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
카를 카우츠키는 1854년 프라하에서 체코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외가는 헝가리 크로아티아계로 추정되는 오스트리아인이고, 외증조모는 이탈리아인이었다. 또 친할머니는 폴란드인이니 카우츠키의 가계는 유럽 중부의 국제적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배경에서 그는 국가를 상대화하는 시각을 가지게 되었고, 체코인으로서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독일인이자 또한 헝가리의 정치가 코슈트와 이탈리아의 가리발디를 민족 지도자로 추앙하기도 하는 등 여러 종류의 민족적 의식에 공감을 가지면서 성장했다.
20세에 빈 대학 철학부에 입학했고, 21세에 사회민주당 당원이 되었다. 고교 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을 가졌고, 대학에서도 역사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역사학 강의를 주로 들었으나 역사 발전의 원동력에 대한 이론적인 탐구에 가장 큰 관심이 있었다. 이때 다윈주의에 매료되어 다윈주의를 역사 발전 설명에 응용하는 데 주로 관심을 가졌다.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으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먼저 ≪자본≫이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애덤 스미스,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 등의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카우츠키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가지는 메시지에 반대하면서도 인구 문제에 낙관적인 입장을 가지는 마르크스를 비롯한 당시의 사회주의자들과는 다른 입장을 취했으며, 이는 그의 첫 저서 ≪인구 증가가 사회 발전에 미치는 영향≫(Wien, 1880)에서 표출되었다. 그 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영향으로 그의 역사관은 절충주의를 벗어나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으로 달라졌다.
1880년에 스위스 취리히로 이주해 베른슈타인을 만나고 1881년 런던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직접 만나면서 유물사관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1883년에 ≪노이에 차이트≫를 창간해 1917년까지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제2인터내셔널이 창립된 1890년경부터 사회민주당의 이론적 핵심 인물로 활약했으며, 이 시대에 베른슈타인의 개량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이론 투쟁을 벌였다. 1899년 ≪농촌문제≫의 출간도 이런 맥락 속에 있다. 사회주의자 단속법의 폐지 이후 도시에서 당원 수가 급증하는 데 비해 농촌에서는 신규 가입자 수가 늘지 않는 데 대한 대책으로 사회민주당에서 농촌 및 농업 보호 정책을 이론적인 근거도 명확하지 않은 가운데 채택하려는 데에 반대하고, 농촌 문제에 관한 상세한 이론적인 규명을 시도한 것이다. 훗날 그는 마르크스의 농촌 문제에 대한 진단이 사소한 점에서는 타당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옳다는 확신을 점점 더 가지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카우츠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정부의 전쟁공채 발행안에 사회민주당이 취해야 할 입장으로 단순한 찬성이나 반대가 아니라 정부가 방어 목적으로만 전쟁을 수행하고, 이 전쟁을 합병이나 배상금 요구나 점령 정책 없이 신속히 종식시키겠다는 약속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는 조건에서 찬성해야 한다고 다분히 이론적인 주장을 펼쳐 소수 의견으로 몰렸다. 이런 입지는 전쟁 기간뿐 아니라 그 후로 계속되었고, 고립된 입장에서 전술적으로 베른슈타인과 다시 가까워졌다. 결국 1917년에는 ≪노이에 차이트≫의 편집인 자리에서 해촉되었다. 더구나 그해 볼셰비키 혁명이 발발했을 때 볼셰비키가 여러 사회주의 당파와 협력하지 않고, 권력을 독점하고 비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공포정치를 펼치자 카우츠키는 이에 반대하며 이론 투쟁을 벌이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를 계기로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스파르타쿠스파, 그리고 독립 사회민주당파의 비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카우츠키의 입장을 옳게 생각하는 자들도 이 상황에서 볼셰비키를 공격하는 것은 러시아 혁명에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사회민주당 다수파와 독립파 간에 다시 협력이 이루어지고, 카우츠키는 외교부 장관 보좌역을 맡게 되었으나 독립파가 다수파와 협력할 수 없다고 내각을 떠남에 따라 업무를 시작도 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자 사회주의 정권의 인민의회 대의원들은 사회화 문제를 다루는 사회화 위원회를 두고 각계각층의 전문가에게 사회화를 위한 실행 방안을 연구하도록 했는데, 카우츠키를 그 의장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이 선거에 패하면서 그 위원회에서 수립한 주요 업종에 대한 사회화 방안은 계획으로만 남게 된다.
당시 사회민주당 내에서 극도로 고립되자 독일 사회민주당을 떠나 빈으로 이주할 것을 생각했다. 그때 그루지야 정부에서 카우츠키를 초청해 그는 그곳에서 농촌을 기반으로 한 민주적인 사회민주주의 정권의 모델을 보았다. 이는 동유럽 사회주의의 모델로 삼을 만한 것이었으나, 그루지야는 그의 방문 직후 볼셰비키에 점령당했다.
그루지야에서 돌아온 후 독일 사회민주당 내 사정이 바뀌어 독립파가 분열해 일부가 공산당에 합류하고, 다른 일부는 이에 반대해 첨예하게 대립하는 동시에, 독일 내 사회주의 세력 내부의 대립 이유는 점차 사라졌다. 그래서 독일을 등져야 할 이유가 사라지고 사회주의 세력의 통일을 위한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마침내 변화된 조건 속에서 사회주의 이행을 위한 이론의 재정립을 시도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그 강령≫(1922)이라는 저서를 통해 사회민주당파 다수의 지지를 다시 얻으면서 비로소 고립 상태를 벗어났다.
1924년 빈으로 이주해 1938년까지 거주하면서 ≪유물론적 역사관≫(1927)이라는 방대한 역사 이론서를 집필한 것을 비롯해 문필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특히 반전사상가로서 ≪전쟁과 민주주의≫(1932), ≪사회주의자들과 전쟁≫(1937) 같은 저서를 통해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들을 규명하는 데 노력한 공로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1938년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합병 때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네덜란드로 망명해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으며, 드리하위스(Driehuis)의 베스터벨트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입장은 계급투쟁의 전제조건으로서 생산력이 일정수준에 도달할 것을 중시하는 생산력주의로 불리기도 한다. 러시아 혁명 후 공포정치에 의존한 소련과 동구권의 현실 사회주의 정권이 몰락하고 나서, 카우츠키가 대표하는, 생산력이 발달한 조건에서 민주주의적 방식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 이론이 상대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역자 - 이승무
서울대학교 및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19세기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서유럽 경제사상사, 경제학에서 확률적 방법론의 발달, 사회보험 등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LG환경연구원 등에서 환경 분야 정책 연구를 했으며, 폐기물과 자원 순환 정책 연구, 그리고 순환형 경제, 사회로의 전환에 관한 연구를 위해 순환경제연구소를 만들어 활동해 오고 있다.
자원순환 거버넌스포럼, 생명평화 연구교육 협동조합, 협동조합 사회자본연구원, 아시아평화시민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다. 순환경제의 미시경제적 조건으로서의 협동조합적 기업 형태, 농촌을 중심으로 한 물질 순환 경제 모델, 사회적 신용과 사회적 자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거시적으로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탈핵 추구에 의한 지역 공동체 형성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내가 믿는 세상≫(2003, 에른스트 슈마허, 문예출판사), ≪그리스도교의 기원≫(2011, 카를 카우츠키, 동연), ≪일본의 순환형사회 만들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2012, 구마모토 가즈키, 순환경제연구소) 등이 있으며, ≪순환경제로 가는 길≫(2010, 순환경제연구소)을 썼다.
<농촌 문제> 저자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