있었다.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고 만다.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작가는 이렇게 죽었다. 향년 50세였다. 하젠클레버는 엑상프로방스의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죽기 전 하젠클레버는 부인 에디트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다. 눈물을 흘리며 쓴 이 마지막 편지는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보다 더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며 촉촉이 적신다.

사랑하는 당신, 절망의 순간이 점차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오. (…)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모르지만 곧 끝장이 날 거요. 당신이 이 편지를 받아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이 편지를 보낸다오.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지만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오. 나를 이해해 주리라 믿소. 용서해 주구려…. 내게 보내 준 당신의 마지막 엽서를 보니 악령에 쫓기는 내 모습 때문에 당신이 내게 품은 원망은 그리 크지 않은 모양이오. 고맙구려. 당신은 삶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나 때문에 희생하고 말았소. 그 대가로 내가 당신에게 보답해 준 것은 너무 초라하구려. 누구보다도 당신이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음을 나는 오늘에야 깨닫게 되었다오. 여보, 당신이 내게 보여 준 사랑과 은혜에 이제 눈물로 감사를 드리오. 나는 스스로 마지막 길을 선택하기로 했소. 그렇지만 마지막 순간에, 맹세하지만, 그 순간에 당신을 생각할 것이오. (…)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만, 죽는 순간에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 법이라오. 당신 곁에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 (…)

사랑과 감사한 마음으로 당신을 안아 보오!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는 당신의 발터.

역자 - 이재진
이재진은 한국외국어대학에서 독일 문학을, 쾰른(Köln)대학에서 연극학을 전공했다. 극작가들 중 레싱, 실러, 클라이스트, 뷔히너, 헤벨, 베데킨트를 중점적으로 연구했다. 특히 브레히트와 뒤렌마트에 전념했다. 뒤렌마트의 <로물루스 대제> 등 많은 작품을 연출했고 브레히트의 <코카서스의 백묵원> 등 여러 희곡을 번역했다. 방송과 공연을 통해 어린이·청소년극과 라디오 드라마 활성에도 노력했다. <브레히트 후기 희곡 작품의 3차원적 구조에 관하여>, <베데킨트 드라마에 나타나는 여성상과 신화적 특성> 등의 논문이 있다. 단국대학교 명예교수다.

<멋쟁이 신사>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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