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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

    이자 프로필

  • 출생-사망 1480년 - 1533년

2015.10.27.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이자(李耔)
이자[李耔, 성종 11년(1480)∼중종 28년(1533), 호는 음애, 본관은 한산]는 고려 말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던 이색의 5대손이며, 아버지 예견과 어머니 선산 김씨(관안의 딸)의 셋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산 이씨는 고려 말 신흥 사대부 가문의 하나로, 이색이 조선 왕조의 건국에 지지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가문의 안정적 지위가 확보될 수 있었다.
종선계를 중심으로 가문의 성향이 훈구파에 경도된 것에 비해, 이자는 사림파 인사인 이심원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사림파 성향을 견지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예견의 부임지를 따라 관동과 영남 등지에서 살았다. 14세 때인 성종 25년(1494)에는 삼척의 두타산 중대사에 올라 ≪송사≫를 읽고 개연히 발분하여 <만언소>를 지어 상소하고자 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거두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시정에 대한 명철한 혜안과 비판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5세 때는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이며 태종의 현손인 주계군에게 나아가 이희보·김공량·송세충 등과 함께 수학했다. 22세 때인 연산군 8년(1502) 생원진사시에 이수정, 김안국에 이어 각각 열두 명 중 2등, 열여덟 명 중 2등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24세 때인 연산군 10년(1504) 식년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고, 이후 이조의 정랑과 좌랑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는 등 일찍부터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외직을 구해 나갈 정도로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강했다.
그는 훈구파 주도의 정국에서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다만 사림파의 이념과 사상에 완전히 경도되지 않고, 남곤과 김안로 등 훈구 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상황에 따라 사림파와 훈구파의 완충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학문적으로는 사장(詞章) 지향, 현실 대응 면에서는 수기(修己)보다 치인(治人)의 입장,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 의식을 바탕으로 한 대안의 마련에 고민하면서도 급진적이지는 않았던 인물이었다.

김경수
현재 청운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경화 임용순(任龍淳) 선생으로부터 유교 경전을 익혔다. 연구의 주요 관심 분야는 한국사학사와 사상사, 정치사 및 지방사와 지방문화다. 강의실이나 교과서에서 배우는 암기 지식으로서의 역사, 흥미를 위해 극화된 가십거리로서의 역사를 넘어, 일상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삶의 지침으로서의 역사 만들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연구를 거듭한 결과 ≪조선 시대의 사관 연구≫, ≪언론이 조선왕조 500년을 일구었다≫, ≪테마로 읽는 우리 역사≫, ≪한국사 테마전≫, ≪조선왕조사 전(傳)≫, ≪왜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볼 수 없었을까?≫, ≪(내포의 중심) 홍성학≫, ≪이순신의 난중일기 읽기≫ 등의 연구물을 내놓았다.

권선길
병주(屛洲) 이종락(李鍾洛) 선생과 경화(敬華) 임용순(任龍淳) 선생으로부터 무실과 궁행의 유학을 배우면서 실질적인 경전의 주석과 실용적인 유학의 진흥을 위해 부심해 왔다. 연구의 중심 분야는 경학사상과 한국사상사, 전통의례다. 현재 유교사상의 저변 확대를 위해 여러 곳에서 경서 강독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교육과 교화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그동안의 연구물로는 ≪대록삼강실록≫(역주), ≪영성지≫(국역), ≪논어집주 부강설≫(공역) 등이 있다.

<원서발췌 음애집>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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