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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식

    주경식 프로필

  • 국적 대한민국
  • 학력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학사
  • 경력 강릉원주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2015.11.18.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Gotthold E. Lessing)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은 1729년 1월 22일 독일 작센 지방의 소도시 카멘츠에서 루터교 목사 요한 고트프리트 레싱과 부인 유스티나 살로메 펠러의 열두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난다.
1746년 라이프치히대학에 입학해 처음에는 신학 공부에 전념하다가 바로 인문학 분야로 공부의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아카데믹한 학업보다는 젊은 상업 도시 라이프치히의 사교적이고 문학적인 생동감을 탐닉한다. 1748년 11월 베를린에 정착한 레싱은 이른바 ‘자유문필가(Freier Schriftsteller)’로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1749년 초기 희극 <유대인들>과 <자유신앙주의자>가 나온다. 시대 정치극 <사무엘 헨치>는 드라마 단편으로 남는다.
베를린에서 자의식 있는 문인으로 유명해진 레싱은 24세에 6부로 된 ≪레싱 문집≫을 출간하기 시작한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이 베를린에서 활동한 지 몇 년 만에 독일 최초의 비평가가 되고 독일 문학을 새롭게 규정하는 젊은 저술가가 되었다. 1755년 전혀 새로운 시민 비극인 <미스 사라 샘슨>을 발표함으로써 고트셰트를 넘어서서 연극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1757년 프로이센의 군인이자 시인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와 친해진다. 그가 1759년 전쟁터에서 사망하자 단막극 <필로타스>를 써서 애도한다. 이 작품에서 그는 영웅주의의 비인간성을 폭로했다. 1765년 다시 베를린에 자리를 잡은 레싱은 이즈음에 중요한 작품 두 편을 잇달아 발표하는데 1766년 <라오콘> 1부와 1767년의 시대 희극 <미나 폰 바른헬름>이 그것이다. 라오콘 테마를 가지고 그가 문학적으로 추구하던 문제는 치명적인 고통을 조형예술(로마에 있는 라오콘 장면의 대리석 군상)과 서사시(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와 무대에서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미나 폰 바른헬름>에서는 7년전쟁이 주제로 다루어진다.
1766년 레싱은 함부르크에 새로 설립된 국민극장의 상임평론가로 초빙된다. 그의 임무는 무대에서 상연되는 작품의 비평과 분석 및 배우들의 연기 비평인데 이때 매주 두 편씩 발표된 연극 평을 정리한 것이 ≪함부르크 연극론≫이다. 1769년 발간된 ≪고대인들은 죽음을 어떻게 형상화했는가≫에서는 죽음을 잠의 형제로 간주하는 고대의 사유를 살려 내고 이를 기독교적 전통에서 나온 죽음의 알레고리와 대비시킨다.
함부르크에서 재정난에 봉착한 레싱은 1770년 볼펜뷔텔 제후도서관의 도서관장 자리를 받아들인다. 책에 대한 레싱 자신의 대단한 열정과 경제적인 곤란을 타개하고자 한 의지가 발동한 결과 궁중 업무에 대한 염증을 극복한다. 1771년 레싱은 함부르크 시절부터 교제해 오던 에바 쾨니히와 약혼한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 등의 이유로 바로 결혼하지 못한다. 비단 장수였던 그녀의 남편 엥겔베르트 쾨니히는 1769년 업무차 이탈리아를 방문하던 중 사망했고 그는 부인과 아이들 넷을 친구 레싱에게 부탁했다.
1771∼1772년 겨울에 시민 비극 <에밀리아 갈로티>가 완성되어 1772년 3월 13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부인의 생일 축하를 위해 초연된다. 이 작품은 <미스 사라 샘슨>과 같은 감상성을 피하고 신속히 줄거리를 전개하고 상반되는 감정의 양립을 지향하는 드라마로서 관객들에게 깊은 사유와 열린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킨다.
