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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원

2016.05.27.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장소원이 본기를 담당하였고, 가위가 당무종 회창 연간 이전까지의 본기와 열전을 보충하였으며, 조희는 윤문을 담당했다. 많은 사람들은 유구(劉昫)가 『구당서』 편찬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무근이다. 단지 감수국사의 직분으로 이를 소제에게 헌상하였을 뿐 직접적으로 간여한 바는 없다. 원래 이름은 『당서(唐書)』였으나, 송나라의 학자 구양수가 편찬한 당서와 구별하기 위해 『구당서』, 『신당서』로 나누었다. 송나라 때 『신당서』가 많이 보급되자 비교적 『구당서』는 소외되었다. 명나라 가정제 때 복간되었지만 널리 유통시키지 못했다. 청나라 건륭제 때 다시 복간되었지만 역시 『신당서』와 차이가 나는 부분이 많아서 이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사림(羅士琳)의 『구당서교감기』 66권이 간행되자 많은 문제가 해소되었다. 이외에도 장도(張道)의 『구당서의의』 등이 있다. 『구당서』가 신속하게 편찬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당나라 때 사서편찬 체제가 확립했기 때문이었다. 당 이전까지만 해도 사서는 한 개인의 의지와 역량을 통해서 집필되거나, 사서편찬이 이루어질 때 일시적으로 사관을 형성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런데, 당나라 때부터는 사관이 영구적으로 존재하게 되어 따로 사서를 편찬하는 시기가 아니여도 평상시에 사관이 자료수집과 정리 작업을 했다. 이미 당고조때 기거랑과 기거사인을 두어 황제의 언행을 기록하도록 하는 기거주(起居注)가 있었고[1], 무측천은 매월마다 재상이 전반적인 국정의 상황을 기록하여 이를 사관에 보내는 시정기(時政記)를 만들었다. 사관에서는 시정기와 기거주외에도 각 관청에서 올라오는 사료들을 수집하며 보관했다. 이러한 각 사료들을 기반으로 삼아 사관내에서 사서를 편찬하기도 했는데, 『국사(國史)』와 『실록(實錄)』이다.

<구당서 이정기 열전>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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