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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함석헌 프로필

  • 국적 대한민국

2017.10.24.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일제하의 민족 운동가, 그리고 이후 민주주의 인권 운동가이자 종교·평화 사상가로서 끝없는 실천의 인생을 산 함석헌(咸錫憲)은 아버지 함형택(咸亨澤)과 어머니 김형도(金亨道) 사이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916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의사로서의 진로를 결정,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갈 생각으로 평양의 관립인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다. 2학년이던 1917년 8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이웃 마을에 살던 황득순(黃得順)과 결혼을 한다(슬하에 2남 5녀). 3학년이 되던 1919년에 당시 숭실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친척 형 함석은이 찾아와 평안남북도 학생 운동의 책임을 그에게 맡기고 역사적인 3·1 운동을 직접 경험하게 되면서 의사를 꿈꾸던 함석헌의 생애는 크게 바뀌게 된다.
3·1 운동 참여 이후 학교를 자퇴하게 된 함석헌은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수리조합에서 조합원 일을 하며 2년 간 방황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일단 학업을 이어 나가기 위해 경성으로 가게 된다. 신학기 시작을 놓쳐 입학할 학교를 찾지 못했던 그는 함석규 목사의 추천을 받아 1921년 정주의 오산중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유학길에 오른 함석헌은 고심 끝에 교육자로서의 진로를 정하고 이듬해 도쿄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甲組)에 입학하게 되었으나, 당시 일본식 국가주의로 무장된 직업 교사 양성을 목표로 하는 학교의 수업 과정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평생 친구가 되는 김교신(金敎臣)과 친분을 가지게 되고 이어 그가 나가고 있던 우치무라 간조의 성경 연구 모임에 같이 참여하게 되면서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김교신을 포함해 여기서 만난 조선인 친구들(유석동, 송두용, 정상훈, 양인성) 6명은 별도의 모임을 만들어 성서 연구를 지속하면서 1927년 7월 동인지 성격의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도쿄에서 창간한다. 창간호(국판 44쪽)에 발표된 <먼저 그 의를 구하라>는 활자화된 함석헌의 첫 번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1928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함석헌은 귀국 후 오산학교에 부임해 역사와 수신(修身)을 가르친다. 한편으로는 ≪성서조선≫을 발행하면서 ‘성서조선 독자회’를 열고 다수의 글을 발표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지만 그의 무교회주의 방식의 신앙 운동은 기존 기독교인들에게 배척을 받기도 한다.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종교 사상을 개척해 나가던 함석헌은 1933년 12월 30일부터 이듬해 1월 5일까지 송두용의 집(서울 오류동)에서 가진 성서 모임에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 초고를 발표하고 토론을 거친 뒤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성서조선≫에 연재한다. 일제에 의한 조선의 역사 왜곡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우리의 역사를 바로 보고자 하는 이 글은 그의 대표작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해방 이후 이 글은 일제 당시 검열로 삭제되었던 부분을 포함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1950. 3. 28), 이후에는 ‘성서적 입장’을 빼고 대폭 수정해 ≪뜻으로 본 한국 역사≫(1962)로 제목을 변경·출간했는데 민중의 고난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씨? 사관’을 보여 주는 그의 중요한 저술이다.
일제 말기 점점 노골화되던 식민지 교육 정책 속에서 창씨개명과 일본어 교육이 강조되자 더 이상 선생직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함석헌은 1938년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과수원을 경영하기도 했는데 이해에 자식 둘을 홍역으로 잃는다. 1940년 평양 송산리의 송산(松山)농사학원을 인수해 거처를 옮긴다. 하지만 전 주인이었던 김두혁(金斗赫)이 도쿄로 유학 가서 도쿄농과대학 조선인 졸업생들과 만든 소위 ‘계우회(鷄友會)’ 모임 사건으로 구속되었는데, 함석헌도 연루자로 검거되어 1년 여 동안 평양의 대동경찰서에 수감되었다. 결국 농사학원은 폐원되었고, 아버지는 옥살이 중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된다.
