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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초림

    성초림 프로필

  • 국적 대한민국
  • 학력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문학 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한서과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학사
  • 경력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강사

2015.10.07.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라파엘 알베르티는 1902년 각각 이탈리아와 아일랜드 혈통의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카르멜리타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를 마친 후 예수회 소속의 산 루이스 곤사가 델 푸에르토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예수회의 엄격한 규율을 견뎌 낼 수 없었던 알베르티는 결국 품행이 나쁘다는 이유로 1916년 퇴학 처분을 받는다.
1917년 가족과 함께 마드리드로 이주했다. 그간 재능을 보여 온 그림 공부에 전념하면서 당시 화단을 휩쓸던 아방가르드 화풍에 뛰어난 자질을 나타내 마드리드의 살론 데 오토뇨, 아테네오(Ateneo) 등의 화랑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1920년 사망한 부친의 시신을 앞에 두고 알베르티는 처음 시를 쓰게 된다. 그 후 폐 감염으로 구아다라마 산맥 깊숙이 있는 산 라파엘로 요양을 떠나게 되고 이곳에서 쓴 시들이 이후 ≪지상의 마도로스(Marinero en tierra)≫로 묶여 나오게 된다.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온 알베르티는 마드리드 학생 기숙사를 드나들며 후일 함께 스페인 시단(詩壇)에 황금기를 가져온 27세대를 구성하는 여러 시인들, 곧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페드로 살리나스, 호르헤 기옌,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헤라르도 디에고 등과 교류한다.
1925년 ≪지상의 마도로스≫로 국민 시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스페인 서정시에 두각을 나타내는 시인으로 등장한다.
이후 알베르티는 건강 문제, 경제적 궁핍 그리고 신앙의 상실 등에서 연유한 실존적 위기를 겪게 된다. 이 시기 시인의 내적 갈등은 작품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는데 특히 ≪천사에 관하여≫에서 절정에 달하고 이후 사회 참여 시인으로 변모하면서 출구를 찾게 된다.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 독재 시절에는 학생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제2 공화국 수립을 지지했으며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제 그는 시를 사람들의 의식을 뒤흔드는 도구, 세상을 바꾸는 무기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1936년 내전이 발발한다. 이 시기 알베르티는 친(親)공화파의 반(反)파시스트 지식인 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문화계 활동 이외에도 파시즘에 대항한 성명서 발표, 강연 등을 통해 프랑코 반란군의 진격 저지를 위해 힘썼으며 파시즘에 대항한 투쟁에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당대의 문인들, 특히 우나무노 등을 맹비난했다.
내전에서 공화파가 패배하자 아내 마리아 테레사 레온과 함께 망명 길에 오른다. 파리에 머물던 이들 부부가 위험한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페탕 정부가 노동 허가를 취소하자 1940년 아르헨티나로 떠난다. 잠시 칠레에 거주하는 동안에는 파블로 네루다와 조우하기도 했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고 독재가 막을 내리자 1977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바로 그해 공산당 소속으로 의회에 진출하지만 곧 의원직을 사임하고 시인, 화가로서의 삶을 위해 로마로 향한다.
그 이후로 시 낭송회, 컨퍼런스 등에 활발하게 참여하며 1980년 국립 연극상, 1983년 세르반테스상, 1991년 로마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페인 왕립 한림원 종신회원이 되지는 못했고, 공화파로서의 신념을 이유로 스페인의 대표적인 인문학상인 아스투리아스 왕자상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다.
1999년 10월 28일 고향 엘 푸에르토 데 산타 마리아 자택에서 사망했고 유골은 시인이 ≪지상의 마도로스≫에서 서정적으로 노래했던 어린 시절의 그 바다에 뿌려졌다.

<천사에 관하여 / 나는 바보였고 내가 본 것이 나를 더 바보로 만들었다> 저자 소개

성초림 작품 총 4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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