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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

    안경환 프로필

  • 국적 대한민국
  • 출생 1955년
  • 학력 국립 호찌민 인문사회과학대학교 대학원 어문학 박사
    국립 호찌민 인문사회과학대학교 대학원 어문학 석사
    한국외국어대학교 베트남어 학사
  • 경력 조선대학교 외국어대학 교수
  • 수상 평화우호 훈장
    친선문화진흥공로 훈장

2015.02.03.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호찌민(Hồ Chí Minh, 1890∼1969)
호찌민은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1890년 5월 19일 응에안 성(省) 남단 현(縣) 낌리엔 리(里) 샌 마을의 조그만 오두막집에서 2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호찌민 주석이 태어난 집은 그야말로 조그만 초가집에 살림살이라고는 대나무 침대와 베틀이 고작이었고, 고구마를 심은 텃밭 옆에 코코넛나무 몇 그루 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 가난한 집에서 베트남 최고의 인물이 탄생했다는 것은 베트남의 복이다.
호찌민 주석은 나이 열 살 때 어머니(호앙티로안)를 잃었다. 호찌민 주석의 부친(응우옌신삭)은 조선에서 동학혁명이 발생한 1894년에 과거에 합격해 프랑스 식민시대 예부(禮部)의 고위 관리가 되었다. 그는 곧 자신이 프랑스인의 야심을 채워 주기 위한 도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러한 관리 생활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시골 학교로 자원해 옮겨 근무했다. 나중에 프랑스 당국의 강요로 벽지의 현감으로 부임했다가 프랑스 법을 어긴 동포를 관대히 처분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부친 응우옌신삭은 가족을 떠나 유리표박 생활을 하면서 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한 채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맏누이 응우옌티타인은 호찌민 주석보다 여섯 살이나 위고, 형 응우옌신키엠은 두 살 위였다. 누나는 아버지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로 프랑스에 반감을 나타내었는데, 프랑스군에 소속된 베트남 사람들이 주둔하는 지역을 골라 무기를 훔쳐다 독립군에게 전달하는 과감한 운동을 벌이다 감옥 생활을 몇 차례 한 적이 있다. 형 키엠도 이에 못지않아 지나가는 프랑스 관리를 발로 차고 땅에 꿇어앉히는 등의 행위로 오랫동안 감옥 생활을 한다. 아버지는 관료 제도에 환멸을 느껴 자식들에게 어떤 정규교육도 시키려 들지 않아 막내인 꿍(호찌민)은 한학을 공부하는 대신 무슨 책이든지 닥치는 대로 탐독해 어려서부터 광범위한 식견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호찌민은 1911년 10월 10일 중국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 중국 역사상 최초로 제정 왕조를 뒤엎고 공화정치를 확립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21세의 나이로 자신의 민족주의적 야망을 후원해 줄 수 있는 후원자를 찾으려고 사이공 항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상선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Amiral Latouche Treville)’호의 보조 요리사로 취직, 해외로 나가게 된다. 이때부터 30년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게 되는데, 호찌민 주석만큼 수많은 직업을 가져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보조 요리사를 시작으로 정원사, 청소부, 석탄을 때는 화부, 사진사 등 생계유지를 위해 안 해 본 직업이 없을 정도였다. 화부로 있을 때는 불에 달군 벽돌을 집에 가지고 와서 침대 밑에 깔고 잘 정도로 추위와 싸우기도 했다. 1942년 8월 29일부터 380일 동안 중국 광시성 18개 감옥을 전전하며 감옥 생활을 할 때는 영양실조에 걸려 이가 다 빠지고, 지독한 옴에 걸려 온몸이 비단구렁이처럼 울긋불긋하게 되었으며, 이불이 없어 신문지를 엮어 덮고 자는 등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이라고는 다 겪어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라고 했다. 호찌민 주석이야말로 눈물의 빵이 아니라 피의 빵을 먹어 본 사람이고, 옥중 생활로 자유의 소중함과 배고픈 국민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영도자였다.
이런 그를 평생 따라다닌 질문이 있다. 그것은 “호찌민은 공산주의자인가? 아니면 민족주의자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런데 호찌민은 “나는 직업 혁명가”라고 생전에 말하곤 했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호찌민은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자유 베트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공산주의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은 민족주의자다. 또한 당시 정치적 상황이 전제 봉건 군주제였기에 이를 타파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던 혁명가다. 그는 젊었을 때 마르크스주의는 물론 불교, 유교, 기독교도 공부했다. 그는 ‘근면, 검소, 정의, 성실’의 네 가지 덕목을 신조로 삼았다.
호찌민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프랑스로부터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로 받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우방국인 프랑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약소국인 베트남의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호찌민으로 하여금 공산주의와 손을 잡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호찌민 주석은 애국, 애족, 애민의 화신으로 프랑스 식민지배로부터의 독립과 조국의 완전한 통일을 꿈꾸고 이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베트남 공산당, 베트남 통일민족전선, 베트남 인민군 부대를 창설했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건국했다. 사상가인 동시에 베트남의 대문호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화인이다. 1945년 9월 2일 베트남의 독립선언을 하고 국가를 창건한 그는 공교롭게도 자신이 독립을 선언하고 나라를 세운 기념일인 1969년 9월 2일 서거했다. 그는 24년간 베트남을 통치했다.
호찌민 주석은 신념과 비전을 가진 사람으로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에, 관용과 화해의 시대를 가져온 사람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 대통령에 비유된다. 다윗 왕은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사울 왕이 보낸 3000명의 특공대를 피해 아둘람 굴에 400명의 동지와 함께 몸을 숨기고 있을 때도 누구를 탓하거나 불운을 탓하지 않았다. 호찌민 주석은 중국의 감옥에 380일간이나 갇혀 있으면서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고 시를 읊으며 비전을 가지고 독립과 자유를 찾는 방법을 연구한 사람이다. 또 만델라 대통령은 44세에 종신형을 선고받고 28년간이나 감옥 생활을 하다가 72세에 석방되어 대통령이 된 후 죄수를 모두 사면해 주어 관용과 화해로 흑백 공존의 시대를 열어 갔듯이 호찌민 주석도 임종을 앞두고 앞으로 베트남이 통일되면 같은 민족으로 감싸 안을 것을 유언해 남북 공존의 시대, 통일의 시대를 열어 가게 했던 것이다.

역자 - 안경환(安景煥)
안경환은 195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베트남어를 전공했으며, 베트남의 국립호찌민인문사회과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어문학 석사·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조선대학교 외국어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생활 베트남어회화≫, 역서로는 호찌민의 ≪옥중일기(獄中日記)≫, 응우옌주의 ≪쭈옌 끼에우≫, 당투이쩜의 ≪지난밤 나는 평화를 꿈꾸었네≫, 권정생의 ≪몽실 언니≫ 등이 있다.베트남 정부로부터 친선문화진흥공로 훈장, 평화우호 훈장을, 호찌민 시로부터 휘장, 응에안 성으로부터 호찌민 휘장을 받았고, 베트남 문학회로부터 외국인 최초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옥중일기>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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