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수나라 역사서, ≪수서≫
대운하를 판 나라, 고구려를 침입했다가 살수대첩으로 무너진 나라, 그게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수나라다. 상고시대부터 한나라까지의 역사가 ≪사기(史記)≫에 담겨 있다면, 혼란했던 남북조 시대를 통일한 수나라의 역사는 ≪수서(隋書)≫에 담겨 있다. 그중 <경적지(經籍志)>는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 다음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지(史志) 도서목록이다. 수나라의 장서뿐만 아니라 위진남북조 시기 도서들의 전래 과정을 잘 기술하고 있어 역대로 많은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혼란을 바로잡은 통일 왕조 수나라의 역사서
≪수서≫는 수(隋)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사기(史記)≫·≪한서(漢書)≫ 등과 함께 중국의 정사인 24사(史) 중 하나로 꼽힌다. 수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기에 종지부를 찍은 통일 왕조다. 수나라는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양제(煬帝), 남과 북의 교류를 촉진한 대운하, 네 차례에 걸친 고구려와의 전쟁,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위진남북조의 혼란한 시기를 통일한 대제국 수나라는 581년 문제(文帝) 양견(楊堅)의 건국부터 618년 양제 양광(楊廣)이 멸망하기까지 불과 37년 만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수나라의 멸망은 진시황(秦始皇)의 진(秦)나라와 유사하다. 2대에서 멸망했다는 점, 멸망한 후 한나라와 당나라라는 강한 왕조가 탄생했다는 점, 오랜 기간 이어진 난세를 통일했다는 점 등이 그렇다. 대제국을 형성했던 왕조의 흥망성쇠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흥미로운 내용과 교훈을 제공한다. 여기에 수나라는 고구려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수서≫를 읽는 것은 이처럼 흥망과 치란의 교훈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사에 대해서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지리지>와 그 구성
≪수서≫ <지리지>는 ≪수서≫에 수록된 십지(十志) 중 한 편이다. ≪수서≫ 권29∼권31에 해당하고, 상·중·하 3편으로 이뤄져 있다. <지리지>는 원래 당 태종(太宗) 정관(貞觀) 15년(641년)에 편찬되기 시작해 당 고종(高宗) 현경(顯慶) 원년(656년)에 완성된 ≪오대사지(五代史志)≫의 일부로 편찬되었다가 후에 ≪수서≫에 편입되었다. 진(晋)과 남조 송(宋)나라에서 수나라에 이르는 300여 년간의 주·군·현의 연혁과 각 지역의 민속과 물자 등의 설명이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지리지>는 전체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총서(總序) 부분이다. 총서는 ≪수서≫ <지리지>의 가장 앞쪽에 있다. 본지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에 해당한다. 이곳에서는 지리 개념과 효용, 역대 왕조들의 지리 제도와 그 변혁 과정, 남조 양나라에서 수나라에 이르는 각 왕조의 군과 현의 수와 세대수 및 개간한 토지 면적 등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둘째는 <지리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군(郡)에 대한 소개다. 본지에 수록된 군은 경조군(京兆郡)에서 희평군(熙平郡)까지 총 207개다. 군에 대한 소개는 또 두 가지 내용, 즉 해당 군 소개와 군이 거느린 현 소개로 이뤄진다. 군 소개에서는 해당 군의 명칭, 위치, 연혁, 관서 및 관할하는 현과 세대의 수를 소개한다. 현 소개에서는 해당 현의 명칭 변화, 연혁, 해당 지역의 대표적인 산·하천·염전·식량창고·관서·광산·장성(長城) 등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마을의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셋째는 중국의 전통적인 지역 구분 개념인 구주(九州)에 의거해 군들을 묶고, 해당 군의 유래와 풍속, 사람들의 기질, 물자 등을 설명했다. 이 부분에서는 지역의 독특한 풍속·혼인·장례·놀이 등을 소개하고 있어 지역 특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고구려 기록
<지리지>에서 고구려 관련 지명을 크게 두 군데서 볼 수 있다. 첫째는 권30, <지리지> 중편의 ‘안락군(安樂郡)’에 나오는 안시(安市)라는 지명이다. “옛 안락군이 안시(安市)·토은(土垠) 두 현을 관할한다”라고 기록했다. 안시는 양만춘 장군의 안시성(安市城)이 있었던 곳으로 추측되기에 주목된다. 둘째는 같은 편의 ‘요서군(遼西郡)’에 보이는 영주(營州)와 요동(遼東)의 명칭이다. ‘요서군’에는 영주총관부(營州總管府)를 두었다가 대업 초년에 폐지한 일이 나오고, 그 아래 ‘유성(柳城)’에는 “북위 때 화룡성에 영주를 두고, 건덕·기양·창려·요동·낙랑·영구 등의 군을 거느렸다”고 했다. 영주는 영양왕(嬰陽王)이 말갈(靺鞨) 기병 3만 명을 이끌고 공격했던 곳으로 유명한데, 훗날 고구려와 수의 전쟁이 일어나는 단초가 되는 곳이다. 요동은 요수(遼水)의 동쪽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요서와 상대되는 명칭이다. 이곳은 고구려가 차지한 땅으로, 고구려가 수 양제의 100만 대군과 격전을 벌인 곳이다. 여기서 또 주목해야 할 것은, ≪수서≫ <지리지>에는 요동군(遼東郡)은 보이지 않고, 위의 기록처럼 ‘요동을 거느렸다’라고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요동 지역이 수나라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았던 땅이었음을 말해 준다. 더 나아가 수나라가 이곳과 가까운 영주에서 요동 지역을 통제하려고 했음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