1942년 3월 ≪성서조선≫에 김교신이 쓴 권두언을 문제 삼은 일제의 폐간 조치와 더불어 함석헌 역시 연루자로 지목되면서 다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한다. 출소 후,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중 오랜 벗이자 스승의 관계였던 김교신의 사망으로 인한 큰 충격과 슬픔 속에서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 공간에서 여러 자리에 불려 다니며 평안북도 임시 자치 위원회 문교부장을 맡기도 하였으나, 반소(反蘇)?반공(反共) 시위인 ‘신의주 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소련군 사령부에 의해 체포되어 평안북도 경찰부 유치장에 또다시 50여 일을 감금당하고 만다.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산학교에 뿌려진 반정부 전단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또다시 투옥된다. 별다른 용의점이 없어 한 달 만에 석방되었으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 때문에 당시 내려진 ‘지주 숙청령’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 결국 1947년 월남을 감행한다. 1년여 후 아내와 자식 일부도 월남했으나, 어머니는 내려오지 못하고 이산가족이 된다.
월남 직후 오류동 노연태의 집에서 지내면서 YMCA 강당에서 일요 종교 집회를 시작하고, 유영모 선생 등과 함께 모임을 가지던 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대구, 김해 등지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이때 가진 한 성서집회에서 그간의 무교회주의와 결별하는 신앙적 변화를 겪게 된다. 퀘이커(Quaker)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즈음으로 여긴다. 휴전 이후 다시 서울에 올라와 강연 활동과 양계장을 하며 어렵게 삶에 정착해 나가는 가운데 ≪말씀≫, ≪편지≫ 등의 신앙 잡지에 여러 글을 발표한다. 그중 1956년 ≪사상계≫ 1월호에 발표한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글에서 그는 기독교의 타락상과 계급화를 비판했는데, 이 글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후에도 함석헌은 ≪사상계≫에 영향력이 큰 글들을 발표하면서 장준하와 함께 군사 독재와 치열하게 싸우는 길을 걷게 된다. 한편으로는 언제나 꿈꾸어 왔던 ‘이상촌’을 위해 기증(정만수 장로)받은 천안(봉명동)의 땅에서 교육과 농사를 함께하는 공동체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곳의 이름을 ‘씨?농장’이라고 했는데, 후일에 직접 번역해 책으로 출간한 간디의 자서전을 읽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1958년 8월호 ≪사상계≫에 발표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 20여 일간 구금되는, 이승만 정권 시기 대표적인 필화 사건을 겪는다. 함석헌의 첫 번째 정치 평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로 인한 필화 사건 이후 함석헌은 오히려 왕성하게 글들을 발표하면서, ‘씨?농장’에서 시국을 참회하는 단식 투쟁을 전개하는 등 사회적인 목소리를 높여 간다. 1961년 ≪사상계≫ 7월호에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게 된 당시 군부 정권을 비판하는 글 <5·16을 어떻게 볼까>로 인해 사장이었던 장준하와 취재부장이 중앙정보부에 체포되기도 했으나 당시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 때문이었는지 정작 함석헌을 체포하지는 못했다.
1962년 2월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3개월 예정 방미 길에 오른다. 귀국한 직후 7월에 오산학교 강당에서 귀국 강연회(오산학교 동창 주최)를, 이어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사상계≫주최의 시국 강연회를 연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미처 입장하지 못한 시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기마 경관대까지 출동한 이 강연회를 함석헌은 스스로 ‘사회 참여의 시작’으로 보았는데, 이후 장준하와 더불어 활발한 강연을 통해 군사 정권의 잘못을 꾸짖는 한편 굴욕적인 한일 협정의 비준을 반대하는 활동을 한다. 1965년에는 이를 위해 각 분야 인사 30여 명이 결성한 조국 수호 국민 협의회의 상임 대표로 선출되기도 한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을 위한 개헌을 앞두고 반대 시위에 앞장서는 한편, 1970년에는 4·19혁명 10주년에 맞추어 개인 잡지 성격의 월간지 ≪씨?의 소리≫를 창간하지만 두 달 만에 폐간 조치를 당하게 된다. 이후 법정 투쟁 끝에 승소해 이듬해 8월에야 복간호로 3호를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71년에는 이후 1988년까지 지속된 ≪노자≫와 ≪장자≫ 강의를 시작하고, 한국신학대학에서 동양 고전을 강의한다. 간디 탄생 102주년 기념 강연회를 인도 영사관과 공동으로 주최한다. 1970년에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추도회를 씨?의 소리사가 1975년까지 주최한다. 1972년에는 1차 ≪씨?의 소리≫ 독자 수련회를 안양 농민교육원에서 개최하고, 10월에 선포된 비상계엄하에 연행되기도 했으나 일주일여 만에 귀가한다.
