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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성대 範成大

    범성대 프로필

  • 국적 중국
  • 출생-사망 1126년 - 1193년

2015.03.25.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범성대(1126∼1193)는, 자(字)가 치능(致能), 호(號)가 석호거사(石湖居士)다. 오현(吳縣, 지금의 강소성 소주시) 사람이다. 14세 때 모친을, 18세 때 부친을 여의고 10년간 출사를 하지 않다가 부친의 유지를 따르라는 권고에 따라 소흥(紹興) 24년(1154) 진사(進士)가 되었다.
처주지부(處州知府), 지정강부겸광남서도안무사(知靜江府兼廣南西道安撫使), 사천제치사(四川制置使) 등의 지방관을 역임했고 중앙에서는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중서사인(中書舍人),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의 관직을 맡았다. 효종(孝宗) 건도(乾道) 6년(1170) 금(金)에 사신으로 가서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금의 군신 앞에서도 당당한 태도를 보여 조야(朝野)의 칭송을 받았으며 그 결과 건도 8년(1172) 그의 나이 53세 때 중대부참지정사[中大夫參知政事, 부재상(副宰相) 급]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비록 2개월간(4월 2일∼6월 11일)이었으며 실권은 가지지 못했으나 지방관에서 시작하여 참지정사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대단한 업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범성대를 부를 때 치능(致能, 또는 至能)과 함께 참정(參政)을 자주 사용했다. 만년에는 병을 핑계로 은퇴하여 그의 별장이 있던 고향 석호(石湖)에 은거했다가 몇 년 뒤 조정의 부름으로 다시 벼슬을 하기도 했다.
범성대는 지방 관리 생활을 하면서 백성을 위하여 여러 치적을 남겨 세금을 줄이기도 하고, 구제 활동을 펼치기도 했으며, 중앙에서는 언관(言官)의 직책을 맡고 온화하면서도 굽힘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그를 주전파(主戰派) 속의 온화파(溫和派)라 불렀는데 그는 어떤 정치적 주장을 강력히 펼친 정치가였다기보다는 자신의 일을 적절히 완수한 행정 관리에 가까웠다. 그에게는 자신의 직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강력한 대립이나 갈등은 찾아보기 힘들고 감정상의 기복 또한 보기 힘들다. 명확한 시대 상황이던 금나라와 송나라 사이의 문제도 개인이 아닌 관리로서의 범성대에게는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육유(陸游), 양만리(楊萬里) 등과 함께 남송사대가(南宋四大家)로 불리는 그는 주로 시에 뛰어났으며 그중에서 전원시, 풍속시(風俗詩), 사회시(社會詩), 애국시(愛國詩), 기행시(紀行詩) 등이 유명하다. 특히 그의 전원시는 남송부터 청(淸)에 이르기까지 도연명을 능가하는 전원시의 모범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서용준은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중문과 대학원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2008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할 예정이다. 서울대, 숙명여대, 동국대, 서원대 등에서 중국문학, 중국어 등을 강의했다. 석사학위 논문은 <범성대 전원시 연구(范成大 田園詩 硏究)>였고, 박사학위 (예정) 논문은 <이백시(李白詩)의 화자(話者)에 대한 연구>다. 주된 연구 분야는 당대(唐代)와 송대(宋代)의 시가(詩歌)이며 그 외에 중국 고대의 문학이론과 소설에 대한 논문을 썼다. 최근에는 시인의 개인적인 기억이 한시의 내용에 반영되는 방식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사시전원잡흥> 저자 소개

범성대 작품 총 3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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