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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충행

  • 국적 대한민국
  • 출생 1944년

2015.03.12.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신충행
나는 1944년 일본 사세보 시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밀항해 10년을 혼자 지내시다가 그곳에 생활 터전을 마련해 놓고 솔가해 가려고 귀국하셨다. 열일곱 살 난 아들을 이웃의 동갑내기 처녀와 결혼시킨 다음 가족과 더불어 다시 도일했다고 들었다.
나는 일본에서 열아홉 살 동갑내기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해방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가족을 거느리고 귀국하셨다.
산청군 단성면 청계리 산마을이었다.
아래위 담을 통틀어도 겨우 쉰 가구 남짓인 작은 마을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내가 돌을 지냈을 때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해방된 고국으로 귀환했다. 할아버지는 귀환한 후 내내 병을 앓다가 쉰을 눈앞에 둔 연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1960년 북한이 남침해 왔다. 6·25 동란이었다.
나라에서는 산마을 사람들에게 소개 명령을 내렸다.
마을 사람들은 졸지에 생활 터전을 잃게 되었다. 산 넘고 재를 넘어 좀 큰 마을로 피란을 떠났다.
우리 가족도 집과 농토를 버리고 피란을 떠났다.
우리 가족이 피란 나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은 단성면과 접경지인 신안면 신안리란 국도 연변 마을이었다.
그곳은 우리나라에 목화를 처음 전해 겨울을 따뜻하게 만든 문익점 선생의 묘소가 있었다.
북한군이 내려올 때는 오히려 잠잠하던 마을이 유엔군 참전으로 북한군이 쫓겨 올라가기 시작하자 큰 소란이 일었다.

타지로 나간 우리 가족은 발동기를 사서 방앗간을 차렸다. 방앗간을 차린 곳은 신안리에서 시오 리 떨어진 강누리라는 강마을이었다.
신안리에서 강누리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반 거리였다.
아버지는 아침 식사를 끝내고 강누리 방앗간으로 가서 여름철에는 마을 사람들이 가지고 오는 보리를, 가을에서 겨울철까지는 벼를 찧어 주고 약간의 곡식(쌀이나 보리쌀)을 세로 받았다.
북한군 도발 후 몇 개월 되지 않아서 유엔은 한국전에 유엔군 파견을 결의했다. 전쟁이 일어난 지 채 반년도 안 돼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나라는 전쟁 때보다 연합군이 실지를 수복하게 되었을 때 오히려 소란해졌다. 패전해 후퇴하다가 낙오한 공산군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웅석산도 그들의 근거지가 됐다.

우리가 피란 가서 살았던 신안리에서 300m쯤 떨어진 국도변에 문익점 선생 묘소가 있었다.
사람 보기도 어려운 청계리 산마을에 살다가 소개(疏開)당해 나온 내겐 수시로 오르내리는 신작로의 차들이 구경거리였다.
강누리에 방앗간을 연 아버지는 시오 리 길을 매일 걸어서 오르내리며 방앗간 일을 돌보셨다.
보리와 벼 한 섬을 찧어 주고 거둬들이는 삯은, 섬당 보리쌀은 한 되고 쌀은 반 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방앗간과 집을 오르내리는 동안에 아버지는 무슨 병을 얻었는지 몸이 점차 야위고 힘을 잃어 가셨다.
몸이 약해지다 보니 매일 왕복 30리 가까운 통근을 힘들어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저녁 때 돌아오신 아버지는 식사를 거르고 자리에 누우셨다. 아버지는 그러시고도 다음 날도 아침 일찍 방앗간으로 나가셨다. 그러다가 마침내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병석을 한 열흘 지키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여섯 살, 손아래 남동생이 네 살, 막내 여동생이 겨우 돌을 지났을 때였다.
아버지가 방앗간에 가서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문익점 선생 묘소가 있는 국도의 고갯길을 막 거슬러 올랐을 때였다. 길섶 산기슭의 풀밭에서 음산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소리 나는 곳으로 가 보았다.
