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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소진

    류소진 프로필

  • 국적 대한민국
  • 학력 베이징대학교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
    이화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 경력 서울대학교 강사
    한국교원대학교 강사
    한양대학교 강사

2017.07.25.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시화(詩話)≫의 지은이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북송(北宋) 때의 문학가 겸 역사가로 자가 영숙(永叔)이고 호가 취옹(醉翁) 또는 육일거사(六一居士)이며 시호가 문충(文忠)이다. 문학가로서의 구양수는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하는 뛰어난 문장가요 송시(宋詩)의 특질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일 뿐만 아니라 송대를 대표하는 걸출한 사인(詞人)이기도 했으며, 역사가로서의 구양수는 ≪신당서(新唐書)≫와 ≪신오대사(新五代史)≫의 저자였다.
그는 진종(眞宗) 경덕(景德) 4년(1007) 면주[綿州,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몐양(綿陽)]에서 당시 면주군사추관(綿州軍事推官)으로 재임 중이던 구양관(歐陽觀, 952∼1010)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수주[隨州,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쑤이저우]에 있는 숙부 집에 의탁했다. 다행히 양가집 딸인 어머니가 상당한 수준의 학식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구양수는 어머니에게 글자를 배울 수 있었는데 종이와 붓이 없어 갈대를 붓으로 삼고 모래를 종이로 삼아 글자를 익혔다.
스물네 살 되던 해인 인종(仁宗) 천성(天聖) 8년(1030)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해 서경유수추관(西京留守推官)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당시 서경유수는 전유연(錢惟演)이었는데 그의 막부에 윤수(尹洙)·매요신(梅堯臣) 등의 뛰어난 문인들이 있어 그들과 가까이 지낸 덕분에 그들의 영향으로 시문 혁신(詩文革新)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경우(景祐) 3년(1036)에 재상 여이간(呂夷簡)의 횡포를 옹호하는 고약눌을 비판하다가 이릉[夷陵,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이창(宜昌)]현령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경력(慶曆) 5년(1045)에 저주[滁州,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 추저우]지주(知州)로 나갔는데 저주지주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취옹이라는 자호를 짓고 <취옹정기(醉翁亭記)>라는 불후의 명문을 창작했다.
경력 8년(1048)에 양주[揚州,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양저우]지주(知州)로 부임해 재임 기간에 평산당(平山堂)이라는 유명한 건물을 지었고, 황우(皇祐) 원년(1049)에 영주[潁州, 지금의 안후이성 푸양(阜陽)]지주로 부임했는데 서호(西湖)를 비롯한 영주의 산수에 매료된 나머지 나중에 그곳을 퇴거지로 삼는 계기가 되었다.
가우(嘉祐) 2년(1057)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예부시(禮部試)를 주관한 그는 태학체를 중시하던 당시의 문풍을 바로잡기 위해 태학체로 작성한 답안을 불합격시켰고 소식(蘇軾)을 발굴했다.
구양수는 그 뒤 예부시랑(禮部侍郞)·추밀부사(樞密副使)·호부시랑(戶部侍郞)·참지정사(參知政事)와 몇몇 고을의 지주를 더 역임하고 신종(神宗) 희녕(熙寧) 4년(1071) 6월에 마침내 사직을 허락받아 7월에 영주로 돌아가서 한가로이 지냈다. 그러나 그는 한가로운 생활을 오래 즐기지 못하고 1년 뒤인 희녕 5년(1072) 윤7월에 병사하고 말았다. 향년 66세였다. 문집으로 ≪구양문충집(歐陽文忠集)≫이 있다.
≪속시화(續詩話)≫의 지은이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북송 때의 유명한 역사가로 자가 군실(君實)이고 호가 우수(迂叟)다. 섬주(陝州) 하현[夏縣,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샤현] 속수향(涑水鄕) 출신이기 때문에 속수선생이라고도 하고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온공(溫公)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북송 진종(眞宗) 천희(天禧) 3년(1019)에 사마지(司馬池, 980∼1041)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상황 판단이 빠를 뿐만 아니라 결단성도 있었다.
인종(仁宗) 보원(寶元) 원년(1038)에 스무 살의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아간 그는 인종 황우(皇祐) 3년(1051)에 관각교감(館閣校勘)을 맡았는데 이것은 경전과 역사를 좋아한 그에게 조정의 각종 전적을 자유로이 열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황우 5년(1053)에 사관검토(史館檢討)라는 사관(史官)의 직책을 맡음으로써 더욱더 역사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종(神宗) 때에 이르러 왕안석(王安石)이 신법(新法)을 강행하자 그는 이에 반대하다가 마침내 낙양(洛陽)으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294권이나 되는 거질의 역사책 ≪자치통감≫을 저술했다.
원풍(元豊) 8년(1085)에 신종이 세상을 떠나고 열 살짜리 아들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섭정이 된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신법을 싫어한 나머지 구법파의 영수인 사마광을 불러들여 재상으로 삼았다. 그러자 사마광은 신법파 인사들을 모조리 조정에서 몰아내고 그들이 제정한 신법을 하나씩 하나씩 모두 폐기해 버렸다. 그러나 조정으로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원우(元祐) 원년(1086) 10월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주요 저서로 ≪자치통감≫ 이외에 ≪온국문정사마공문집(温國文正司馬公文集)≫·≪계고록(稽古錄)≫·≪속수기문(涑水記聞)≫·≪절운지장도(切韻指掌圖)≫ 등이 있다.

<시화 / 속시화>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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