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를 그리다
하얀 도화지 위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아니, 그리다가 만다. 잠깐 생각에 잠긴다. 동그라미를 어디까지 그려야 할지 몰라서다. 동그라미의 첫 시작은 탄생(誕生)이니 동그라미의 끝은 사멸(死滅)일 수밖에 없다. 아직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나는 동그라미의 어느 부분에 서 있는 것일까. 심오한 생각에 잠긴다.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나이니 원의 지름에 위치하진 않을 것이다. 15도나 30도, 아니 어쩌면 45도까지 사멸 쪽으로 기울어진 건 아닐까. 그렇더라도 상관없다. 기울기는 어느 지점에서 진행할 수도, 퇴보할 수도 있어서다. 삶의 동그라미는 탄생과 사멸이 만나야 완벽해진다. 하지만 동그라미의 끝과 끝이 만나는 지점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알 수 없어서 다행이다. 그 공간을 희망으로 채울 수 있어서다.
동그라미를 그리다 말고 왔던 길로 거슬러가 본다. 사십 대, 삼십 대, 이십 대, 십 대, 유년기까지 나름대로 위치를 정해 본다. 그리고 가만히 바라본다. 그것들은 제각기 다른 색깔을 갖고 있다. 색깔뿐 아니라 길이도 다르다. 살아 있는 시간이 있는가 하면 죽어 있는 시간도 있다. 생생한 기억으로 재생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흐릿한 형체로 기억되는 부분도 있다.
지나온 발자취는 과거의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봉인된다. 그건 한사람이 살아온 거대한 역사의 저장 공간이다. 역사는 위대한 나라, 위대한 영웅들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한 사람의 삶도 역사가 될 수 있다. 항아리의 뚜껑을 열고 그들을 깨워 의미를 부여했을 때 그것들은 살아나서 개인의 역사를 완성한다. 수필은 그 역사를 실현해 주는 행동철학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의 내용이 있다. 의미도 마찬가지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느 한순간과 사건들, 에피소드는 행복이 될 수도,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감정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그건 한순간의 일이다. 시간이 개입하면 그것은 공기 속에 소멸(消滅)된다. 그리고 그 시간을 장식했던 모든 건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다시 꺼내주지 않으면 그저 과거의 일일 뿐이다. 그렇게 쌓인 수많은 일들,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대단한 것일지라도 지나고 나면 그뿐이다.
글쓰기는 그것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꽃을 피우게 하는 일이다. 특히 수필은 자신의 삶과 인생을 담는 그릇이라 했다. 자신의 현재를 뒷받침해 주었던 커다란 깨우침이나 울음이 자라던 날, 웃음이 팡팡 터지던 날에 밑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는 일이다.
나의 수필 쓰기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내는 일이었다. 병이 되기 전, 암 덩어리처럼 굳어지기 전에 응어리를 한 가닥 한 가닥 풀어헤쳐 맑은 햇살과 바람에 말리는 일이었다. 그 응어리 속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가족이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아픔의 근원(根源)이었다. 툭 건드리면 울음이 쏟아질 것 같은 어머니의 삶은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를 빼놓고 내 삶을 말하기는 힘들었다. 내 글 속에 어머니가 수없이 등장하는 이유다.
내게 어머니는 무조건 옳다. 앞뒤가 맞지 않고, 이치에 어긋나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얼토당토않은 일에 화를 내도 어머니는 내게 항상 옳다. 여태껏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어머니의 희생을 진부한 언어, 신파적 표현으로 미화하고 싶진 않다. 진솔함으로 다가갈 수 있으면 어머니의 한(恨)을 조금이라도 씻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지난 일에만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현재 발을 딛고 있는 생활 속 이야기들을 나는 수필 속에 담는다. 대개는 힘없고, 가난한 이웃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많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들의 모습과 그들의 삶이 눈에 더 잘 띈다. 어쩌면 내 삶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 쉽지 않다. 자신의 못난 부분과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진실을 말할 수는 없다. 내게 수필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더 매력을 느끼고 그 매력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되었다.
수필에 푹 빠져 살면서부터 내게는 시간개념이 달라졌다. 시간을 어떻게 쪼개 효과적으로 이용할 것인가를 매일 생각한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이 내게는 황금시간이다. 그 시간은 온통 글쓰기에 전념한다. 생각을 모으기 위해 눈을 감고 수많은 곳을 둘러본다. 과거, 미래는 물론이고, 어디선가 본 풍경, 누군가에게 들었던 이야기 등, 하나도 허투루 버릴 수가 없다. 모두가 소중한 삶들이고, 모두가 소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평일 저녁에는 거의 매일 운동을 하러 다닌다. 가끔은 피곤한 몸이 운동을 못 하게 방해하기도 한다.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운동을 빠지라고 부추길 때가 있다. 그 순간의 갈등을 이기고 운동을 가는 날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건강한 글쓰기에는 건강한 몸과 마음이 필요조건이라는 생각에서다. 한곳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글을 쓰고 있는데도 글에 대해 목이 마르다. 아직도 한없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목마름은 앞으로 더 간절해질지도 모른다. 민얼굴을 세상에 내놓았으니 그에 대한 책임감을 벗어버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아직 채우지 못한 동그라미를 완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비록 사멸에 훨씬 더 가까워진 동그라미지만 거기에는 희망이 있으니 두렵지 않다.
심오한 철학(哲學)과 폭넓은 지식, 넘치는 해학(諧謔)과 깊은 설득력이 있는 글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가슴에 잠깐 머물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으리라. 내 삶의 스승이며 글의 주체(主體)가 되어준 어머니께 이 책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