누더기 차림을 한 거지 하나가 끙끙 앓으며 물을 찾고 있었다. 정에 약한 아버지는 문익점 선생 산소 옆으로 흐르는 도랑으로 가 칡 잎을 따서 물을 떠 담아 가지고 앓고 있는 거지에게 가서 마시게 해 주었다. 거지는 전쟁이 일어나자 피란을 내려와 고개 아래의 구역이란 마을에서 머슴살이하던 청년이었다.
그때 경남 산청 지방에는 유행성 전염병이 창궐했다. 거지는 구역에서 머슴살이하다가 병을 얻어 드러눕게 되었다. 머슴이 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주인댁에서는 그를 거적에 싸서 거기에 내다 버린 것이었다.
나는 철이 들면서 그때 그 피란민 머슴이 앓던 전염병이 아버지에게 옮았던 것이라고 유추했다. 아버지는 자리에 누운 지 보름을 약 한 첩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앓다가 어머니와 아내와 어린 삼 남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마저 잃은 우리 가족은 방앗간이 있는 강누리로 이사했다. 이삿짐이라야 낡은 이불 두 채와 밥그릇, 입을 옷 몇 가지에 물동이가 전부였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오래지 않아 그동안 무슨 병에 걸렸는지 시름시름 앓던 주인댁 아들도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이사할 때였다. 할머니와 동갑내기인 집주인은 자기 아들이 병에 걸려 죽은 것이 우리 아버지에게 병이 옮았기 때문이라며 살려 내라고 할머니와 어머니를 못살게 굴었다. 그런데도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무 소리 못 하고 며칠을 더 견디다가 이사를 했다.
이삿짐은 외할아버지께서 외삼촌 두 분과 함께 오셔서 날라 주셨다.
우리 가족은 강누리 방앗간을 차린 집 사랑채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새 주인댁에선 예순도 안 된 시어머니와 아이 셋을 거느리고 홀로 된 어머니를 몹시 안타까워하며 잘 돌봐 주셨다. 주인댁 할머니는 큰아들이 세상을 떠나자 혼자된 며느리와 어린 손녀딸 둘을 데리고 살았는데 막내아들은 부산에서 고무신 공장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주인 할머니는 무슨 특별한 음식이라도 생기면 꼭 우리 할머니에게 드리라며 나누어 주곤 했다. 어머니는 그런 할머니를 고마워하며 마치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 모시듯 하셨다.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어머니는 그 할머니의 비단옷을 빨아야 하거나 새로 지을 일이라도 생기면 늘 도와 드리곤 하셨다.
그 할머니는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손녀에게 나를 오빠라고 부르도록 타이르곤 하셨다. 손녀의 이름은 유녀였다. 유녀가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나 1970년대엔 간혹 만났다. 유녀는 나를 만나면 오빠라고 반가워했다. 그녀의 남편도 종종 찾아와 안부를 묻곤 했다.
우리는 유녀네 문간방에서 2년 동안 살다가 다시 단성면 소재지인 남산리라는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방아 기계까지 옮겨야 했다. 외할아버지께서 두 외삼촌과 함께 짐을 나르러 오신다고 해도 옮기는 일은 불가능했다.
이사를 결정하고 그 사실을 유녀 할머니께 말씀드렸을 때였다. 유녀 할머니는 이사를 가더라도 방앗간은 그 자리에 그냥 두고 몸만 옮기라고 권하셨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단성은 면 소재지였다. 강누리는 들이 꽤 넓었으나 그 지주들은 대개가 단성 읍에 사는 유지들이었다. 그들은 단성 정미소 주인이 성질이 고약하고 세가 턱없이 비싸다며, 타작한 벼를 공매하고 그 돈으로 농협에서 쌀을 사서 양식을 하자는 회의를 여는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예사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성 정미소 주인은 면사무소나 군청과 경찰서뿐만 아니라 국회의원에게까지 손을 뻗어 놓고 뇌물을 뿌리며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는 느닷없이 우리 집에 찾아와 방아를 팔라고 윽박질렀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무허가로 도정업을 한다고 고발해 징역살이를 시킬 것이라고 할머니에게 엄포를 놓았다.
