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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적 대한민국
  • 학력 서울대학교 대학원 문학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문학 석사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 경력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대구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2015.10.01.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소식
소동파(蘇東坡, 1036∼1101)는 북송(北宋) 인종(仁宗) 경우(景祐) 3년(1036) 12월 19일 미주(眉州) 미산현(眉山縣, 지금의 쓰촨성 메이산시) 사곡행(紗縠行)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식(軾)이고 자(字)는 자첨(子瞻) 또는 화중(和仲)이며, 동파(東坡)는 그의 호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본명 대신 호를 주로 사용해 왔다.
소동파는 일곱 살에 책을 읽을 줄 알았고 여덟 살에 향교에 입학해 천경관(天慶觀) 도사 장이간(張易簡)에게 수학했다. 당시 100명에 가까운 학생 가운데 그가 가장 뛰어났음은 물론, 2등인 학생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탁월했으니 그의 타고난 재주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재주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패기 또한 남달라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열 살에 부친 소순(蘇洵)이 사방으로 유학(遊學)의 길을 떠나 이때부터 그는 모친 정씨(程氏)의 가르침을 받았다. 정씨는 문학도 좋아했지만 역사에 관심이 더욱 많아 아들에게 역사적인 얘기를 많이 들려주었는데 이 가운데 ≪후한서·범방전≫의 내용이 어린 소동파를 감동시켰다. 범방(范滂)은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결백하며 높은 관직까지 지냈는데 당쟁에 몰려 그만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되기 전에 도주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그는 모친의 충고에 따라 스스로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여기까지 읽던 정씨가 크게 감탄하자 소동파가 불쑥 “제가 만약 범방이 된다면 어머니께서는 허락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정씨가 반가운 표정으로 “네가 범방이 된다면 난들 어찌 범방의 어머니가 못 되겠느냐?” 하고 대답했다. 2년 동안 모친의 가르침을 받던 그는 조부의 별세로 부친이 귀가한 열두 살 때부터 부친의 가르침을 받았다.
열아홉 살 때 이웃 고을 사람인 왕불(王弗)과 결혼했고, 스물한 살 되던 해(1056) 3월에는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부친을 따라 도성으로 가서 8월에 개봉부시(開封府試)에 합격하고 이듬해(1057) 1월에 동생과 함께 예부시(禮部試)에 합격했다. 이때 당시 문단의 영수로서 과거 시험을 주관한 구양수(歐陽修)가 그의 답안을 보고 자신이 그에게 길을 비켜 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를 좋아했다. 구양수는 응시자의 이름이 가려진 상태에서 소동파가 제출한 답안지를 보고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그것을 1등으로 합격시키려 하다가 혹시 그것이 자신에게 직접 배운 증공(曾鞏)의 것이라서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살까 두려워 2등으로 합격시켰다고 한다. 비록 억울하게 2등이 되기는 했지만 이것은 소동파의 문학 생애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모친의 별세로 고향에 돌아가 삼년상을 지낸 다음 스물다섯 살 되던 해(1060) 3월에 하남부(河南府) 복창현(福昌縣) 주부(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동생과 함께 특별 과거 시험인 제과(制科)를 준비해 이듬해(1061) 8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해(1061)에 대리평사봉상부첨판(大理評事鳳翔府簽判)에 임명되어 3년 동안 근무하고 서른 살 되던 해(1065) 2월에 조정으로 들어가 직사관(直史館)이라는 요직을 맡았다. 이해 5월 28일에 부인 왕불이 스물일곱 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이듬해(1066)에는 또 부친이 세상을 떠나는 이중의 불행을 당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부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서른세 살 되던 해(1068) 10월에 두 번째 부인 왕윤지(王閏之)를 맞이했다.
서른네 살 되던 해(1069) 2월에 다시 조정으로 들어갔다. 이때는 왕안석(王安石)이 범중엄(范仲淹)·한기(韓琦)·부필(富弼)·구양수·사마광(司馬光) 등 많은 원로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신법을 강행해 신법파와 구법파가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러한 정국에서 그는 신법의 강행을 반대하는 구법파의 입장에 섰기 때문에 왕안석 일파와 정치적 마찰이 극심해졌다.
