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신자
신자(愼子, BC 395∼BC 315)의 이름은 도(到)이며, 중국 전국(戰國) 중기의 사상가다. 신도에 관해 언급한 문헌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제(齊)의 선왕(宣王)은 문학(文學)과 유세(遊說) 출신의 사인을 총애했는데, [그들은] 추연(騶衍)·순우곤(淳于髡)·전병(田騈)·접여(接予)·신도(愼到)·환연(環淵) 등 76명이었다. 이들은 저택을 받거나 상대부(上大夫)가 되었지만 정무는 담당하지 않고 정사만 논의했다. 그리하여 제(齊)의 직하(稷下) 출신 학사들이 다시 흥성했고, 그 수가 수백에서 수천까지 이르렀다”라고 했다.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의하면 신도는 조(趙)나라 사람이고 전국 시기의 처사(處士)라고 했다. 그리고 ≪사기≫는 계속해서 “신도는 조나라 사람이고, 전병·접여는 제나라 사람이며, 환연은 초나라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학문을 배웠다. 신도는 ≪십이론(十二論)≫을 저술했다”라고 했다.
≪한서(漢書)·예문지≫에는 ≪신자≫ 42편을 언급하면서 “이름은 도(到)인데 신불해(申不害)와 한비(韓非)보다 이르고 신불해와 한비의 칭송을 받았다”라고 했다. ≪사기≫와 ≪한서≫의 몇몇 자료를 살펴보면 신도는 조나라 출신으로 후에 제(齊)에 이르러 직하(稷下) 학사로서 황로의 도덕의 술(術)을 배웠고 약간의 저술이 있다고 했는데, 아마도 이는 바로 ≪신자≫ 42편의 저술인 것 같다. 그는 추연, 순우곤, 전병, 접여, 환연, 추석(騶奭) 등과 동시대 사람이며 신불해와 한비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인물로 판단된다.
신자의 사상은 자연을 숭상했던 도가 사상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부국강병과 약육강식의 통일 전쟁이 전횡하는 전국 시기에 자연 순응의 무위로는 영원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현명한 군주는 치국에 오직 법치를 근거해야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다고 법가를 옹호하며 적극적으로 법치를 주장했다. 특히 신도는 법치로써 사사로운 욕망을 억제할 수 있다는 점을 법제의 가장 큰 공로로 여겼고, 법치를 통한 민심의 통일을 주장하기도 했다.
신도의 사상에 대해서는 당시 백가쟁명 중 어떠한 학파에 속했었는지 시대별로 이견을 보이고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신도를 도가(道家)로 분류했고, 반고(班固)의 ≪한서≫와 ≪통지(通志)≫, 그리고 ≪선진제자합편(先秦諸子合編)≫ 등에서는 그를 법가(法家)로 구분했다. 반면에 청대의 ≪사고전서(四庫全書)≫와 현대의 ≪자서백가(子書百家)≫·≪백가전서(百家全書)≫ 등에서는 신도를 잡가(雜家)로 분류하기도 했다.
역자 - 조영래
조영래(趙永來)는 중국 고대사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연구자로서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의 베이징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중국 고대사를 전공했다. <북조(北朝) 시기 잡호(雜戶)의 연구>로 석사 학위를, <북위(北魏) 탁발(拓跋) 통치 집단의 형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베이징수도사범대학교 역사학과 객원교수를 거쳐서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Humanitas College)의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 고대사 가운데 특히 진한(秦漢)과 위진남북조사(魏晉南北朝史)의 통치 집단의 형성과 민족 문제에 관심을 두고 북방 민족의 정권 수립과 지역화 과정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아울러 선진(先秦) 시기의 제자백가의 사상과 목록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특히 역사 문헌학적인 지식을 근간으로 역사 문헌의 체계적인 분류와 문헌 사료의 효율적인 이해와 활용에 관한 문제에 관해서도 관심을 두고 있다. 역서로는 ≪중국학 개론≫이 있으며, <16국 시기 호군제(護軍制) 연구−호한 분치(胡漢分治)를 중심으로>, <盛樂及代北地區與拓拔鮮卑的建國>, <중국 소수민족 정책과 민족 간부 양성>, <‘신중화주의’ 속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사부(史部)의 분류 체계에 관한 기원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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