우리 가족이 그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진주시 상이용사회 간부인 범수 아저씨가 찾아오셨다. 아버지에게 재종형님 되시는 분이었다. 그 아저씨는 그 도정업자를 대동하고 우리 집에 들렀다. 아저씨는 도정업자에게 할머니와 어머니께 사과를 하게 만들었다.
당시 전쟁에 나갔다가 부상으로 불구가 돼 돌아온 사람들을 제대 후에도 상이군인이나 상이용사라고 불렸다. 사회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관에서도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들은 몇몇씩 떼를 지어 시장에서 크게 장사하는 상인들이나 마을 유지, 특히 군대에 나가 부상을 입고 돌아오기 전에 무시를 당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행패를 부리곤 했다.
그렇게 어수선한 세월 속에 어려운 시절을 보낸 우리 가족은 어느 정도 치안이 안정되자 청계리 고향으로 돌아왔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었다. 덩치가 크고 나락 섬을 짊어지고 다닐 만큼 힘이 좋으셨던 할머니는 농사일을 남자 못지않게 잘하셨다.
나는 학교 가까운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여덟 살에 입학하는 국민학교(당시의 초등학교)를 아홉 살에 들어갔다.
1959년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였다. 지독한 가뭄과 일찍 내린 서리로 벼가 제대로 익지 않고 말라 시드는 대흉년이 들었다. 당시는 4월 신학기제였다.
중학교는 입학시험을 치러 합격을 해야 갈 수 있던 때였다. 그해 나랑 입석초등학교를 함께 졸업한 아이들은 49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중 초등학교가 있는 입석과 중촌 구산에 사는 9명의 아이들은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에 분주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공부에 재미를 들인 나도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그러는 중에 담임선생님이 찾아오셨다. 나를 중학교에 보내라고 권하기 위해서였다.
선생님이 중학교 입시 이야기를 꺼내자 할머니께서는 흉년으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인데 무슨 돈으로 중학교에 보낼 수 있겠느냐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나도 집안 형편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러시는 할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나는 중학교에 가지는 못하더라도 입학시험이나 한번 치르게 해 달라고 할머니를 붙들고 울면서 호소했다. 할머니는 그런데도 들어주시지 않으셨다. 나는 다리를 뻗고 앉아 몸부림을 치며 대성통곡했다.
“얘야 울지 말아라. 어미가 똥 묻은 속곳을 팔아서라도 입학시험은 쳐 보게 해 주끄마.”
어머니도 나를 끌어안고 따라 우셨다.
드디어 시험 날이 다가왔다. 다른 아이들은 학교에 모여 선생님과 함께 단성 중학교로 갔으나 나는 혼자 석대재를 넘어 중학교에 갔다. 교문 앞에 다다르자 먼저 온 선생님과 아이들이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못 올 줄 알았더니 왔구나.”
선생님이 말씀하시며 필통 하나를 내미셨다. 열어 보니 필통 안에는 연필 두 자루와 20cm 대자 하나, 지우개, 연필깎이 칼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나는 입학시험도 치르지 않을 건데 이런 건 뭐하러 사 오셨나 싶었다.
“전 시험장에 들어가지도 않을 것인데 이런 건 뭐하러 사 오셨어요?”
선생님께 물었다.
“시험도 안 치를 거라면 뭐하러 왔는데….”
정구라는 아이가 빈정거렸다. 그는 늘 나를 빈정거리고 내가 안 보는 데서는 아이들에게 나를 헐뜯으며 욕한다는 것을 다른 아이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나보다 훨씬 크고 싸움도 잘했다.