서른여섯 살 되던 해(1071)에 신법파의 핍박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지방으로 내보내 줄 것을 자청해 항주통판(杭州通判)이 되었다. 항주에서 지방관 생활을 한 이 3년은 처음으로 정치적 좌절을 맛본 시기였지만, 그의 문학 활동에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서른아홉 살 되던 해(1074) 9월에 이후로 그의 충실한 봉사자요 반려자가 되는 애첩 조운(朝雲)을 얻었다. 그리고 이달에 밀주(密州)태수로 옮기라는 명을 받았다.
밀주태수로 근무한 지 2년 만인 마흔한 살 되던 해(1076) 11월에 하중부(河中府)태수로 옮기라는 명을 받고 부임해 가는 도중에 다시 서주(徐州)태수에 임명되었다.
서주태수의 임기를 마치고 마흔네 살 되던 해(1079) 3월에 다시 호주(湖州)태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호주에서는 엄청난 불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부터 신법의 무리한 시행을 극구 반대한데다 지방관으로 나가 있는 동안 현지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기 때문에 그동안 백성들의 고통을 대변하고 정책을 비판하는 시를 많이 지었는데, 호시탐탐 꼬투리를 찾고 있던 신법파 인사들이 소동파의 시문 가운데 왜곡할 수 있는 것을 다 들추어내어 모함한 것이다. 소동파는 그해(1079) 8월 18일에 마침내 어사대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뻔한 위기를 많은 대신들과 동생의 간곡한 탄원 덕분에 간신히 모면하고 황주안치(黃州安置)의 유배령을 받아 마흔다섯 살 되던 해(1080) 1월 1일에 유배 길에 올라 2월 1일에 도착했다.
본래 소동파는 매우 적극적인 사람이었는데 4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목숨까지 잃을 뻔한 사건을 겪은 이후 그의 사상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 이후로 관직 생활에 대한 염증을 더 강하게 느끼고 현실 도피적인 경향이 이전보다 짙어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는 이와 같은 필화 사건을 어느 정도 예견했으면서도 자신의 양심을 거역할 수 없어서 양심의 명령에 따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그가 완전히 운명에 순종하는 낙천가로 바뀌었다고는 할 수 없고,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현실 참여와 현실 도피의 두 가지 사상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종전보다 많이 초연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국가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도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에 투철했기 때문이다.
마흔다섯 살 되던 해(1080) 2월부터 마흔아홉 살 되던 해(1084) 3월까지 황주에서 지낸 이 시기는 절정에 달한 균형 상실의 심리 상태를 철학적으로 해소하고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시기로서, 그의 문학 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만인이 주지하는 <적벽부(赤壁賦)>를 비롯한 많은 대표작이 이 시기에 지어졌고, 친구의 주선으로 옛날의 군사 주둔지였던 황무지를 얻어서 이를 개간해 동파(東坡)라 이름 짓고 스스로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부른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마흔아홉 살 되던 해(1084) 3월에 여주안치(汝州安置)의 명을 받아 여주로 옮겨 가던 도중 상주(常州) 의흥현(宜興縣)에다 땅을 사 놓고 상주 거주를 청원하는 상소문을 올려 이듬해(1085) 3월에 마침내 허락을 받아 의흥에서 은거하기 시작했다. 쉰 살 되던 해(1085) 5월이었다.
그러나 그가 염원하던 은거 생활은 불과 며칠 만에 끝나고 말았다. 그해(1085) 3월에 신종(神宗)이 세상을 떠나고 철종(哲宗)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소동파의 인품과 재능을 지극히 아끼던 고(高) 태후(太后)가 섭정하게 되어 6월에 당장 소동파를 복직시켜 등주(登州)태수에 임명했기 때문이다.
