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동산’과 지독하게 얽힌 한 가족의 흥망사를 다룬 에세이. 이야기의 바탕이 된 영화 <버블 패밀리>는 ‘제14회 EBS국제다큐영화제’에서 한국 작품 최초로 대상을 수상하였다. 영화의 감독이자 책의 저자인 마민지가 ‘K-장녀’의 시선으로 약 30년에 걸쳐 가족이 겪어온 흥망성쇠를 1980년대 한국의 도시개발사와 함께 엮어 신랄하고도 흥미롭게 풀어낸다. 책은 단 한 가족의 이야기를 능란한 글솜씨와 위트로 풀어내고 있지만 사실 이 '땅'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buy) 집은 넘쳐나지만 정작 살(live) 집은 부족한 대한민국 부동산의 현실은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 건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지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할 수 있게 한다.
아빠는 내일 아침 관리사무소 문이 열리는 대로 밀린 돈을 모두 낼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텔레비전이 켜지지 않는 거실에선 가족들끼리 할 일이 없었다. 아빠는 일찌감치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냉동실에 있던 음식들을 급한 대로 아이스박스에 옮겨두었다. 화장실에 초를 가지고 들어가 세수를 하던 나는 혹시 귀신이 나올까 무서워 엄마에게 옆에서 계속 말을 걸어달라고 했다. 자기 전 엄마와 함께 침대에 누워 바라본 보름달은 평소보다 훨씬 밝아 보였고, 달빛이 비추는 집 안 풍경은 낯설었다. 그날은 우리 집이 망한 날이었다.
<프롤로그: 우리 집이 망했다> 중에서
40평대는 인기가 많은 평수여서 매물이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40평대보다 큰 평수는 세 가족이 살기엔 넓었다. 엄마는 이미 부동산에 다녀왔다는 말은 슬쩍 빼놓고 아빠에게 이사를 가자고 제안했다. 아빠는 흔쾌히 알아서 집을 알아보라고 했다. 엄마는 한동안 부동산을 들락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유치원과 초등학교 딱 중간에 위치한 아파트 한 채가 매물로 나왔다. 엄마는 일단 바로 계약금을 넣어버렸다. 그리고 아빠에게 집을 계약했다고 통보했다. 3억9천만 원. 아빠는 예상보다 비싼 매매가에 당황했지만 이후에 이자를 감당하기가 크게 어렵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내가 태어난 후 첫번째 이사를 하게 되었다.
<처음엔 모든 게 평화로웠다> 중에서
아빠가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다고 했다. 대대적으로 인테리어 수리를 해서 들어온 집이었던 데다가 엄마는 이 집에 대한 애정이 컸다. 더욱이 지금 당장 사업이 어렵다고 집을 팔면 다시 회복하기 어려울 거라고 주장했다. 몇 차례의 고성이 오간 끝에 결국 아빠가 이겼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아빠는 당시 가파르게 오르는 금리 탓에 도산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장 융통할 수 있는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아빠는 팔 수 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팔았다. 탄탄하고 견고하게 쌓아두었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모래성이 파도 한 번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올 것이 왔다, IMF> 중에서
인터뷰를 여러 차례 진행하면서 동시에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고 당신들이 살아온 시대 배경 속에 두 사람을 위치시켜보면 지금 우리 가족이 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동산과 도시개발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잊어버릴 만하면 두 사람의 입에서 그 단어가 튀어나오는지 알고 싶었다. 부모님이 살았던 집과 도시의 이주 경로를 따라가며 같은 시기의 도시개발 정책과 경제 흐름을 전반적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대략적인 배경을 정리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정보가 모일수록 우리 가족의 역사가 한국의 도시개발사 그리고 부동산 투기의 흐름과 맞닿아있는 지점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새로 알게 된 정보를 토대로 추가 인터뷰를 진행했다. 마침내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알고 싶어서, 이해하고 싶어서> 중에서
“돈이 막 뻥튀기가 되는 거야. 예를 들어서 1억에 지었으면 2억은 기본으로 받는 거야. 상가는 두 배는 받았을 거야. 그 당시에는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지. 그냥 우리 집이 성공한 거고 아빠가 사업이 잘 되니까 돈을 매번 많이 벌어오는 게 특별한 게 아니고 아빠가 잘 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지. 그 당시에는 주택 붐이 많이 일었잖아. 너도 나도 그런... 빌딩 지어서 매매하고. 주택보다도 빌딩이 아무래도 시세가 더 나가잖아 응? (중략) 강동구청 앞에 땅이 있었는데 그때는 집이 별로 없었거든. 그래서 땅값 밖에 안 댔지. 건축하면 세 받을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지었어. 어쨌든 밀어붙였어. 그래서 거기에서 마천동에 빌딩을 하나 짓고 거기서 또 둔촌아파트 건너편에 사거리 있어. 거기 코너에 또 땅을 샀어. 거기도 빌딩을 지었어. 4층짜린가? (중략) 가락시장 가기 전에 또 어디에 상가를 지었어. 거길 또 몇 배 남겼지. 다 여기 일대야.” —엄마 구술 생애사 인터뷰 중
<올림픽 깃발과 함께 올라간 우리의 빌딩들> 중에서
IMF외환위기 이후 대형 건설사가 줄도산하는 상황에서 작은 건설사를 운영하던 아빠의 사업이 예전처럼 잘 유지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것은 시대의 흐름이기도 했다. 비록 ‘집장사’이기는 했지만 부동산으로 한 평생 경제 활동을 해왔던 두 사람은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동아 직접 경험해 왔던 부동산에 대한 믿음으로 부모님은 과감한 결정 혹은 과도한 욕심으로 ‘올인’해 버린 이번 베팅은 성공적이지 않았다. 또한 세월이 흐르고 시장은 바뀌었지만 두 사람에게 부동산을 제외한 다른 선택지는 잘 보이지 않았을 것 같다. 부모님의 선택을 온전히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과거의 도시개발 과정을 살펴보니 그 이면에는 사람들의 투기를 부추기고 책임지지 않는 한국사회가 있었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 부동산 가족!> 중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탑골공원에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며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아빠는 동료(처럼 여기는 사람)들과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며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종일 죽치고 앉아 있는 할아버지들을 보는 카페 사장님들 속은 타겠다 싶지만, 이 사람들이 갈 곳이 또 어디 있겠나 싶었다. 그래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말라고 단속을 나간다는 경찰들이 야속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제 시간은 IMF 외환위기가 오기 전으로 되돌릴 수 없고, 사회구조는 이미 달라질 대로 달라졌다. 나는 다만 일흔이 넘은 엄마와 아빠가 더 이상 무언가 만회하겠다며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맥도날드의 회장님들> 중에서
그리고 IMF 외환위기를 극복했다는 신화 뒤에 남겨진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어린 시절 갑자기 좁은 평수로 집을 이사 가야 했거나, 양육자가 정리해고로 직업을 잃었거나, 중소기업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부도가 났거나, 양육자 중 특히 어머니가 실질적 가장이 되어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 시작한, 어떤 형태로든 정상가족이 해체되는 경험을 하며 자신의 속사정을 가까운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끝없이 치솟는 아파트값을 보며 더 이상 내 집을 가지지 못할 거라고 체념해버린 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조건들 위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서 있다가도, 그 땅이 언제든 다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들과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
<‘내 땅’을 통해 바라본 것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