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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수

    장윤수 프로필

  • 국적 대한민국
  • 학력 경북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경북대학교 철학과
  • 경력 대구교육대학교 윤리교육학과 교수

2015.01.30.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황간(黃榦, 1152∼1221)
자는 직경(直卿)이며, 민현[閩縣, 지금의 중국 푸젠성(福建省) 푸저우(福州)] 사람이다. 황간은 부친이 작고한 뒤에 주희의 제자인 유청지(劉清之, 1134∼1190)의 권유로 주희에게 수학했다. 그는 주희의 문하에서 학업을 펼친 후에 밤에도 자리를 깔고 눕지 않았으며,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조금 피곤하면 의자에 잠시 앉아 새벽까지 그대로 지낼 때도 있었다. 주희는 주위 사람들에게 “황간은 뜻이 굳고 생각이 맑으니 그와 더불어 지내면 매우 유익하다”라고 칭찬했다. 후에 주희는 그 딸을 황간에게 시집보냈다.
영종(寧宗)이 즉위하자 주희는 황간에게 명해 표문(表文)을 올리게 했는데 이때 장사랑(將仕郎)에 보임되고, 감태주주무(監台州酒務)의 직책을 받았다. 주희는 자신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심의편(深衣篇)〉과 다른 저술들을 황간에게 전해 주면서, “나의 도를 부탁할 곳이 여기에 있으니 유감이 없구나”라고 하는 말을 직접 기록했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황간은 3년간 심상(心喪)의 예를 차렸다. 그 후에 감가흥부석문주고(監嘉興府石門酒庫)의 직책을 받았다. 오엽(吳獵)이 호북 지역을 다스릴 때에 황간을 불러 안무사주고(安撫司酒庫)에 임명했고, 강서제거상평(江西提擧常平) 조희역(趙希懌)은 황간을 불러 임천령(臨川令)으로 세웠다. 이후 안풍군(安豐軍), 한양군(漢陽軍), 안경부(安慶府) 등의 지방관을 맡았는데, 황간은 부임하는 곳마다 학교를 소중히 여기고 교육을 앞세웠다.
제치사(制置使) 이각(李珏)이 황간을 불러 참의관(參議官)으로 삼고자 했으나 황간은 그가 함께 일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화주 지역을 맡으라는 명을 거듭 사양했다. 그 후 다시 안경(安慶) 지역을 맡으라는 명이 있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여산(廬山)에 들어가 주희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이번(李燔), 진복(陳宓)과 함께 옥연(玉淵)과 삼협(三峽)의 사이를 돌아보고 스승 주희가 남긴 발자취를 탐방했다. 그가 백록동서원에서 건괘와 곤괘 두 괘를 강의했을 때는 산남과 산북의 선비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행재소(行在所)에 불려 가 시사 문제를 아뢰고 대리승(大理丞)의 직책을 제수받았으나 이를 받들지 않아 어사 이남(李楠)의 탄핵을 받았다.
황간이 처음 형호(荊湖)의 막부에 들어갔을 때 강호의 호걸들과 교유했는데, 당시 호걸들도 황간에게 기개와 큰 뜻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안경 지역에 와서 제치사 이각의 막부 일을 겸하게 되자 장회(長淮) 지역의 군민들이 마음속 깊이 복종했다. 이러한 소문이 나자 그 지역의 높은 지위에 있던 자들이 그를 더욱 시기하게 되었다. 더욱이 황간이 조정에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게 되면 변방의 실태를 그대로 보고해 황제가 저간의 사정을 낱낱이 알게 될까 두려워해서 무리를 지어 방해했다. 황간이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자 제자들이 날로 불어나 파(巴)·촉(蜀)·강(江)·회(淮) 지역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예서》의 편찬과 저술에도 시간이 부족했지만, 밤에는 제자들과 함께 경의(經義)에 대한 강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인근 사찰을 빌려 거처하며 의문 나는 점에 대해 열심히 토론했는데, 마치 스승 주희가 살았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얼마 후에 조주(潮州) 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고, 박주(亳州)의 명도궁(明道宮)을 주관하다가 이것마저 은퇴를 요청해 허락을 받았다.
작고한 후에는 문인들의 요구로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저술로는 《경해(經解)》와 《황면재선생문집(黃勉齋先生文集)》 등이 있다.


