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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 | 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삶에 관한 이야기 상세페이지

소설 서양 고전문학

개정판 | 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삶에 관한 이야기

소장종이책 정가18,000
전자책 정가20%14,400
판매가14,400

개정판 | 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삶에 관한 이야기작품 소개

<개정판 | 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삶에 관한 이야기> 노예로서의 삶, 자유를 위한 갈망
흑인 노예제의 폐해가 가장 극심했던 남북전쟁 이전에 미국 남부에서 태어난 더글러스의 삶은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노예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대부분의 노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재산으로 취급되고, 죽을 때까지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농장 주인이나 감독관에게 수시로 채찍질이나 체벌을 당하기도 했다. 노예는 재산을 소유하거나 글을 배우는 것도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법적으로 결혼을 할 수 없었다. 또한 백인 농장주의 성적 착취로 말미암아 흑인 여성 노예에게 자식이 생기더라도 그녀의 자식들은 노예로 취급될 뿐 백인 농장주의 자식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더글러스의 글공부의 경험은 그의 인생에서 엄청난 사건이었다. 노예면서 고아와 다름없는 유년기를 보낸 더글러스는 12세에 주인집에서 알파벳을 배웠다. 비록 얼마 뒤에 주인의 강력한 반대로 중단되고 말았지만 그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글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후 더글러스는 길거리에서 만난 가난한 백인 아이들을 통해 글을 익혔고, 휴의 집에 있는 책이나 신문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특히 더글러스가 잔돈을 모아서 직접 구입한 ≪미국의 웅변가≫는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는 더글러스에게 노예제의 실상을 깨닫게 하고 자유를 갈망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인간다운 삶을 얻기 위한 노력
더글러스는 인근 농장의 노예들과 함께 주일예배를 하면서 이들에게 신약성경을 통해 글을 가르치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당시 주인 토머스는 더글러스를 온순하게 만들고자 악명이 높았던 에드워드 코비의 농장으로 보냈다. 이미 글을 깨쳐 백인과 흑인 노예가 서로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자각을 갖게 된 더글러스는 어느 날 코비의 심한 매질에 저항하며 두 시간 가까이 몸싸움을 했다. 결국 코비가 더글러스에게 앞으로는 심하게 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몸싸움은 끝이 났고, 다행히 더글러스는 처형당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1년 뒤 더글러스는 비교적 친절한 농장주인 윌리엄 프릴랜드의 농장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더글러스는 이곳에서도 일요일이나 밤에 노예들에게 은밀하게 글을 가르쳤고, 그중 다섯 명의 노예와 북부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의 계획은 보트를 훔쳐 체서피크 만 북쪽 끝까지 간 다음 자유 주인 펜실베이니아까지 가는 것이었다. 1836년 부활절 휴일 직전 계획을 실행할 예정이었으나 공모자 중 한 명이 이를 누설하는 바람에 모두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더글러스는 석방된 후 조선소 견습공으로 선체의 틈을 뱃밥으로 메우는 일을 배우게 되었다. 숙련공이 된 더글러스는 임금을 많이 주는 곳을 찾아다니며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가 번 돈은 일주일에 한 번씩 주인에게 모두 갖다 바쳐야 했다.
볼티모어는 도시였기 때문에 노예 주인 메릴랜드에 있으면서도 자유 흑인들이 비교적 많았다. 이들은 동(東)볼티모어 정신향상협회라는 일종의 교육 모임을 만들었는데, 더글러스는 이 모임에 참석해 애나 머리를 만나 1838년에 약혼했다. 애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수수하고 평범한 자유 흑인 여성이었다. 더글러스는 애나를 만나 사랑에 빠진 뒤 다시 한 번 자유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를 깨닫고 두 번째 탈출을 시도했다.
더글러스는 애나에게 돈을 빌려 필라델피아행 기차표를 구입했으며, 자유 흑인 친구에게 자유 흑인 선원임을 증명하는 선원증을 구해 선원 복장을 하고 북부행 기차에 올랐다. 메릴랜드 주를 넘어 델라웨어 주에 도착한 더글러스는 페리를 이용해 필라델피아까지 갔다. 하지만 이곳 역시 도망 노예를 포획하려는 백인들이 많은 곳이라 그 즉시 기차를 갈아타고 1838년 9월 4일 뉴욕 시에 도착해 꿈에도 그리던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더글러스의 또 다른 전기
뉴욕에 도착한 더글러스는 흑인을 받아 주는 하숙집을 중심으로 도망 노예 추적자들이 활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며칠간 길거리를 배회한 끝에 어느 흑인 선원의 도움으로 뉴욕자경단위원회의 일원이자 뉴욕 지하철도망을 관리하던 흑인 노예제 폐지 운동가 데이비드 러글스를 만나 잠시 그의 집에서 머물게 된다. 그사이 더글러스는 약혼자 애나를 뉴욕으로 불러 1838년 9월에 결혼했다. 더글러스 부부는 러글스의 추천으로 뉴욕보다는 반노예적 정서가 강해 노예 추적자들의 손길이 잘 미치지 않을뿐더러 일자리도 얻기 쉬운 매사추세츠 주의 뉴베드퍼드로 이주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노예 시절의 성인 ‘베일리’를 ‘더글러스’로 바꾸었다.
뉴베드퍼드에서의 생활은 더글러스에게 또 다른 전기가 되었다. 우선 그는 조선소에서 숙련공으로 일하고자 했으나 북부 사회에도 만연해 있던 인종차별로 말미암아 일용 노동자로 일해야만 했다. 애나는 볼티모어에서 그랬듯이 가정부와 세탁부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러던 중 더글러스는 당대에 가장 유명하고 극렬한 노예제 폐지 운동가인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이 발행하던 주간지 ≪해방자≫를 읽게 되었다. 개리슨은 노예제의 무조건적이면서도 즉각적인 폐지를 주장했고, 흑인들의 아프리카로의 식민 계획에도 반대했으며, 노예제를 옹호하는 헌법에 입각한 정부에도 반대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더글러스는 개리슨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노예제 폐지 운동가의 모임에도 정기적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더글러스가 개리슨을 처음 본 것은 1841년 8월 뉴베드퍼드의 노예제 폐지 운동가 모임에서였다. 며칠 뒤 더글러스는 미국노예제반대협회의 매사추세츠 지부의 연례 회합에서 연설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 더글러스의 연설을 지켜본 개리슨은 그의 자질을 즉석에서 알아보고 더글러스를 협회의 순회 연설자로 고용했다. 연설자로서의 더글러스의 역할은 다른 노예제 폐지 운동가와 북부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자신의 노예 시절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해방자≫를 비롯한 노예제 폐지 운동 관련 신문 구독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이후 더글러스는 10년간 개리슨파의 일원으로 노예제 폐지 운동에 헌신하게 되면서 19세기 미국의 가장 큰 논점 중 하나였던 노예제 폐지와 흑인 인권 향상을 위해 평생토록 일관되게 투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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