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욱(李煜)
서주(徐州) 출신으로, 초명은 종가(從嘉), 자는 중광(重光), 호는 종은(鍾隱)이다. 오대십국 시기 남당(南唐) 중주(中主) 이경(李璟)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송(宋) 건륭(建隆) 2년(961) 금릉[지금의 난징(南京)]에서 즉위해 15년간 남당을 통치했기 때문에 세칭 이 후주(李後主)라고 한다. 이욱이 즉위할 때부터 남당은 이미 송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971년부터는 송에 대해 ‘칭신(稱臣)’했다. 개보(開寶) 7년(974) 송 태조가 여러 차례 이욱을 변경(汴京)으로 오도록 했으나 끝내 가지 않자, 10월에 군대를 끌고 강남 토벌을 시작했다. 다음 해 11월에 금릉이 함락되고 항복한 후주는 포로의 신분으로 변경으로 압송당해 위명후(違命侯)에 봉해졌다. 포로가 된 지 3년째 되던 해(978), <우미인> 사의 “故國不堪回首月明中”, “一江春水向東流” 등의 구절이 문제가 되어 독살당하고 말았다. 향년 41세였다. 후에 오왕(吳王)에 추증되었고, 낙양(洛陽) 망산(邙山)에 장사 지내졌다. 17세에 남당의 원로대신 주종(周宗)의 딸인 아황(娥皇)과 결혼했다. 이 여인이 바로 대주후(大周后)라고 불리는 소혜황후(昭惠皇后)였다. 결혼 후 10년 정도 지나서 대주후가 병이 들자 언니를 간호하러 궁정에 들어왔던 대주후의 동생과 눈이 맞았고, 소혜황후가 죽자 이욱은 이 여인을 황후에 봉했으며 언니보다 더 큰 사랑을 주었다. 이 여인이 바로 소주후(小周后)다. 소주후는 후주가 송에 항복한 후에도 변경에서 함께 생활했으며, 송 태종에게 개인적으로 멸시를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후주가 독살당하자 소주후도 슬픔 끝에 같은 해에 숨을 거두었다.
이기면
고려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중인문학교류연구소를 운영하며, 한국인이 배우기 편한 중국학 교재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원굉도 문학 사상》(한국학술정보)이 있고, 대표 논문으로는 〈명말청초 이단 문학론의 실학적 이해〉, 〈명말청초 방외 문학론의 근대 지향성 연구〉 등이 있다.
문성자
숙명여자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중국어 작품의 한국어 번역에 매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번역서로는 《금익−근세 중국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고려대학교 출판부), 《류짜이푸의 얼굴 찌푸리게 하는 인간 25종》(예문서원), 《잃어버린 천국 1, 2》(플래닛), 《거인의 시대-명 말 중국 예수회 이야기》(지식을만드는지식) 등이 있다.
<개정판 | 이욱 사집> 저자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