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은(姜世誾, 1780∼?)은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계호(啓好)다. 1803년(순조 3)에 생원시에 입격했는데, 거주지는 상주로 적혀 있다. ≪사마방목≫(국립중앙도서관 古朝26-29-74). 그가 어떻게 이날 참석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29세였다.
김한권(金漢權, 1752∼?)은 조선 후기 밀양 지역 문인이다. 본관은 광릉(廣陵), 자는 성중(聖中), 호는 풍정(楓亭)이다. 1790년(정조 14)에 소과 생원시에 입격했다. ≪밀주징신록≫에는 호가 창재(滄齋)로 되어 있고, ≪국역 밀양누정록≫ <동호재(東湖齋)>에는 “김한권의 강학소였던 읍창재(挹滄齋)가 퇴폐되어 그 현판을 같이 걸었다”라고 되어 있다. 당시 57세였다.
남경희(南景羲, 1748∼1812)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중은(仲殷), 호는 치암(癡庵)이다. 30세 때인 1777년(정조 1)에 소과에 입격하고 같은 해 증광시에 급제했다. 1788년(정조 12)에 승문원(承文院) 박사에 임명되었고, 이후 몇 가지 관직을 역임하다가 1791년(정조 15) 연원도(連原道) 찰방을 끝으로 더 이상 벼슬하지 않았다. 귀향해서는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지연정(止淵亭)을 지었다. ≪치암집≫ 12권 6책이 전한다. ≪동남창수록≫ 여정 당시 61세였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한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다.
남봉양(南鳳陽, 1761∼1837)은 조선 후기 경주 지역 문인이다.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명응(鳴應), 호는 덕계(德谿)다. 치암 남경희의 조카로, 당시 48세였다. 여정 내내 함께했다.
박세철(朴世喆, 1781∼?)은 조선 후기 밀양 지역 문인이다. 본관은 밀성(密城), 자는 유거(攸擧, 惟擧), 호는 포남(浦南)이다. 당시 28세로, ≪동남창수록≫ 등장인물 중 가장 젊다.
박정원(朴鼎元, 1753∼?)은 조선 후기 문신이다. 본관은 밀성(密城), 자는 한보(漢寶), 호는 몽수(蒙叟)다. 1789년(정조 13) 식년시에 급제했다. ≪동남창수록≫에는 좌랑을 지낸 것으로, ≪밀주징신록≫에는 정언(正言)을 지낸 것으로 적혀 있다. 그가 예조좌랑, 사헌부감찰 등을 지내고 1796년(정조 20)에 지금의 경북 문경 지역에 있었던 유곡역(幽谷驛) 찰방으로 임명된 것까지는 ≪일성록≫에서 확인된다. 문집을 남기지는 않은 듯하다. 당시 56세로, 여정 내내 함께했다.
손갑동(孫甲東, 1743∼?)은 조선 후기 밀양 지역 문인이다. 본관은 밀성(密城), 자는 규백(揆伯), 호는 행남(杏南)이다. 그의 8대조 추천(鄒川) 손영제(孫英濟, 1521∼1588)는 1561년(명종 16)에 문과에 급제해 내외직을 거쳤고, 도산서원(陶山書院) 건립에 사재를 출연했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뒤 밀양 교동에 오연정(鰲淵亭)을 지어 거처했다. 이후 오연정은 여러 차례에 걸쳐 성쇠를 겪었는데, 1771년(영조 47)에 손갑동이 중건에 큰 역할을 했다. ≪국역 밀양누정록≫ 참조. 당시 66세로, ≪동남창수록≫에 등장하는 인물 중 제일 연장자다.
손병로(孫秉魯, 1747∼1812)는 조선 후기 밀양 지역 문인이다. 본관은 밀성(密城), 자는 종례(宗禮), 호는 죽리(竹籬)다. 오한(聱漢) 손기양(孫起陽, 1559∼1617)의 6세손으로, 1777년(정조 1) 진사시에 입격해 성균관에 들어갔으니, 남경희와 진사시 동방이다. ≪치암집≫ 권5에 <죽리시집서(竹籬詩集序)>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시집 또는 문집이 있었을 듯하나 확인되지 않는다. 1936년에 발간된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등에는 문집이 있다고 적혀 있는 곳도 있고 언급이 없는 곳도 있다. 당시 62세로, 여정 내내 함께한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다.
손치동(孫致東, 1749∼?)은 조선 후기 밀양 지역 문인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명여(明汝)다. ≪동남창수록≫에 적힌 인적 사항 이외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60세였다.
신억(申 , 1761∼?)은 조선 후기 밀양 지역 문인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조겸(祖謙), 호는 양파(陽坡)다. 당시 48세였다.
신종(申 , 1769∼?)은 조선 후기 밀양 지역 문인이다. 본관은 동양(東陽), 자는 낙청(洛淸), 호는 정허당주인(靜噓堂主人)이다. ≪밀주징신록≫ <속록>에는 호가 정허정(靜虛亭)으로 적혀 있다. 당시 40세였다.
이근오(李覲吾, 1760∼1834)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학성(鶴城), 자는 성응(聖應), 호는 죽오(竹塢)다. 1789년(정조 13)에 진사시에 입격했고 다음해 증광시에 급제했다. 승문원부정자, 성균관전적 등을 역임했고, 1804년 병조정랑을 끝으로 고향인 울산으로 낙향했다. ≪죽오집(竹塢集)≫ 5권 2책이 전한다. 이 시는 ≪죽오집≫에 없다. 당시 49세였다.
이남규(李南圭, 1765∼?)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용(稚容), 호는 설산(雪山)이다. 1794년(정조 18)에 알성시에 급제했다. 원문에는 1764년 갑신생으로 되어 있으나 ≪방목≫에는 1765년 을유생으로 되어 있다. 이남규가 1807년부터 1809년까지 황산역 찰방으로 재임한 것은 ≪영남읍지≫(1871년본) <황산역지>에서 확인된다. 이근오와 여행을 함께할 정도로 친하게 교유했으며, ≪죽오집≫에 그와 주고받은 시편이 많이 실려 있다.
이유하(李游夏, 1767∼?)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학(景學)이다. 1786년(정조 10)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했고, 1795년(정조 19)에 수원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원문에는 1765년 을유생으로 되어 있으나 ≪방목≫에는 1767년 정해생으로 되어 있다. 이유하가 양산군수로 재직한 사실은 ≪양산군읍지≫(1832년본) <환적(宦蹟)>에서 확인된다. 당시 42세였다.
이휘악(李輝岳, 1745∼?)은 본관은 여강(驢江), 자는 맹온(孟蘊)이다. ≪동남창수록≫에 적힌 인적 사항 이외에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당시 64세였다.
최낙(崔 , 1751∼?)은 본관은 월성(月城), 자는 지옹(智翁)이다. ≪동남창수록≫에 적힌 인적 사항 외에는 더 확인되지 않는다. 수련에서 쇠약한 모습이 예년과 다르다는 언급을 통해 이날 모인 사람들과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당시 5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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