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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겔루스 질레지우스 Angelus Silesius

    안겔루스 질레지우스 프로필

  • 국적 폴란드
  • 출생-사망 1624년 - 1677년

2015.04.08.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안겔루스 질레지우스
1624년 12월 25일, 안겔루스 질레지우스[세례명 요한네스 셰플러(Johannes Scheffler)]는 오늘날 폴란드에 속하는 브로츠와프에서 태어났다. 지방 귀족이었던 아버지 슈텐첼 셰플러는 신교 신앙을 지녔던 까닭에 크라쿠프에서 이곳으로 이주했고, 62세의 나이로 장남을 얻은 것이었다(당시에는 군주의 신앙이 그가 다스리는 지역의 신앙을 결정했다).
신교파와 구교파가 전쟁을 벌이던 30년 전쟁이 발발한 지 6년째 되던 해에 태어난 요한네스 셰플러는 아버지에게서 엄격한 루터파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그러다 1639년에 그와 두 어린 여동생은 아버지를 잃고, 2년 뒤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뜬다. 그리고 누구였는지 전해지지 않는 이의 도움을 받아 그는 브로츠와프의 엘리자베스 김나지움에 진학하게 된다. 그때 교사들은 셰플러에게 시적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았다.
1643년, 열여덟 살이 된 그는 대학에 진학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학을 공부하려 한다. 고향의 대학에 1년간 머무르다 홀란드의 레이던(Leiden)으로 건너간 그는 약초학을 공부하는 한편, 신비주의자 그룹을 접하게 된다. 요한네스 셰플러가 태어난 해에 죽은 슐레지엔 지방 출신의 신비주의자인 야코프 뵈메(Jakob Böhme, 1575∼1624)의 저술을 접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는데, 이는 특별한 내적 사건이 되었다. 훗날 루터파 광신자들과 대립하며 논쟁을 벌일 때 그는 공공연히 루터파 신비주의자이자 신지학자인 야코프 뵈메에게 고맙게 빚진 것이 있음을 이렇게 술회했다.

“홀란드에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야코프 뵈메의 저술을 읽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나는 신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글을 통해 진리의 인식에 도달했기 때문이지요.”

