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놀트 겔렌의 철학적 인간학과 근대 기술 문명 이해
아르놀트 겔렌(Arnold Gehlen, 1904∼1976)은 철학적 탐구의 궁극 목적을 인간학적 원리 정립과 근대 서구 기술 문명의 본성을 해명하는 데 둔다. 근본적으로 서구 기술 문명의 근본 성격은 인간학적 원리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구(특히 근대) 기술 문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를 가능하게 한 인간학적 원리를 알아야 한다. 이 책에서 겔렌은 근대 기술 문명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선행 작업으로 인간학적 원리의 정립에 초점을 맞췄다.
이러한 겔렌의 물음은 근본적으로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sche Anthropologie)’의 문제의식이다. 철학적 인간학이란 20세기 초 독일에서 태동한 일종의 철학적 ‘학파’이지만, 겔렌은 자신이 철학적 인간학자의 일원임을 의식적으로 거부했다. 그러다 말년에 마지못해 자신의 철학이 철학적 인간학에 기초해 있고, 당시에 철학적 인간학의 대표자인 막스 셸러(Max Scheler), 헬무트 플레스너(Helmuth Plessner)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인정한다.
겔렌의 인간학: 비판과 수정, 그리고 철학적 변증
이 책은 1940년에 처음 출판되었다(초판). 초판이 나오자마자 겔렌은 많은 비판에 시달려야 했고, 동시에 많은 찬사도 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철학과 생물학을 접목한 이른바 학제적 연구가 당시로서는 생소했기 때문이고, 어쩌면 그 선구자에 대한 비판과 찬사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겔렌은 처음부터 비판에 대해 진지한 검토를 거쳐 정당한 비판은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마침내 1950년에는 최종적으로 수정된 4판이 상당히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수정된 것 중에는 인간의 본능 감소가 과도하다는 비판에 대한 겔렌 자신의 태도 변화가 눈에 띈다. 이와 관련하여 겔렌은 인간 행동에 타고난 본능적 기제(예를 들어 표현적 몸짓)가 확인된다는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 이론에서 세계와 자아 사이의 상호작용적 매개가 간과되었다는 비판과 관련해서는 미국의 사회학자 조지 미드(George Herbert Mead)의 이론을 받아들여 마침내 그는 인간과 사물, 사회 간의 ‘삼각관계’를 구축하였다. 그 밖에 겔렌은 셸러의 인간 내면세계의 계층화된 구조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과 긴 토론 끝에 하르트만의 세계 계층 구조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겔렌이 자신에 대한 비판을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겔렌의 거부가 근거 없다고 주장하고, 특히 겔렌이 받아들인 진화론이 ‘생물학적 연구의 국외자들’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겔렌은 이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부했다. 이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겔렌의 근본 개념인 ‘결핍’ 존재의 토대가 상실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겔렌은 자신에게 제기된 철학적 반대에도 자신을 적극 변호한다. 예를 들어 어떤 철학적 근거도 없이 인간 존재의 형태학적 특성에서 ‘행동’ 개념을 도출했다는 점, 언어의 원초적 성격을 잘못 평가하여 언어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 언어의 의사소통적 성격이 세상과의 상호작용, 말하자면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점 등이 겔렌에게 제기된 대표적인 반대다. 번역의 원전으로 삼은 이 책 4판에서 이러한 비판에 대해 좀 더 분명하게 해명된 겔렌의 견해를 보게 된다.
* 번역에 사용된 저본은 카를 지크베르트 레베르크(Karl-Siegbert Rehberg)가 편집한 전집(Arnold Gehlen Gesamtausgabe)에 수록된 제3권 《Der Mensch, seine Natur und seine Stellung in der Welt》(Frankfurt am Main: Vittorio Klostermann GmbH, 1993)를 사용했다. 전집 3권은 1부와 2부로 구성된 2책으로 되어 있다. 1부에는 (편집자에 의해 최종적으로 교정된) 겔렌의 본문이 수록되어 있고, 2부에는 지금까지 다섯 번의 본문 개정이 있었던 사연을 잘 정리하여 어떻게 개정되었는지 보여 주는 비교표 작성과 편집자 후기, 색인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에서 옮긴이는 전집의 1부 전체와 2부의 편집자 후기를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