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지성사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키케로 그는 철학, 정치에서 더욱 읽히고, 연구되고, 활용되어야 한다 참된 벗 드문 오늘날, 우정의 본질을 깨닫다『우정에 대하여』 늙음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색 빼어난 통찰『노년에 대하여』
뛰어난 웅변가이자 정치가, 철학자인 키케로
키케로는 가장 구체적, 현실적으로 정치를 철학하고 정치를 철학과 결합하려고 노력한 철학자이다. 키케로가 신처럼 떠받드는 플라톤은 정치가는 아니어서 모국의 정치를 독자적으로 바라보았지만, 키케로는 처음부터 정치가를 지망했고 로마 정치 세계의 최고 지위인 집정관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언제나 원로원의 여론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더구나 그는 동시대 사람인 카이사르나 폼페이우스처럼 철학에 관심 없는 현실주의적 정치가는 아니었다. 또 단순히 견식이 높고 완고하여 로마공화정의 이념을 굳게 지킨 카토와도 달랐다. 인간적 교양의 풍부함에서 키케로는 정치가로서도 철학자로서도 플라톤에 필적하는 그릇이었다.
저자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43)
마지막 로마공화정을 이끌었던 정치가, 연설가, 사상가.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 몰론에게서 수사학을 익혔고, 아카데미아 학파를 대표하는 라리사의 필론에게서 철학을 배웠다. 스물다섯 신참 변호사 시절 탁월한 변론술로 심지어 술라의 측근을 패소시키기까지 했지만, 후한이 두려워 한동안 희랍으로 피신하여 학문에 몰두했다. 이후 로마 역사상 최대 양민 수탈 사건의 주인이었던 베레스 탄핵에 성공하여 당대 최고의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다.
기원전 63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는데, 이때 카틸리나 반역음모를 밝혀 ‘국부’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키케로의 절차 위반이 문제가 되어 테살로니아로 망명한다. 삼두체제를 계획한 카이사르가 공화주의자 키케로를 회유하는 데 실패하자 그를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로마로 돌아왔지만 원로원 파로서 카이사르 파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또다시 이집트로 망명했다. 기원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정계에 복귀했으나, 다음 해에 정권을 장악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암살당했다.
키케로는 정치적으로는 뛰어난 변론으로 불의에 항의했고, 뜨거운 신념으로 독재에 항거했다. 학문적으로는 수사학자로서 『연설가에 대하여』 등을 집필했고 로마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위대한 공화주의 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로서 『국가론』 등을 집필했다.