1648년, 마침내 30년 전쟁이 끝나 가고 그는 당시 체류하던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의 융성했던 도시 파두아(Padua)에서 의학 공부를 마치고 자격을 취득하는 한편, 그 지방의 반 종교 개혁의 기운이 왕성한 가톨릭 신앙을 접하며 영향을 받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와 그가 어울린 이들 가운데는 루터파 목사의 아들인 다니엘 체프코(Daniel Czepko, 1605∼1660)가 있었는데, 그는 중세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나 슐레지엔 출신이었던 야코프 뵈메, 발렌틴 바이겔(Valentin Weigel, 1533∼1588) 등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고서 종교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또 장차 야코프 뵈메의 전기를 저술하게 될 아브라함 폰 프랑켄베르크(Abraham von Franckenberg, 1595∼1652)도 함께 어울렸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셰플러는 점차 신비주의에 심취한 시인으로 준비가 되어 간다.
1649년, 요한네스 셰플러는 25세의 나이로 브로츠와프의 대공 질비우스 님로트의 궁중의(宮中醫)가 되는데, 대공은 루터파 신앙을 견지하는 인물이었다. 대공의 곁에는 크리스토프 프라이타크라는 궁중 목사가 있었는데, 그는 매우 강직한 태도로 루터파 교의가 잘 지켜지는지 관리 감독하는 직무를 수행했다. 추호의 일탈을 용납하지 않는, 분노하는 신학자들의 위세가 등등한 시기였다.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엄격한 검열을 시행하면서 신학적인 논쟁도 끊이지 않았다. 신교의 개혁이 100년 이상 경과하면서, 부패한 가톨릭에 대항했던 ‘새로운 경건함’은 문자로 고착되며 교조화하고 신앙은 철저히 관리되었으나,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신비적 영성을 위한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다. 신비주의는 단죄되고 배척받는 때였기에, 당시만 해도 루터파 신자였던 셰플러는 머잖아 그가 속한 사회의 공식 신앙과 불화를 빚게 된다.
1652년, 요한네스 셰플러에게 야코프 뵈메의 저술을 알려 주고 영적으로 이끌어 준 아브라함 폰 프랑켄베르크가 세상을 떠난다. 그는 신지학자이자 인문주의자이기도 했는데, 신비주의 계통의 서적들을 수집한 자신의 서가를 물려주기도 했다. 셰플러가 빛나는 영적 통찰과 직관으로 ≪방랑하는 천사≫를 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시인은 이제 자신의 시들을 그와 마찬가지로 신을 찾아다니는 이들에게 전달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결심 때문에 요한네스 셰플러는 루터파의 교리를 주관하는 권력, 이를테면 궁정 목사 크리스토프 프라이타크와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아브라함 폰 프랑켄베르크를 위한 추모시>를 발표하고 신비주의 경향의 앤솔로지를 출간하려다 갈등을 빚으며 출판을 금지당한 일이었다.
한 세대 전에 괴를리츠의 구둣방 주인인 신비주의자 야코프 뵈메가 저술을 금지당한 것처럼, 이번에는 요한네스 셰플러가 출판 금지 처분을 받으며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1652년, 셰플러는 궁중의 자리를 내놓고 궁에서 물러난다.
1653년 6월 12일, 그는 브로츠와프의 성 마티아스 교회에서 로만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이름도 안겔루스 질레지우스로 개명한다. 그의 개종은 큰 주목을 받았는데, 신교 측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게 되자 그는 개종의 변으로 가톨릭의 장점을 제시하며 자신을 옹호했다. 이때 쓴 글이<네 가지 동기, 그는 왜 루터파 교회에서 가톨릭으로 전향했는가?(Gründtliche Ursachen von Motiven, warumb Er Von dem Lutherthumb abgetretten, und sich zu der Catholischen Kyrchen bekennet hat)>다. 이때부터 그는 슐레지엔 지방의 반종교 개혁 운동의 선봉에 섰고, 마르틴 루터를 악마(Luzifer)라고 부르기까지 했으며, 죽을 때까지 반종교 개혁 진영에 서서 55편에 이르는 극도로 논쟁적인 글들을 발표하며 논쟁을 벌인다.
1654년, 안겔루스 질레지우스는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명예 궁중의가 되고 로사리오 형제단의 일원이 된다.
1657년, 그의 대표작인 ≪방랑하는 천사≫를 첫 출간한다.
1661년에는 브로츠와프 주교구에서 사제 서품을 받는다.
1664년부터 브로츠와프의 후작 주교 제바스티안 폰 로슈토크의 대신(大臣)으로 봉직하다가, 그가 죽자 질레지우스는 공직에서 은퇴한다.
1675년에는 ≪방랑하는 천사≫의 6부를 마저 출간한다.
1677년 병고를 겪다 53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는다. 그는 죽기 전까지 성 마티아스 십자수도회에 머물며 신학 논쟁적인 글을 쓰고 프란체스코회원으로서 자선을 베풀며, 마지막까지 기도와 명상에 침잠하다 생을 마감한다.

역자 - 조원규
조원규는 서강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뒤셀도르프 대학에서 신비주의 문학을 전공했다. 198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해 시집으로 ≪이상한 바다≫, ≪기둥만의 다리 위에서≫, ≪그리고 또 무엇을 할까≫, ≪아담, 다른 얼굴≫, ≪밤의 바다를 건너≫, ≪난간≫ 등이 있고, ≪유럽의 신비주의≫ 외 다수의 번역서를 냈으며, 현재 서강대학교에서 독일 문학과 문예창작 강의를 하고 있다.

<방랑하는 천사>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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