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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줘다이 徐卓呆

    쉬줘다이 프로필

  • 출생-사망 1881년 - 1958년

2016.10.20.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런톈즈(任天知, ?∼?)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그가 누구인지 정확한 정보는 알려진 것이 없다. 알려진 바로는 1907년 도쿄에서 춘류사의 <흑인 노예의 절규> 공연을 보고 춘류사에 귀국 공연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뒤 귀국해 왕중성과 손잡고 통감학교(춘양사) 공연을 흥행시킨다. 잠시의 공백기 뒤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진화단을 이끌고 난징, 우후, 한커우 등 창장 유역의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공연했다. 진화단 해산 후 다시 잠시 공백기가 있었고, 초창기 화극의 전성기였던 1914년 갑인중흥 무렵에 개명사(開明社), 제일여자신극단(第一女子新劇團), 민흥사(民興社), 민명사(民明社) 등에서 활동했다. 이후 그는 중국 연극계에서 사라졌고,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렸다.

쉬줘다이(徐卓呆, 1881∼1958)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 속에 성장했다. 가난한 중에도 빚을 내 일본에서 유학하도록 해 준 할머니 덕분에 그는 1905년, 중국 최초의 근대 체육 전공자로서 금의환향할 수 있었다. 1920년대 들어 영화계로 활동 영역을 옮긴 뒤에도 그는 연기와 번역, 창작, 교육을 병행했다. 그가 영화계에서 활동한 1925년에서 1942년까지 17년간 직접 시나리오를 썼거나 배우로 출연했거나 감독을 맡았던 작품은 30여 편을 헤아린다. 그중에는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 배우까지 1인 3역을 해 낸 작품으로 <은신의(隱身衣)>, <사랑의 비료(愛情之肥料)>(이상 1925년), <이상한 의사(怪醫生)>, <움직이는 은상자(活動銀箱)>, <살아 있는 간판(活招牌)>(이상 1926년), <수선화(凌波仙子)>,(1927년) 등이 있고, 세 역할 중 두 가지를 맡았던 작품도 다수 있다. 80 가까운 생애 중 그가 연극인으로 살았던 시간은 첫 번역극 <유언(遺囑)>을 발표한 1909년부터 역시 화극 배우였던 왕유유와 함께 카이신(開心)영화사를 차린 1925년까지의 십 수 년 정도다. 연극계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잠시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이들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연극인으로 사는 동안 한 번도 연극계의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 연극사에 소중한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

<황금과 붉은 피 / 어머니>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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