나는 해마다 계속 반장에 뽑혀서 선생님이 안 계실 때면 엉뚱한 짓을 하는 친구들에게 본의 아니게 간섭을 해야 했다. 정구는 그런 나를 몹시 못마땅해했다.
“왜 시험을 안 치러?”
선생님이 그 아이를 나무라셨다. 마침내 종이 울리고 수험생들 모이라는 안내 방송이 있었다. 아이들이 조회대 앞에 모였다. 시험 중 주의 사항을 들은 다음 인솔 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들어갔다.
나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자리는 복도 쪽 맨 앞 책상이었다. 나는 중학교에서는 초등학교와는 달리 한 사람이 책상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아서 공부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시험은 곧 시작되었다. 첫 시간은 국어였다. 그런데 국어 시험엔 재미있는 문제가 출제됐다.
그 문제는 이랬다.

1. 다음 한글 닿소리 이름을 쓰시오
ㅁ( ) ㅂ( ) ㅅ( ) ㅈ( ) ㅎ( )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글 닿소리 열네 자 이름을 써 보란 공부는 지난번에 교생으로 다녀간 정남재 선생님이 6학년 국어 시간에 가르쳐 주셨으며, 위 다섯 글자의 이름은 그 내용 중에 나왔던 것이다.
나는 우리학교 출신 졸업생 중에 이 문제를 틀린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과목 시험도 어려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시험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저게 입학시험이라면 나는 1등이라도 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흘 후에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모집 인원은 두 반으로 100명인데 지원자는 140명이라고 했다. 나는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가지 않았다. 입학하지도 않을 것인데 합격인지 낙방인지 그건 알아서 뭐 하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내가 그 입학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 것이다. 내 합격 통지서는 담임선생님이 받아서 들고 오셨다.
나의 입학금은 학생회비 300원을 제외하고는 전액 면제였다.

나는 그렇게 해서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교에 간 나는 1∼2학년 때 학교 도서 위원이 되었고, 3학년 때는 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때 중학교에서는 학생을 위해 돈을 쓸 때는 학생회장의 인가를 받도록 돼 있었다. 서무실에서는 나에게 인감도장이라는 것을 만들어 주었다. 학생회비 지출 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도 학생을 위해 특별히 지출하는 서류에는 내 도장을 받아야 했다.
도서 위원인 나는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내가 제일 먼저 읽은 책은 ≪톰 소여의 모험≫이었다. 그다음은 ≪바다의 왕자≫에 이어서 ≪홍길동전≫, ≪장발장≫ 등이었다. 학교에서 독후감 발표 대회가 있었다. 과제 도서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장발장≫ 그리고 ≪홍길동전≫이었다. 나는 ≪홍길동전≫의 감상문을 써내었다. 내 글은 겨우 장려상에 뽑혔다. 나는 속으로 섭섭했다. 장원은 교무 선생님의 아들, 박한상이 차지했다.
시상식이 있기 하루 전날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아가, 네가 이번 독서 감상문 쓰기에서 장려상을 받은 이유를 아느냐?”
교장 선생님이 나의 두 손을 꼭 쥐며 물으셨다.
“모르겠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내가 당연히 장원감인 네 글을 장려상으로 내렸다. 그 이유는 네 글은 도무지 중학생이 쓴 것으로 인정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니까 잘 썼기 때문에 등수가 낮다는 말씀이신가요?”
나는 불만 서린 목소리로 내뱉듯 되물었다.
“그렇다. 작품만 일등감이면 됐지, 그깟 등수가 무슨 대수냐? 교장 선생님이 한 일에 대해 불만스러워할 것 없느니라.”
교장 선생님이 어깨를 다독이며 말씀하셨다.