레싱은 함부르크의 교수였던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의 유고를 <무명씨의 단편>이라는 제하에 몇 편 출간한다. 그는 라이마루스의 딸인 엘리제 라이마루스로부터 유고 <신의 이성적 숭배자들을 위한 변론>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이 <무명씨의 단편>에 주석을 달아 발표하는 기회를 활용해 광범위한 종교 비판 논쟁을 기획한다. 이것은 1777∼1779년 사이에 수많은 논쟁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는 자신의 논문인 <성령과 권능과 증거에 관해>, <사도 요한의 유언>, <제2답변> 등을 통해 대표적인 신학적 입장에 대한 공격을 시행하고 그 입장들의 난점을 드러낸다. 1777년 <편집자의 반론>에서는 단편의 저자인 라이마루스에 대해서도 반박한다. 그와 같은 방식의 반론에 의해 1778년 뒤따르는 목사 괴체와의 논쟁의 토대를 마련한다. 레싱은 빈번하게 여행(함부르크, 베를린, 라이프치히, 만하임, 빈)을 함으로써 볼펜뷔텔에서 겪는 소외감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1775년에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함께 몇 달 동안 원치 않는 이탈리아 여행을 한다.
1776년 10월 드디어 레싱은 함부르크 가까운 곳에서 에바 쾨니히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제야 그는 확실하게 경제적인 난관을 극복했다고 생각한다. 레싱은 다각도로 볼펜뷔텔을 떠나 자립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만하임 극장의 극장장이 되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1777년 성탄절에 레싱의 아들 트라우고트가 태어나지만 하루 만에 사망한다. 1778년 1월 10일에는 이 분만의 후유증으로 아내도 죽는다. 그는 신랄하고 비통하면서도 절도 있는 문체로 브라운슈바이크의 친구들에게 자신의 불행에 대해 알려 준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한번 행복해 보려고 했는데. 하지만 그게 나한테는 잘되지 않았어.” 자기 부인이 세상을 떠났던 방이 1778년 <반 괴체>의 산실이 된다. <반 괴체>는 루터교 정통 신앙의 무차별적 권력욕에 맞서 눈부신 논쟁을 벌여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성공했으며 도그마적인 진리 개념에 맞서 역사적으로 개방된 진리 이해를 표방했다. 반박될 수 없는 진리의 주장이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몫이라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신학적 입장이다.
1778년 8월 레싱은 함부르크의 수석목사 괴체와의 격렬한 토론 때문에 검열면제권을 박탈당한다. 그 후 그의 ‘옛 강단’인 연극을 다시 활동 무대로 하기로 하며 1779년에 대표작 <현자 나탄>을 완성한다.
레싱은 프리메이슨단의 회원이 되기는 하지만 그 단체의 실제 양상에 크게 실망하고는 보편적인 인간애와 선의 지배를 목표로 하는 프리메이슨 운동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진력한다. 그 결실로 나타난 것이 <에른스트와 팔크. 프리메이슨 회원을 위한 대화>(1778, 1780)다. 소크라테스를 모델로 하는 이 철학적 대화를 통해 레싱은 두 명의 프리메이슨 단원이 프리메이슨회의 숨겨진 더 깊은 본질에 대해 논의하게 한다. 그 본질은 모든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인 그리고 민족적인 분리를 극복하고 이러한 유토피아를, 그것이 아직 역사적으로 실현되지 않은 때일지라도 눈에서 놓치지 않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현자 나탄> 역시 종교와 종족으로 나누어진 인간들이 서로서로 친구와 친척으로 만난다는 드라마 전개를 통해 <에른스트와 팔크>에서 제시된 그러한 유토피아 정신의 절정을 보여 준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매력적인 결말이 현실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비단 레싱만이 가졌던 의문은 아니다. 1780년 레싱은 익명으로 <인류의 교육>을 발표한다. 이 저작에서 그는 또다시 회의적인 의문부호를 찍으면서 역사철학적인 미래 및 진보 모델을 구상한다.
1780년 여름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는 볼펜뷔텔로 레싱을 방문하고 괴테의 미발표 송가 <프로메테우스>를 보여 준다. 훗날 야코비는 당시 레싱이 범신론과 스피노자 철학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고 주장한다. 레싱 사후에 야코비는 ‘스피노자 논쟁’이라고 불린 이 논쟁을 시작해 큰 이목을 끌게 된다.
1781년 2월 5일 52번째 생일 직후 레싱은 세상을 떠난다.

역자 - 주경식
주경식은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논문 <레싱의 관용 사상>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트리어 대학과 뮌스터 대학에서 연구했다. 역서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문예출판사, 공역), 슈넬의 ≪미디어 미학≫(공역) 등이 있다. 현재 강릉원주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미스 사라 샘슨>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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