이황(李滉, 1501∼1570)
자는 경호(景浩)다. 일찍이 퇴계(退溪)에 집터를 잡고 살았기 때문에 이로써 자신의 호를 삼았으며, 그 뒤에 도산(陶山)에다 서당을 짓고 지냈기 때문에 도수(陶叟)라고도 했다.
이황은 출생한 지 1년도 못 되어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서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에게 글을 배웠으며, 장성해서는 학문에 힘쓰고 뜻을 가다듬어 더욱 스스로 노력했다. 1528년(중종 23)에 진사 시험을 통과하고, 1534년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벼슬을 시작해 이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호조좌랑(戶曹佐郞),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 그 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형조정랑(刑曹正郞),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548년 1월에는 외직으로 나가 단양군수(丹陽郡守)가 되었다가 다시 풍기군수(豐基郡守)가 되었다. 1552년 여름에는 교리에 임명되어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와 사헌부집의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부응교로 자리를 옮겼다가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했다. 그 후 병으로 면직되었다가 다시 대사성이 되고, 형조참의와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면직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555년 봄에 사직을 청하고 해직되자 배를 세내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첨지중추부사에 다시 임명되었으며,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고 연달아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1558년 가을에 면직을 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황은 도성에 들어가 대사성에 임명되고 곧이어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황은 여러 번 사양했으나, 임금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해(1559) 봄에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서 세 번이나 글을 올려 면직되기를 청하니 임금이 공조참판을 그만두게 하고 대신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했다.
1565년 여름에 글을 올려 이마저도 해임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해 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렇지만 같은 해 겨울에 임금이 다시 특지를 내려 그를 부르고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했다. 1566년 1월에 이황은 병을 무릅쓰고 서울로 가는 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글을 올려 해직시켜 줄 것을 청했다. 서울로 가는 도중에 공조판서에 임명되고 또다시 대제학에 겸직되었다. 이황은 새로 내린 벼슬을 극력 사양하고 마침내 집에 돌아와 죄를 받기를 기다리니, 벼슬이 바뀌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1567년(명종 22) 명종이 승하하고 뒤를 이은 선조가 이황을 예조판서에 임명했는데, 이황이 사양해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병으로 면직되고 즉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0월에 지중추부사에 임명되고 서울로 빨리 올라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상소를 올려 이를 간곡하게 사양했다.
1568년(선조 1) 1월에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임명되어 이를 사양하자 이번에는 또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 이해 7월에 이황은 임금께 나아가 직책을 사양한 뒤 그 대신에 새 임금을 위해 치자(治者)의 도리와 당면 시무(時務)를 건의한 〈6조소(六條疏)〉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렸다. 그 후 다시 대제학과 이조판서,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이를 모두 극력 사양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1569년 네 차례나 차자를 올려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므로, 임금은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그를 직접 만나 위로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잘 보호해 주도록 역(驛)에 명했다. 이달에 이황은 집에 도착한 다음 글을 올려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고 곧 벼슬에서 면해 줄 것을 청했다. 병환이 위중해지자 이황은 아들 준(寯)에게 예장(禮葬)을 사양하도록 명했는데, 아들 준은 가르침을 받들어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두 번이나 상소해 예장을 사양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묘도(墓道)의 표(表)는 유계(遺戒)에 따라 이황이 지은 명문을 그대로 썼다. 이황의 훌륭한 덕과 큰 업적이 우리 동방에서 으뜸임을 당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후대 학자들도 선생이 말씀하고 저술한 것을 관찰한다면, 반드시 느끼고 마음에 들어맞는 것이 있을 것인데, 명문에서 서술한 것을 통해 더욱 그 은미한 뜻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장윤수(張閏洙)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 경북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동양 철학(유가 철학)을 전공해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구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 시베이대학 객좌교수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동양철학회 회장을 지냈다. 학문적인 주요 관심 분야는 송대(宋代) 신유학, 영남학파의 성리 사상, 동양 교육 사상 등이다. 저서에는 《도, 길을 가며 길을 묻다》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문화 정신》 등 다수가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퇴계 철학에 있어서 이(理)의 능동성 이론과 그 연원〉, 〈강안학(江岸學)의 학문 정체성과 몇 가지 문제점 검토〉 등이 있다. 대한철학회 운제철학상(2019), 대동철학회 학술상(2021), 중국출판협회 번역서 우수학술상(2020)을 수상했다.
이메일 : ysjang@dnue.ac.kr

<주자 행장>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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