그래도 나는 완전히 불만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상품 때문이었다. 며칠 전 나는 상품 구입 지출 결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장원에게 이원수 선생님의 ≪민들레의 노래≫라는 동화책을 주었고, 그 아래 작품에도 공책이 세 권 아니면 최소 한 권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내가 받을 상품은 고작 연필 두 자루였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글짓기 연습에 열중했다. 윤석중 선생님이 지도 평을 써서 보내 주시는 글짓기 지도에 작품을 써 보내어 지도를 받았다.
어렵게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내가 걱정하자 어머니께서는,
“네 등록금은 어미가 그동안 다 마련해 놓았다. 외양간에 새끼 딸린 소가 있고 송아지 세 마리도 배내로 놓아두었다. 그러니 학비 걱정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
어머니 말씀에 나는 뭔가에 꽉 틀어 막혔던 목이 시원하게 터져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중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내가 열여섯 살 때였다. 담을 사이에 두고 사는 아랫집 권 노인이 할머니를 찾아와 사돈을 맺자고 청하더라고, 할머니께서 내 마음은 어떠냐고 물으셨다.
“어머님 애 나이 이제 겨우 열여섯이에요. 한창 공부할 나이에 결혼은 무슨….”
할머니 말씀이라면 무슨 일에나 거역할 줄 모르시는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렇게 넘어갔다.
진주 농고 3학년 때였다. 농림 고등학교는 폐교로 문을 닫고 그 자리엔 2년제 농업 전문대학이 들어서게 됐다.
졸업을 앞둔 재학생과 졸업생들은 그 계획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국가 시책사업이라 어쩔 수 없이 농림 고등학교는 문을 닫았다. 나랑 함께 졸업한 학생들 중 농과대학에 지원한 수십 명을 제외한 대부분은 농전에 지원했으나 농업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는 사범학교 대신 들어선 교육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에 산청군에 발령을 받았다. 산청에서 5년을 근무한 나는 진주로 전근했다. 그때는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일하던 이병한 군의 도움을 받았다. 진주 전입을 위해 내리 3년이나 내신을 내었으나 5년도 안 된 사람이 무슨 진주냐며 퇴짜를 받았다. 나는 병한 군에게 편지를 썼다. 병한 군은 내년에 진주 전근이라는 답장을 보내 주었다.
편지엔 가고 싶은 학교를 지정해 주면 그 학교에 발령받도록 하겠다는 내용까지 들어 있었다. 어차피 순환 근무인데 좋은 학교에 먼저 근무하다가 안 좋은 학교로 전근하는 것보다는, 처음에 마음에 안 드는 학교를 거쳐 좋은 학교로 옮기는 것이 낫겠다는 마음에 그 호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발령은 정촌 초등학교였다. 이어 천전, 봉곡을 거쳐 9년 만에 통영으로 전근했다.
당시 경남의 초등학교 중 통영시 소재 학교로의 전근은 무척 어려웠다. 그것은 도서 벽지 학교 우대 정책으로 벽지 근무 경력이 없는 사람은 승진에 큰 불이익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너도 나도 도서 벽지 학교가 많은 통영으로 몰려들었다. 나도 그 물결에 휩쓸려 통영시에 들어가 어의도란 섬마을 분교장에서 2년 동안 근무했다.
그러는 나에게 당시 통영 초등학교 옥상민 교장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옥상민 교장 선생님은 내가 진주 봉곡 초등학교에서 4년 동안 모셨던 분이었다.
“자네는 벽지 근무 점수가 8점이나 되지 않는가? 연구 점수도 높고 이젠 좀 편안한 학교로 옮겨서 승진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테니 내게도 오시게. 내 학무과장에게 미리 귀띔을 해 두었네.”
전화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다시 통영 국교로 옮겼다.
통영에서 1년을 지내자 교장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전근하셨다. 새로 부임한 교장은 진주나 마산의 초등학교에서 근무한 경력을 가진 교사들을 은근히 질시했다.
