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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연

    김서연 프로필

  • 국적 대한민국
  • 학력 단국대학교 대학원 노문학 석사
    러시아 극동국립대학교 러시아어문학 학사
    단국대학교 학사

2015.11.17.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Л. Н. Толстой)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1828년 8월 28일 톨스토이 백작 가문의 넷째 아들로 툴라현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태어났다.
19세기 러시아 작가들 대부분이 상류사회에 속해 있었지만 위대한 작가들 중 오직 톨스토이만 가장 고귀한 귀족층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모스크바와 야스나야 폴랴나를 오가며 많은 시간을 농민들 틈에서 보냈다. 카잔대학에서 동방 언어와 법학을 공부했지만 대학 교육에 실망해 3년 만에 자퇴했다. 바깥 세계로 떠난 여행 기간도 길지 않았다. 두 번의 외국 여행에서 유럽 부르주아 문명이 동반하는 이기성과 물질주의에 혐오감을 품고 돌아왔다. 그는 군인으로 크림전쟁에 참전했고, 그곳에서 최초의 이야기 ≪유년 시절≫(1852)을 완성해 네크라소프 추천으로 ≪동시대인≫에 발표했다.
톨스토이가 청년기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던 문제는 농민과 교육과 전쟁이었다. 이 시기에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 ≪지주의 아침≫(1856) 등을 완성했다. 1857년부터 1859년에는 야스나야 폴랴나에 농민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간행하기도 했다. 1860년 형 니콜라이가 사망하자 심한 타격을 받았고, 1862년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했다. 톨스토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획기적인 사건이 있는데, 결혼이 그중 하나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로 귀의한 일이다. 그는 항상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고 그로써 안정된 도덕적 행복을 달성할 수 있기를 바랐다. 특히 캅카스 농민들에게서 발견했던 온전하고 무분별한 ‘자연적인’ 상태를 향한 열망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런 그에게 결혼은 보다 안정되고 영원한 ‘자연적인 상태’로 나아가는 문이었다. 결혼 생활에서 처음 15년간 그는 확신에 차서 만족스럽고 단조로운 삶의 축복 속에 지냈다. 삶에 대한 이러한 철학은 ≪전쟁과 평화≫(1864∼1869)에 고도의 창조력으로 표현되어 있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심리 분석’과 ‘개인과 역사 사이의 모순 분석’을 통해 최상의 리얼리즘을 성취했다. 그는 일상에서 형식적인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거짓, 허위, 가식, 기만을 벗겨 내고자 했다. 제정러시아에서 혁명이 준비되던 시기를 천재적으로 묘사하면서, 자신의 문학과 사상을 사회혁명에 용해시켰다. 그의 문학과 사상은 나아가서 전 인류의 예술적 발전을 한 걸음 진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1873∼1878) 등 대작을 집필하며 세계적인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1870년대 후반 ≪안나 카레니나≫의 마지막 몇 장을 쓸 무렵, 모든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민을 계속했다. 결국 삶의 의의는 과학이나 철학도 설명할 수 없고, 이성의 힘에 의지해서도 해결되지 않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민중의 태도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서부터 톨스토이는 타락한 현대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원시 그리스도로 복귀해 근로, 채식, 금주, 금연 생활을 했다. 원시 기독교의 소박성을 지닌 포괄적인 비전에 부합된 삶을 살려고 노력함으로써 예언적인 현자가 되었다. 톨스토이는 그러지 않았으면 뒤얽혀 버렸을 인생에서 후기 저작들의 핵심을 이루는 인생의 의미를 끊임없이 추구했다. 도덕적 필연성과 합리적인 기독교 윤리에 바탕을 둔 농민적 무정부주의, 악에 대한 무저항 정신으로 대변되는 그의 사상은 한때 전 세계로 퍼져 톨스토이즘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자기 서술 과정을 통해 평생 자기 인식, 자기 확인을 지속하면서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기 내부에 평온하게 숨 쉬고 있는 ‘자기 완결적인 신성의 형상’을 갈망했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늘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면서, 매 순간 도덕적·종교적으로 완전한 자아를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부정과 자기혐오로까지 치닫는 그의 정신과 만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들떠 있는 그의 영혼, 도덕적 자기완성에 대한 이상으로 흥분된 그의 영혼을 만나게 된다. 가장 먼저 발견된 그의 유작 ≪신부 세르게이≫(1898)에서 이러한 것들을 확인할 수 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명성과 허영심을 불러일으키는 세속적 관념을 거부하고, 자신이 진리라고 규정한 관념을 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또 다른 자아라고 부를 수 있는 세르게이 신부가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톨스토이는 ‘노동의 진리’, ‘생과 사의 심원함’을 이른바 ‘문명 생활의 허위’와 ‘진리의 부재’ 등과 대비하면서 묘사한다. 그에게 진리는 자연적이고 무의식적인 것에 있으며, 허위는 문명적이고 의식적인 것에서 발견된다. 톨스토이의 이와 같은 관념은 이미 초기 작품 ≪카자흐 사람들≫(1863)에서나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에서 표출되고 있다. 그리고 ≪부활≫(1899)에서 톨스토이는 당시 러시아 사회제도 전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와 동시에 민중의 삶에 동화하는 인간의 도덕적 부활의 전 과정을 예리하게 묘사했다. 이와 같은 작품들에서는 원시생활의 진리, 문명의 허위, 사회생활 밑바닥에 깔려 있는 거짓과 기만이 형상화되고 있다.
톨스토이는 삶과 죽음, 육체와 정신, 사랑과 진리에 대한 관념들을 일반적·보편적 형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예술가이자 인생의 교사로서 이런 관념들에 대한 해답을 인류에게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톨스토이의 이러한 예술 세계에서 자족적 관념이 만들어 내는 자기 완결적 순환 구조를 어렵지 않게 읽어 낼 수 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관념을 통해, 그리고 그 관념의 실천을 통해 절대적 지각자로서 자기완성에 이르고자 했고, 자기 구원과 인간 구원에 도달하고자 했다.
톨스토이는 1910년 10월 28일 새벽, 생애 마지막 여행길에 올랐다가 폐렴으로 시골 작은 기차역 아스타포보 역장 관사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야스나야 폴랴나의 숲에 묻혔다.

역자 - 김서연
김서연은 단국대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 극동국립대학교에서 러시아어문학을 공부했다.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노문학을 전공했고, <빅토리야 토카레바 중·단편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러시아 문학 전문 번역 일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눈사태≫, ≪토카레바 단편집≫, ≪결혼≫ 등이 있다.

<계몽의 열매>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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