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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규

2015.07.08.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이창규

학교 백일장에서 작가가 되기까지
작가는 1940년 지리산 골 깊은 ‘구름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세계 제2차 대전 와중에 태어나 6·25 한국전쟁을 초등학생의 눈으로 보고, 피난 생활을 하면서 노천 교육 체험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작가의 꿈을 이루었다.
그나마 여섯 살에 조실부모해 할머니 슬하에서 자란지라, 성인이 된 지금도 어머님의 사랑을 할머님의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을 정도다. 어려웠던 초등학교 생활 중 4학년 때에 검정 고무신을 잃은 것이 계기가 되어 교사의 꿈을 갖게 되었다.
그러니까 경남 산청 입석초등학교 4학년 때다. 학교에서 신을 잃어버리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당시 담임선생님이 새 검정 고무신을 사 주었고, 새 신을 사 준 선생님이 고마워서 울고, 4킬로미터 저녁 시골길이 무서워서 울고, 집에 갔는데 어머니가 안 계셔서 울던 끝에 ‘나도 담임선생님 같은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가졌던 것이 현실로 이루어져 교사가 되면서 먼저 ‘시 공부’를 시작했던 것이다.
돌아보면 5학년 담임선생님은 글짓기와 시에 대한 나의 꿈을 키우는 데 큰 뒷받침이 돼 주었다.
“오늘 5교시는 이야기 시간이다.”
“1번부터 나와서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정해 놓은 이야기 시간이 ‘청화(聽話)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선생님께서 별도로 정해 운영한 시간이었다. 이야기를 할 줄 몰라도 우리들은 그 시간만은 기다려졌고 즐거웠다. 전체 급우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자유롭고, 생기 있는 시간인가! 이야기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학생은 노래나 속담, 특기 등 무엇이든 하면 되니까 그렇게 부담되지도 않았다. 이때 나는 동요를 옮겨 오거나 지어서 읽는 것을 주로 했다. 민주적이고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던 시간! 그 시간으로 인해 후에 시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간을 주선해 준 선생님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또 아침 수업 전에 시조 한 수를 외워서 합동으로 낭송하게 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나는 그에 공감하고 그 시조를 낱낱이 옮겨 적어 외웠다. 그것도 시를 가까이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매주 한 수씩 정해 두고 일주일 동안 합동 낭송을 하게 했으니, 각자 집에서 암송해 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숙제이기도 했으니까.
시조에 담겨 있는 차원 높은 민족의 얼과 참을성, 그리고 시에 대한 애착은 어른이 된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 ‘시인 아저씨’가 되었으면 하는 꿈은 그때부터 자라고 있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시 20수만 외우면 말을 잘할 수 있고, 글도 쓸 수 있으며, 50수를 외우면 웅변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학년이 바뀌었는데도 선생님은 계속해서 6학년도 맡아 시나 시조를 가깝게 할 수 있게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선생님이 고마웠다. 그러는 가운데 지은 시를 선생님께서 수정해 읽어 주며, 격려해 준 덕분으로 의욕을 갖고 계속한 것이 중학교에 들어와 교지에 작품을 싣는 것으로 이어졌고 점차 꿈은 익어 갔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매일 한 장의 스케치가 필요한 것처럼 글을 쓰는 일도 그러한 과정이 필요함을 체득하면서 꿈을 가꾸어 나갔던 것이다.
<어시장 부둣가> 외 두 편으로 ≪아동문예≫ 3회 추천 완료로 등단하였다. 수필집 ≪내 안의 행복≫(선우미디어) 펴냄. 국제PEN 한국본부 제1회 PEN지역활동문학상 받음. 경남문학관 이사, 한국동시문학회 이사를 맡았다.

<이창규 동시선집>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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