나는 벽지 근무 경력도 만점에 가까웠고 연구 점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문제는 근무 평정이었다. 근평은 최근 3년간의 평균점이었다. 근평은 대개 교무나 연구를 맡은 교사에게 높은 점수가 떨어졌다.
당시 교감은 나를 아주 아껴 주었는데, 그 일로 교장과의 사이가 불편한 상태였다. 교감은 나에게 전출을 권했다. 나는 삼천포 교육청 관하로 전출 내신을 내었다.
삼천포로 옮긴 지 1년 만이었다. 나는 서울 마리아 수녀원이 운영하는 서울 소년의 집 초등학교로 옮겼다. 그 학교엔 서울 진입에 목말라 있던 교사들이 전국의 각처에서 몰려들었다. 그 학교엔 내 고등학교 선배인 시인 손광세 선생님과 윤경학 선생님이 근무하고 계셨다.
내가 합류하자 진주 농고 출신이 셋이나 됐다. 그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들은 공립학교로의 전근을 하나같이 꿈꾸며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급이 늘면 전국의 공립학교에서 영입해 들이고, 배출하는 경우는 사고를 일으키거나 학급이 줄 때였다.
소년의 집에 전입된 나는 사고를 일으켰다. 동화집 ≪수녀님의 아이들≫ 출간이 그것이었다. 수녀가 아이들을 데리고 교보 문고에 책을 둘러보러 나갔다. 수녀님은 서점에서 내가 낸 책을 발견하고는 아이들과 더불어 그 책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원장 수녀도 그 책을 읽었다. 내용에 불만을 느낀 수녀는 나를 방출하라고 교장에게 지시했다.
나는 그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런데 ≪수녀님의 아이들≫은 연이어 11판을 찍었고, 많은 사람에게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는 편지와 전화를 받았다.

작품 연보

1984년 ≪수녀님의 아이들≫(능인) 출간.
1987년 ≪커 가는 별≫(문학세계사) 출간.
1991년 ≪섬마을 아이들≫(산하) 출간.
1993년 ≪노래하는 아파트≫(윤진) 출간.
1994년 ≪서울에서 제일 멋진 아이들≫(윤진), ≪꿈꾸는 바람개비≫(계몽사), ≪바담풍 선생님과 청개구리 제자들≫(삼성당) 출간.
1997년 ≪백범일지≫(예림당) 출간.
2004년 ≪안익태≫(산하) 출간.
2005년 ≪곽재우≫(산하) 출간.
2007년 ≪조식≫(견지사) 출간.

해설 - 최용
1963년 5월 8일 대구에서 출생했다. 대구고등학교와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대구한의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김성도 동화연구>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무산고등학교를 거쳐 청구중학교에서 교사로 지내고 있으며, 경주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대구과학대학교 유아교육과에서 강의를 했다.
1985년에 평론 <동심의 시적 변용>이 계간 ≪아동문학평론≫에 당선되었다. 그 후 한국아동문학학회 이사, 아동문학평론 기획위원, 한국아동문학인협회 평론분과위원장, 새바람아동문학회 이사,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원, 한국문협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 밖에 세계아동문학대회, 아시아아동문학대회, 한중아동문학대회에 참여했다. 그리하여 아동문학의 평론적인 연구와 학문적인 연구의 통합과, 분단 상황의 정치·사회적 맥락에서의 아동문학 주제에 천착했다. 또한 아동문학 평론의 이론적 체계 확립 그리고 동심의 진정성과 문학적 측면에 대한 조명을 고민하고, 창작 태도의 일상성과 방대한 문화주의적 시각의 비판적 대안을 제시했다.
평론으로는 <리얼리즘 문학론>, <분단시대 아동문학 연구>, <전통의 감응과 수용>, <동화정신의 탄력성>이 있고, 동시로는 <놀이터>, <5월>이 있으며, 평론집으로는 ≪생명 존중의 패러다임≫이 있다. 제20회 방정환문학상을 받았다.

<신충행 동화선집>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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