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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단편집 초판본 상세페이지

조명희 단편집 초판본작품 소개

<조명희 단편집 초판본> 포석(抱石) 조명희가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한 것은 1920∼1928년으로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에 동시를 포함한 시와 희곡, 수필과 평론 등을 모두 아울러, 한반도와 일본과 소련 등으로 옮겨 다니며 민족의 수난기를 관통한 작가 자신의 체험과 맞물려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세계는 두 가지 모습, 즉 1925년 무렵을 경계로 한 초기의 관념적·신비적·종교적인 시와 희곡 그리고 후기의 현실주의적 소설을 보여 준다.

조명희는 1925∼1928년에 단편소설 12편을 창작했다. 처음에는 가난과 식민지 현실을 그렸고 <낙동강> 이후에는 주로 혁명적인 투쟁을 다루었다. 많지 않은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이런 차이가 보이는 것은, 1925년 8월에 카프가 창립된 것과 연관해서 생각할 수 있다. 조명희는 카프 회원으로 가입해서, 카프의 열성적인 비해소파로 꼽히는 이기영, 한설야와 이념적인 동지로서 두터운 교분을 가지며 무산자 계급 운동에 가담하고, 식민지 통치에 억압받고 있는 빈궁의 민족적 현실을 고발하는 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카프의 방향 설정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다.


저자 프로필

조명희

  • 국적 대한민국
  • 출생 1894년 8월 10일
  • 학력 도쿄 도요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
  • 경력 극예술협회 창설자

2015.06.18.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조명희(1894~1938)
조명희는 1894년 8월 10일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부친 조병행과 모친 연일 정 씨 사이의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누대에 걸친 지배계급으로서의 가정환경은 조명희의 현실 인식의 밑바탕이 된다.
1907년경에 13세로 네 살 위인 여흥 민씨와 결혼했는데, 애정이 전제되지 않은 이 조혼은 이후 그가 가정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까지 확산된다. 이 무렵 포석은 진천사립소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서울로 유학하여 셋째 형 집에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당시 유행하던 ‘영웅숭배열(英雄崇拜熱)’에 들떠서 북경사관학교에 들어가려고 고보를 그만두게 된다. 하지만 집으로 붙들려 오게 되고 이때 포석은 ‘소일 격(消日格)으로 소설(小說)이란 것을 읽’으며 문학을 접하게 된다.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몇 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하고 동경으로 가서, 동양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 청강생으로 적을 두고 유학생들의 모임인 학우회 활동을 한다. 이때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이던 김우진을 만나게 되는데, 둘은 문학상의 영향을 서로 주고받으며, 포석은 이 인연으로 희곡을 창작하고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된다. 또한 일시적이나마 무정부주의 계열인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해서 사상운동도 체험하게 된다. 동경에서의 생활은 힘든 것이었다. 기울어져 가는 가세로 학비를 전적으로 해결해 줄 수는 없는 일이어서 포석은 학비 구걸을 해야 했다. 그러나 가난이 그에게 상당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가 생활인으로서의 책임을 강요당할 때, 즉 귀국한 후이다. 1923년 초, 포석은 어려웠지만 자유로울 수 있었던 유학을 중도에 끝내고 귀국한다. 1924년에는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펴냈다. 가족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강요받는 이즈음에야 그 ‘고통의 떡메’와 같은 현실은 그의 의식 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1925년 무렵 포석은 ≪시대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한다. 그가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 밤>을 번역, 연재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1925년 8월 창립된 카프 회원으로 가입해 카프의 열성적인 비해소파로 꼽히는 이기영, 한설야와 이념적인 동지로서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1925년에서 1928년까지는 조명희의 창작 기간 중에서 가장 활발한 시기다. 이 시기에 그는 단편소설 12편과 시, 수필, 평론 등을 발표했다.
1928년 여름 망명 직전에 포석은 가족을 이끌고 성공회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바 있는데, 그 심경은 짐작할 길이 없다. 그리고 얼마 후 모친에게만 하직 인사를 하고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포석은 종적을 감추었다. 하루쯤 지나 한 학생이 쌀 한 가마를 들여주면서 ‘선생님이 떠나셨다’고 알려줘서야 가족들은 비로소 그의 가출을 알았으며, 망명 사실은 한참 뒤 포석에게서 단 한 번 온 편지로 알았다고 한다. 망명 후 포석은 연해주 신한촌의 중학교와 우수리스크 조선사범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31년에 황명희와 재혼했다. 구한말 전후에 두만강 건너 블라디보스토크 중심의 연해주 지역에 모여 살던 한인들의 한글 신문인 ≪선봉≫에 정기적인 문예 페이지를 마련했던 조명희는, 10년 가까이 수많은 현지의 한인 청년들에게 한글 문학을 지도했다. 강태수, 김기철, 김증송, 김광현, 조기천, 김두칠, 연성용, 태장춘 등이 포석의 제자다. 이들은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된 후로 카자흐스탄 알마티 등에서 ≪선봉≫의 후신인 ≪레닌기치≫(현 ≪고려일보≫)를 창간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한글 문단을 형성해 왔다.
1934년 소련작가동맹의 맹원이 되기도 한 포석은 단편소설과 시, 동요, 희곡, 장편소설 등에 걸치는 폭넓은 작품 활동을 했다.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기 직전, 익명의 편지에 의해 체포되고 1938년 5월 11일에 총살당했다. 당시 가족들은 이런 정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아직까지도 조명희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1956년 소련 정부 당국에 의해서 조명희에 대한 과거의 잘못된 결정을 파기하여 복권시킨 후에, 소련 과학원에서 한글판 ≪조명희 선집≫(1959)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1988년에는 그의 자녀가 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소재 국립 나보이 문학박물관에 ‘조명희 문학기념실’이 열린 데 이어 1992년에는 타슈켄트에 ‘조명희 거리’가 조성되었다.

이정선
경원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최인훈 소설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요즘은 조명희를 비롯해 구소련 지역 고려인의 문학을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 한반도의 상황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재외 한민족이 처한 다양한 상황과 문학작품을 통해서 일제 식민주의와 맞물린 우리의 근대를 새롭게 조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목차

낙동강(洛東江)
땅속으로
춘선이(春先伊)
농촌(農村) 사람들
아들의 마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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