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인 색채 때문에 후대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졌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영웅소설
‘여성’이라는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는 이현경의 이야기
다른 여성영웅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진전된 여성의식
“뛰어난 여성”에 그치지 않는, “남성보다 우월한 여성”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영웅소설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작품에 드러난 진보적인 색채 때문에 학계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학사전》에 보이는 진전된 여성의식이 재래의 우리 것이 아닌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그만큼 작품의 의의와 가치가 저평가된 것이다. 그런데 근래 《이학사전》의 모본이 된 필사본 《이현경전》이 적어도 17세기 말 혹은 18세기 초에 창작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18세기 초의 문헌에 여주인공 ‘이현경’과 관련한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삽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 작품은 한국의 여성영웅소설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학사전》의 진보적인 색채는 여성 주인공 이현경의 인물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여성영웅소설에서 여주인공은 탁월한 무용(武勇)으로 외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워 높은 지위에 오른다. 현경도 오랑캐가 난을 일으키자 대원수로 참전해 큰 공을 세우고 높은 지위에 오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이현경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성’이라는 운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호하게 거부한다는 점에서 다른 여성영웅소설의 주인공들과 차별점을 갖는다.
이현경은 세 살부터 남자처럼 학문에 전념하다가 여덟 살 무렵에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장을 한 채 살아간다. 일반적인 여성영웅은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일체 외간 남자와 접촉하지 않는데, 현경은 과거에 급제하기 전부터 재상가 소년들과 절친한 교우 관계를 맺는다. 이를 걱정한 유모가 “여자의 도를 행하라” 권유하지만, 현경은 여자로서의 삶에는 흥미가 없고 “평생 남장을 한 채 늙겠다”며 물리친다. 여자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의 태도에서도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는 현경의 태도는 한결같다. 남의 평범한 아내로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장연의 간곡한 청혼을 거절하고, 장연과 혼인하라는 황제의 명령마저 규중 여자의 삶을 답답하게 여겨 왔다며 거부한다. 비록 천자의 계교로 부득이 장연과 결혼하지만, 현경이 당대 사회가 요구했던 여성적인 삶을 거부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홍계월전》, 《정수정전》 등 다른 여성영웅소설의 주인공들이 본색이 밝혀진 이후, 아무런 갈등 없이 남주인공과 결혼해 가정 내로 회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이현경이 끝까지 ‘자기’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근거는 그녀의 탁월한 능력이다. 그녀는 시종 강직하면서도 유능한 벼슬아치로 그려진다. 당대 남성 문사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최고의 문장가이며, 올곧은 성품과 애민 의식까지 갖추고 있다. 이러한 이현경의 능력과 성품은, 그녀에 비해 다소 부족한 능력과 용렬한 성품을 지닌 남성 주인공 장연과 대비를 이루고 있어 주목된다. 여타의 작품에서는, 여성 주인공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남성 주인공과 비슷한 정도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과 달리 《이학사전》은 그 무게가 이현경 쪽으로 현저히 기울어 있다. 이현경은 단순히 ‘뛰어난 여성’이 아닌, ‘남성보다 월등한 여성’이다.
한국 고전소설의 대중화를 위해 수많은 작품을 번역해 온 이상구 교수가 1925년 회동서관에서 간행된 구활자본 《이학사전(李學士傳)》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했다. 필사본 《이형경전》과 교감한 원문을 수록해 대조할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