등주에 도착한 지 5일 만인 10월 20일에 다시 소환령을 받고 조정으로 들어간 소동파는 그동안 밀린 승진을 한꺼번에 만회하기라도 하듯 초고속 승진을 계속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1년 3개월 동안 등주태수·예부낭중(禮部郎中)·기거사인(起居舍人)·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의 여러 가지 관직을, 길게는 5개월 짧게는 5일 동안 재임하며 두루두루 거친 다음 쉰한 살 되던 해(1086) 8월에는 마침내 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까지 올라갔다. 그는 그로부터 쉰네 살 되던 해(1089) 2월까지 2년 반 동안 한림학사지제고에 재임했으니 이때가 그의 정치 생애에서 가장 득의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낙파(洛派) 인사들의 모함을 견디기 힘들어진 소동파는 쉰네 살 되던 해(1089) 3월에 다시 자청해 항주태수에 임명되었다. 항주태수로 재임하는 동안 서호를 준설하고 그 퇴적물로 둑을 쌓았으니 이것이 서호십경 중의 ‘소제춘효(蘇堤春曉)’로 널리 알려져 있는 소제다.
쉰여섯 살 되던 해(1091) 2월에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가 되어 개봉으로 불려 들어갔다가 그해 8월에 다시 자청해 영주(潁州)태수가 되었고 이듬해(1092) 2월에는 양주(揚州)태수에 임명되었다. 그해(1092) 8월에 또 조정으로 소환되어 병부상서(兵部尙書)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잠깐씩 지냈다.
쉰여덟 살 되던 해(1093) 8월에 두 번째 부인 왕윤지가 죽고 이어서 9월에는 소동파를 그토록 아껴 주던 고 태후가 세상을 떠나 철종의 친정 체제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정권을 탈환한 신법파가 심하게 핍박하므로 다시 사임을 자청했으나 사임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정주(定州)태수로 나갔다.
정주태수로 부임한 지 반년밖에 안 된 이듬해(1094) 윤4월에 신법파는 그에게 영주(英州)태수로 부임하라는 좌천령을 내렸다. 환갑을 앞둔 노인을 아열대 기후의 광동 지방으로 보낸 것이다. 그러나 신법파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소동파가 영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시 혜주안치(惠州安置)의 유배령을 내렸다. 영주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보낸데다 거주의 자유까지 박탈한 것이었다.
쉰아홉 살 되던 해(1094) 10월 2일에 혜주에 도착해 예순두 살까지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북쪽으로 돌아갈 희망이 없음을 알고는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려고 노력해 마침내 혜주를 자신의 고향으로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혜주에서 너무 마음 편하게 지낸 것이 화근이 되어 예순두 살 되던 해(1097) 4월에 다시 담주안치(儋州安置)의 유배령이 떨어졌다. 더 이상 쫓겨 갈 곳이 없을 줄 알고 최악의 유배지인 혜주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체념한 채 마음 편히 지내는 소동파를 본 정적들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나머지 환갑이 지난 노인을 바다 건너 해남도의 담주(儋州)까지 보내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소동파는 중국 문화권 바깥으로 추방된 셈이었다. 그러나 소동파는 더위·습기·장기(瘴氣)·가난 등 모든 악조건과 싸우면서도 초연한 마음을 견지함으로써 3년에 걸친 열대 섬 지방에서의 유배 생활을 무사히 견뎌 냈다.
예순다섯 살 되던 해(1100) 1월에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신법파가 실각하면서 그해 5월에 소동파도 죄가 경감되어 염주안치(廉州安置)로 바뀌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마침내 거주의 자유가 회복되었다.
소동파는 오래전에 땅을 사 둔 상주까지 가기는 했으나, 노구를 이끌고 뜨거운 태양 아래 먼 길을 이동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데다 심한 병까지 나는 바람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예순여섯 살 되던 해(1101) 7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소동파의 생애를 살펴보면 파란만장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정치적으로 보면 그는 이처럼 매우 불행한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지만 이 정치적 불행이야말로 뛰어난 문학 작품의 창작을 가능케 한 산파였다고 할 수도 있다.

역자 - 류종목(柳種睦)
편역자 류종목은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석사 학위와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구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 및 역서로 ≪소식사연구≫·≪당송사사≫·≪여산진면목≫·≪논어의 문법적 이해≫·≪송시선≫·≪범성대시선≫·≪팔방미인 소동파≫·≪육유시선≫·≪소동파시선≫·≪소동파사선≫·≪소동파사≫·≪당시삼백수 1, 2≫·≪정본완역 소동파시집 1, 2≫ 등이 있다.

<소동파 산문선>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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