1957년부터 운영해 온 천안의 씨?농장을 정리하고 1973년 근처 모산(毛山)에 있던 구화(龜化) 고등공민학교를 인수했으나, 운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1976년에는 폐교한다.
1974년 윤보선, 김대중과 함께 반유신 민주화 운동 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민주 회복 국민회의에 동참하면서 유신에 반대하는 강연과 문필 활동을 지속해 나가는 가운데 중앙정보부에 수차례 연행된다. 유신 정국이 보다 긴박해져 가는 가운데 1975년 장준하는 의문의 실족사를 당하고, 함석헌 역시 1976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3·1 운동 57주년 기념식에서의 구국 선언문 낭독 사건에 연루되어 주동자였던 김대중, 윤보선, 문익환과 함께 1심에서 징역 8년과 자격 정지 8년형을 선고받는다.
유신 정권에 저항하는 함석헌의 사회적 활동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지속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정권의 탄압 역시 이어지면서 ≪씨?의 소리≫는 수없이 많은 검열 조치를 당하게 된다. 정권에 의한 강제 연행과 여러 차례의 가택 연금 상황에서도 함석헌의 사회적 관심은 국내를 넘어 국제 정세로 이어지면서 탈민족주의·탈국가주의적 사상으로 보다 넓어진다. 한편으로는 학문적 탐구도 놓치지 않아 힌두교 경전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바가바드기타≫를 번역해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1978년 5월 8일 부인 황득순 여사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1979년에는 세계 퀘이커회의 추천으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노벨 평화상 후보가 된다(미국의 퀘이커 봉사회 바바라 바우만이 내한해 추천서를 전달한다. 미국 퀘이커 봉사회는 1947년 이미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해 스위스에서 열리는 퀘이커 세계 대회 참석차 출국해 독일과 캐나다, 미국을 방문하던 중에 박정희 저격 사건으로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한다. 하지만 귀국 직후 명동 YWCA에서 결혼식으로 위장한 ‘통대(통일 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대통령 선출 저지 국민대회’ 참석으로 경찰과 계엄사 검찰부에 의해 연이어 연행되어 1980년 보통 군법 회의에서 1년 형을 선고받았다. 형 면제 처분으로 전국을 돌면서 ≪씨?의 소리≫ 10주년 기념 강연회를 열던 중 제주에서 확대 계엄령을 맞고, 이어 ≪씨?의 소리≫는 계엄 당국으로부터 폐간 조치를 당한다(통권 95권).
1985년 10월 퀘이커 세계협회의 초청으로 종교 대회에 참석하고자 미국과 캐나다를 다시 방문했다. 여러 현지 교회와 한인 교회에서 강연을 했으며, 연말에는 일본의 교회에서 강연을 하고 돌아왔다. 이해에 두 번째로 노벨 평화상 후보에 추천되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발단으로 민주화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이 드높아 가던 1987년 6월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 본부’가 발족하면서 함석헌은 공동 고문을 맡아 이 단체를 이끌었고 결국 ‘6·29 선언’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바로 이날 함석헌은 서울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고 췌장, 담낭, 십이지장 부위 등에 발병한 종양 절제 수술을 받게 된다.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면서도 ≪씨?의 소리≫를 복간하기 위해 문화공보부에 복간 신청을 내고 결국 정기 간행물 등록증을 교부받게 된다. 12월에는 드디어 ≪씨?의 소리≫ 복간호를 발행하기도 했지만 이듬해인 1989년 2월 4일, 서울대학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별세했으며 오산학교 강당에서 오산학교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경기도 연천군에 먼저 별세한 부인과 함께 합장되었다가 2006년 10월 대전 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으로 함께 안장되었다.

<함석헌 수필선집>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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